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내 혼 속에 오늘도 살아 계신 님 / 이윤구 인제대학교 총장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2-05 10:56
조회
193

내 혼 속에 오늘도 살아 계신 님


이윤구(인제대학교 총장)


글 머리에


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지 백 년이 되는 해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 혼(魂) 속에 오늘도 살아 계신’ 스승이어서 목사님의 온후하신 말씀을 생생하게 듣고 있는 듯하다고 주저하지 않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큰 하늘(長空)을 향해 날아 오르시기 며칠 전에 괴로운 병석에서 주신 말씀, 토론토에서 「제3일」을 다시 펴내실 때의 일화, 뉴욕 유엔에서 제가 일하고 있던 80년대 우리 집에 오시던 날 큰길에서 있었던 일, 이 못난 제자를 아니 버리시고 늘 사랑해 주셨던 대학생 시절의 추억들이 되살아 옵니다.


님께서 못 가 보시고 늘 그리워하시던 아오지(阿吾地)의 오봉동(五鳳洞)에 꼭 찾아가게 되면 그 ‘창(倉) 고을’ 집터에다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보고 싶은 마음으로 붓을 듭니다.


장공(長空)을 향해 떠나시며 주신 말


병환이 아주 위독하시고 우리를 떠나 독수리처럼 하늘로 가시기 며칠 전 병원에서 마지막 뵈었을 때 주신 가냘프지만 힘찬 말씀이 있었습니다. 제게는 지금도 생생하게 들립니다. “혹시 북녘 땅에 가거든 내가 아무것도 못한 고향 땅 경흥(慶興)에 내 대신 무어라도 좀 해줄 수 있을까?”


목사님께서는 내가 유엔에 있을 때부터 조금씩 남북 화해와 통일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을 아시고 어쩌면 딴 사람들보다 먼저 북녘 땅을 찾게 될 것을 막연하게라도 예견하셨던 것 같습니다.


북녘 땅 우리 한겨레가 점점 어려워지는 정치, 경제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고향 땅 생각에 퍽 마음 아파하셨던 말년을 보내다가 가셨습니다. 우리에게 맡겨두고 가신 민족 화해와 재통합의 새벽이 밝아 오고 있어서 목사님의 유언 같으셨던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기게 될 날이 속히 오게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토론토에서 다시 나온 「제3일」


토론토에 사부께서 나오셔서 잠시 쉬고 계시던 때였습니다. 나라 형편이 말이 아니던 때 너무 많은 고생을 하시다가 조용하고 평화스런 토론토에 계시던 때에 나는 인도에서 유엔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뉴욕에 출장을 갔다가 스승을 뵙기 위해 캐나다로 갔습니다.


몇 시간 뵙고 다시 급한 길로 발을 돌려야 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라 걱정, 민주 운동 동역자들에 대한 염려로 안타까워하시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별로 할 것이 없어 오히려 답답해 하셨습니다.


문득 제 마음에 목사님께서 하실 일, 하셔야 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3일」의 복간(復刊)이었습니다. 많지 않은 여비를 좀 떼어 드리면서 용기를 내시도록 해 드렸던 일을 다행이었다고 지금도 느낍니다. 「제3일」은 그 후 여러 차례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받아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북미와 조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고 판단됩니다.


셋째 날! 부활 신앙의 상징인 예루살렘 골고다는 2000년 후 우리 인류 60여 억에게 땅 끝에서 바다 끝까지 있어야 하는 혼의 ‘날’입니다. 목사님께서 잡지의 표제를 이렇게 잡으신 뜻을 알 것 같습니다.


뉴욕 우리 집에 오시던 날


어느 해 어느 때였는지도 아물아물 확실한 기억이 안납니다. 내가 유엔 본부에 있었던 기간이었으니까 8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뉴욕과 워싱턴에 오신 일이 이따금 있으셔서 시간이 허락될 때면 우리 집에 오셨습니다.


뉴저지 쪽에서 내 차로 숲이 깊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내가 운전을 하고 옆자리에 목사님이 앉으셔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우리 차 앞에서는 대형 트럭(자동차 몇 대쯤은 싣고 다니는)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흥분하시거나 말소리를 높이지 않으시는 목사님께서 갑작스럽게 차를 좀 멈추라고 당혹스럽게 호령을 하시어서 영문도 모르고 서서히 길 옆으로 차를 세웠습니다. 목사님은 앞의 대형 트럭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두려운 얼굴로 내다보시기만 하셨습니다.


한참 후에야 숨을 돌리시며 혹 그 앞의 차가 우리나라 정보기관에서 못된 짓을 하려고 보내 온 차가 아닐까 하는 끔찍스런 육감이 드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얼마나 늘 놀란 가슴으로 지내 오셨기에 뉴욕에 오셔서도 그런 위협 공포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계실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소파에 편히 앉으신 다음에야 한숨을 내쉬시며 이 불행한 시대의 우리 조국을 멀리 놓고 걱정하시는 이야기들을 계속하셨습니다. 님께서는 20세기 후반의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운동에 앞장을 서서 위대한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 이면에 이렇듯 힘든 정신적 위협을 늘 안고 사셨습니다.


못난 제자도 안 버리신 스승


나는 6ㆍ25 전쟁중에 죽는 경험을 한 다음 삶의 꿈을 바꾸고 섬기는 인생을 택하려고 부산 남부민동의 신학대학을 찾아가서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면접을 하시던 교수 여러분에게 나는 봉사하는 일을 위해 신학교에 왔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불합격이 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후에 알게 된 일입니다. 김재준 목사님께서 특별히 넓은 마음으로 디아코노스(봉사하는 집사) 같은 제 장래도 신학 교육을 받는 것이 좋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학생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물론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사회사업 공부를 위해 딴 학교로 옮길 때도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종전 후 기독교세계봉사회(CWS)나 세계기독교협의회(WCC)의 일을 위해 중동 성지로 가 있을 때도 늘 편지를 주시고 이 못난 제자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20년의 해외 봉사를 마치고 귀국할 결심을 하는 데도 목사님의 강권하심이 퍽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지은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까 하고 모교 한신대학에서 가르치다가 그것도 오래 못하고 그만두었지만 하늘보다 넓고 큰 스승의 빚은 갚기 시작도 못했습니다. 빚쟁이로 이제는 내가 인생의 석양길에 섰습니다.


아오지 오봉동에…


옛날 목사님의 고향 함북 경흥 땅 아오지 오봉동은 지금 같은 곳이 은덕 구역(군) 안에 오봉 노동 구역으로 변모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반도의 북쪽 끝에 놓여 있어 오히려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쪽에서 가는 길이 가깝습니다.


연변 북간도의 용정 등을 갈 때마다 강 건너 남쪽으로 목사님의 옛 고향 땅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빨리 저 땅으로 갈 기회를 줍소사고 소원했습니다. 1995년에 시작한 어린이 먹이기 운동으로 어쩌면 아오지 땅에도 적지만 우리의 사랑이 조금은 갔을 것으로 믿습니다.


올해 다시 우리 인제대학교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힘을 모아 ‘생명의 국수 먹이기’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평북 정주(옛 오산학교가 섰던 곳)에서 만 명의 유치원과 탁아소 아동들을 먹입니다. 이 운동이 목사님의 동갑내, 민주화 운동의 동역자 함석헌 님의 용천 땅으로, 그리고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백두산을 쳐다보며 두만강 물줄기를 타고 목사님의 그리시던 고향 땅 아오지로 확산되기를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