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장공 목사님의 퍼주기식 제자 사랑 / 조원길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2-13 11:40
조회
49

장공 목사님의 퍼주기식 제자 사랑


조원길 목사(서울남노회 원로목사)


나와 장공 김재준 목사님 사이에 있었던 참으로 은밀한 관계에 대해서 증언하려고 한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모르는 숨겨진 일들이다. 당사자인 내가 아무에게도 발설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들은 우리 교회 역사에 남겨 놔야 될 가치 있는 자료라는 생각이 들어서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때는 6․25가 발발한 직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사실 중학교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면소재지에 있는 고등공민학교였다. 나에게는 정식으로 된 중학교 졸업장이 없다. 고등공민학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인데, 중학 과정 2년을 마친 1950년 11월로 기억된다. 그 해 강구장로교회 남주석 목사님을 방문하게 되었다. 갈 때마다 방 청소를 해드렸는데 어느 날 가서보니 그 분 책상 위에 있는 한국신학대학 학보가 눈에 띄었다. 신문의 큰 제목이 성서 해설에 있어서의 목적영감설과 축자영감설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그 때 나는 목적영감설이 뭔지 축자영감설이 뭔지 알 턱이 없었다. 글쓰신 분이 한국신학대학 학장 김재준 목사라기에 이 분이 누군가 궁금해서 그 글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어려운 내용이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몇 번을 읽었다. 목사님이 그 신문을 내버리신다 하기에 그걸 집으로 갖고 와서 몇 번이고 또 읽었다. 문장이 곱다든지 성서를 해석하는 신학적 깊이가 어떻다든지 하는 것은 알 수 없었지만 목적영감설이란 것이 무엇인지 그 하나만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튿날 남 목사님을 찾아가 외람되게도 이렇게 묻게 되었다. “목사님 이 글을 쓰신 김재준 목사님께 가서 뭔가를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을까요” 그랬더니 “신학교에 학사학위가 없는 선과라는 게 있는데 고등학교 졸업증서 없이 선과에는 들어갈 수 있으니 아마도 선과입학은 될 것이다” 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면 목사님 그 학교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물었다. “원래는 서울에 있는 학교지만 지금은 피난을 와서 부산 남부민동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부산행 완행버스를 탔다. 새벽에 남부민동 피난신학교에 당도했다. 김재준 목사님의 판자집 사택의 문을 두드렸다. 한 겨울 아침 식전, 김 목사님이 잠옷 바람으로 나오셔서 나를 맞아주셨다. “어디서 왔느냐”고 하시기에 “강구장로교회 남 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학생인데 목사님의 글을 보고 목사님 밑에서 꼭 배우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뵌 것인데 선과라는 데라도 좀 들어갈 수 없겠냐”고 했다. 이에 김재준 목사님은 “넌 아직 어리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약속을 받고 그 길로 집으로 와서 일단 고등공민학교 3년을 마쳤다. 고등공민학교 졸업장으로 입학이 가능한 포항 동지상고야간부에 입학, 천신만고 끝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자격증! 한국신학대학 본과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1956년 그러니까 기억도 새로운 부산 ‘오륙도 동자동’으로 신학교 입학 시험을 치러 갔다. 그때 경쟁률이 4.5:1쯤이었다고 기억된다. 시험문제를 받아 보니 거의 답을 쓸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거의 백지 그대로를 냈다.


구두시험, 드디어 김재준 학장 앞에 앉게 되었다. 앉자마자 나는 “학장님께서 부산 남부민동에서 이리이리 약속하셔서 3년 동안 고등학교 야간과정을 공부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고 말씀드리니 “아! 네가 바로 조원길이구나” 하시더니 “알았다”면서 목사님은 구두시험을 마치셨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나의 한신 입학은 4.5 : 1을 뚫을 수 있는 나의 실력이 아니었다. 장공 목사님이 눈감아주신 ‘은혜’의 결과였다. 김재준 목사님이 그때 어떻게 해서 합격시켜준 것이 분명했다.


1957년도 6월에 군에 입대, 만기 제대했다. 그 당시 학교 캠퍼스인 서울 수유리에 가서 보니까 급우들도 2학기 개강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등록을 위한 학자금이 없었다. 기숙사비조차 낼 형편이 안 되었다. 정말 무일푼상태였다. 그래서 김재준 학장님을 만나 속사정을 말씀드리려 했다. 그러나 이미 김 목사님은 캐나다에 가셔서 부재중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목사님께 편지를 썼다. 캐나다에 계신 김재준 목사님께. 여차여차해서 더 이상 공부할 형편이 못되어 고향에 내려가려 하는데 언제 다시 뵙게 될지 모르겠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작별인사였다. 얼마 후 기숙사에 있던 나에게 학교 서무과장인 최득립 집사님이 나를 찾는 것이었다. 서무과로 갔더니 파란 색깔의 항공우편 하나를 내게 보이면서 하는 말이 “이거 큰일났다”는 것이었다. “학장님이 캐나다에서 조원길 학생에게 이달분 월급을 등록금으로 내주라 하시면서 도장까지 찍어 이렇게 보냈으니 학장님의 가족들은 이 월급을 기다리고 있는데 큰일났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김 목사님이 캐나다에서 보낸 편지는 학장 봉급을 등록금으로 대납하라는 위임장이었던 것이다(목사님의 인감도장이 찍힌). 학장님의 봉급덕으로 나는 새 학기에 등록, 복학하여 신학수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학장님 가족이 당했을 경제적 고난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도록 아프기 그지없다. 아무리 철이 없었기로 염치없는 일이었다는 후회도 든다.


김재준 목사님이 드디어 귀국을 하시었다. 우리 학생들이 수유리 캠퍼스 잔디밭에 모여서 학장님 귀국 환영회를 갖게 되었다. 학장님은 돌 위에 스셔서 “환영해줘서 감사하다”고 귀국인사를 하시고는 난데없이 “조원길 군이 어디 있느냐”고 나를 찾는 것이었다. 앞으로 나갔더니 그 많은 학생들 앞에서 책 한 권을 주시면서 “공부 잘해” 하시는 것이었다. 그 유명한 “Here I stand”(내가 여기 있나이다), 마르틴 루터의 책이었다. 평생 처음으로 손에 쥐어본 영어 원서였다.


3학년 2학기 때였다. 김 목사님은 또한 당시 미국 보스턴에 유학 중이던 이영찬 목사님이 현지에서 주선하여 보내는 장학금을 받도록 연결해주셨다. 그때부터 이영찬 목사님 사모님이신 한초덕 교수(이화여대 약대)를 통하여 매달 이 장학금 생활비를 수령했다. 이 장학금은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시는 장공 목사님의 퍼주기식 지원이 없었던들 나의 신학수업과 목회생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의 일이다. 김재준 목사님이 입원을 하시게 되어서 병문안을 갔다. 가서 “목사님 이제 제가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목사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말씀드리니 목사님께서 “그래 고맙다고 생각되는 일은 보답해야 한다. 조군이 평생토록 목회를 잘하고 목회에 성실하면 그것이 내게 보답하는 것이다”는 한마디 뿐이었다.


27년 전 지금의 남성교회에 와서 개척에 가까운 목회를 시작한 이후 생명 다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이 길이 김재준 목사님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최근에 증경총회장 이영찬 목사님께 남성교회가 이만큼 성장한 것은 장공 선생님의 덕인데 보답할 길이 없다고 했더니, 이 목사님 또한 “은혜를 입었다면 보답해야지 하지만 교회를 이만큼 키우고 열심히 목회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 하셨다.


나는 아침마다 열왕기상 3장 6절 말씀을 읽고 명상한다.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주 안에서 주를 위해 산 다윗의 신앙과 삶에 대한 증언이다. 이 말씀과 함께 오직 성실하게 목회하라시던 장공 목사님의 권면의 말씀을 기억한다. 그리고 성실과 공의와 정직으로서 평생 목회적 봉사에만 충실하자고 다짐한다.


그 해 가을 장공 목사님을 만나면서 연유된 나의 목회생활 40년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장공 목사님의 사람을 가리지 않는 퍼주기식 도움이 없었던들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외 유학중에 월급봉투를 털어 이름 없는 제자의 새 학기 등록금으로 대납해 주시던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사랑의 손길을 나이가 더해 갈수록 잊을 수가 없다.


바리새적 교조주의에 대한 전투적인 비판,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참여와 함께 장공 목사님의 후학과 제자에 대한 행동하는 사랑은 역사적 진실로 우리 모두가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장. 한신의 자랑스런 유산과 전통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