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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내가 받은 글씨 / 주재용 교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2-13 13:28
조회
1286

내가 받은 글씨

주재용 교수(한신대학교 명예교수)

나는 1981년 WCC 산하에 있는 신학교육 관계 협의회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모였을 때,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 총무로서 한국의 신학교육 기관을 대표해서 참석한 일이 있었다. 회의를 끝내고 마침 캐나다 토론토 이상철 목사님 댁에 머물고 계신 장공 김재준 목사님을 방문하였다. 김 목사님께서 불가피하게 한국을 떠나신 후 처음이고 또 이국 땅에서 뵙게 되어 참으로 기뻤고 감격스러웠던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이때, 두 가지 귀한 선물을 받았다. 그 하나는 캐나다에서 계속 발간하고 계셨던 잡지 「제3일」이다. 지금은 그때 실렸던 글들이 모두 공개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때는 그 글들이 금지되어 있을 때였다. 한국에서는 읽을 수가 없을 때였다. 나는 목사님이 주시는 두 권의 가제본된 책을 받아 귀국할 때 가지고 왔으며, 그 후 학교에서 “한국기독교신학사” 세미나에서 사용한 바가 있었고, 장공 김재준 전집에 자료로 제공해 주었다. 나는 지금도 왜 김 목사님께서 나에게 그 잡지를 주셨는지 그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역사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니 한국기독교 역사 연구에 참고하라고 주신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하나는 김 목사님이 친히 써 주신 ‘붓글씨’다. 그 해 여름은 매우 무더웠다. 그래서 김 목사님이 글씨에 “1981년 맹하(孟夏)”라고 쓰셨을 정도였다. 그렇게 무더운 여름에 목사님은 세 편의 붓글씨를 써 주셨다. 하나는 매우 긴 문장인데 한문 실력이 없는 나로서는 지금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거실에 걸어 놓고 있을 뿐이다. 한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에게 그 글의 뜻을 해독해 달라고 했으나 시원하게 풀어 주는 사람이 아직 없다. 뜻도 잘 모르고 거실에 걸어만 놓고 있어 목사님께 매우 송구할 따름이다. 그러나 거실을 오가며 눈으로나마 늘 읽고 있는 나는 무의식 중에 그 글의 뜻이 내 마음에 새겨질 것으로 믿고 있다.

다른 두 개의 글씨는 “정중동”(靜中動)이라는 것과 “일의전심 금석가투”(一意專心, 金石可透)라는 글이다. 이 글들의 뜻은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는 것들이다. 왜 김 목사님이 1981년에 이 글들을 나에게 써 주셨는지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위의 첫 번째 글의 경우와 달리 그 이후 이 글들의 뜻을 내 삶의 지표로 삼고 있다.

“정중동”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정’은 영어의 quiet에 해당된다. 조용하고 고요하고 겉으로 움직임이 없고 말이 없으며 깨끗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중’은 영어의 middle이다. 가운데 ‘중’으로, 치우치지 않고 과불급이 없는 도(道)요 곧고 바르고 꿰뚫고 과녁을 맞추는 뜻이 있다. ‘동’은 영어로 move이다. 움직일 ‘동’으로, 일어남이요 시작함이며 나타남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써 주신 김 목사님은 나에게 ‘가볍고 천박하게 떠들지 말고 깊은 물속 저변에 흐르는 물과 같이 유유히 흘러가면서도 과불급이 없는 인간의 정도를 걸어가는 사람, 유치한 정치적 이해 관계로 쉽사리 움직이는 사람이 아닌 삶, 그러나 교권주의자들의 횡포가 있을 때는 과감하게 일어나는 사람의 삶’을 살라고 하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김 목사님의 뜻을 내가 얼마나 내 삶에서 실현했는지 나는 지금 말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나름대로 노력을 했을 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늘에 계신 김 목사님께서는 아실 것이다.

두 번째 글, 일의전심 금석가투에서 ‘일’은 하나, 근본, 처음, 온통일, 동일하고 고르고 순수한 것을 뜻한다. ‘의’는 영어의 meaning, intend, will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지 않고 뜻을 세우고 생각을 깊이 하여 정한 마음을 갖는다는 뜻이다. ‘전’은 영어에 only에 해당된다. 오로지 외곬수의 뜻이지만, 이 글에서는 앞뒤가 꽉 막힌 배타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심’은 영어의 mind 또는 heart이다. ‘금석가투’에서 ‘금석’은 가장 강하고 경고한 돌을 의미하는 것이고, ‘가투’는 영어로 can pass through로서 무엇이나 꿰뚫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일의전심 금석가투는 고르고 순수한 한 가지 일에 마음을 정하고,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전력투구한다면 불가능하게 보일 수 있는 그 어떤 일(경고한 돌)이라도 능히 해낼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일의전심’이 없고 ‘금석가투’만 있다면 내용이 부정하고 불의한 것이든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것이 될 것이다. 또 ‘금석가투’가 없고 ‘일의전심’만 있다면 마음만 있고 행동이 없는 이상론자로 머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고르고 순수한 한 가지 마음을 정한다는 것을 ‘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뜻’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 또는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정하고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전심한다면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나는 김 목사님이 글을 써 주신 뜻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렇게 살아 보려고 노력을 하느라고 했다고 할 뿐이다. 하늘에 계신 김 목사님은 아실 것이다.

장공 김 목사님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장공을 회상하는 글”의 집필을 부탁받고 위와 같은 글을 쓰고 나니, 새삼 장공 선생님의 얼굴이 내 마음에 그려진다. 김 목사님이 나에게 써 주신 위의 두 글씨는 사실 김 목사님의 삶을 나에게 알려주신 것이 아닌가 한다. 김 목사님의 삶이야 말로 ‘정중동’의 삶이었고, ‘일의전심 금석가투’의 삶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김 목사님은 ‘재용 군!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 너도 그렇게 살 수는 없겠느냐?’고 손자에게 교훈하듯이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한신대에 입학할 때부터 교수가 되고 은퇴한 지금까지 김 목사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 어른의 뜻을 한신대와 기장이 성례전적으로 기념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