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마음의 스승 김재준 선생님 / 유재신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2-05 10:17
조회
209

마음의 스승 김재준 선생님


유재신 목사(서울동노회 원로목사)


내가 김재준 목사님을 만난 것은 1954년 한국신학대학을 입학하던 때였고 경동교회 주일학교 반사일을 하면서 예배에 참석해서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현재 시무하고 있는 동부교회 중고등부 지도선생으로 옮겼다.


입학해서 학년 대표가 되었기에 교수님 특히 (부)학장이셨던 김 목사님을 자주 뵈었고, 특히 2학년 때 문예출판위원장을 하면서 「코이노니아」 잡지 관계로 가끔 뵙게 되었다. 김재준 목사님은 “비교종교학” 과목을 가르치면서 유교에 관하여 강의 하셨는데 공자님의 가르침을 많이 말씀하셨다. 이제 돌아보면 내가 비교종교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게 된 것에는 김 목사님과의 관계에서 받은 영향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집에 가끔 찾아가면 김 목사님의 두 아들이 자기처럼 활동적이 아니어서 걱정인데 유군처럼 활동적이 되도록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시기도 하셨다.


김 목사님은 저의 아버지의 스승이시기도 하셨다. 저의 아버님이 간도 용정의 은진 중학교 학생때 김 목사님은 아버지의 선생님이셨다. 아버님은 개척교회를 세워서 많은 젊은이들을 전도했다. 김 목사님이 은진 중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셨으니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김 목사님이 성경을 가르치시고 우리 아버지가 젊었을 때 가르치던 곳인 용정 옆에 있는 연변대학에 제가 1986년과 87년에 초빙 교수로 가서 한국문화와 기독교에 대하여 가르쳤고, 제 딸 원경이가 영어 선생으로 일년 동안 가르쳤으므로 3대를 이은 전도의 고장이 된 것도 김 목사님과의 간접적인 인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서 깊은 용정의 은진 중학을 방문했을 때 학교는 없어지고 폐허된 학교 예배당 밖에 없었다.


신학교 때 학년 대표로서 김 목사님을 자주 방문하여 지시사항을 받았다. 목사님을 찾아 뵐 때마다 김 목사님은 항상 책을 읽고 계셨는데 심지어 식사 하시면서도 책을 읽고 계셨다. 잊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졸업식장에서의 말씀이다.


“여러분 대학을 졸업하는 것은 공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책을 읽으십시오. 교역자가 가난해서 책 살 돈이 없으면 며칠 굶어서라도 그 돈으로 책을 사서 읽어야 합니다. 읽을 뿐만 아니라 책을 몸에 지니고 다니십시오.”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는 이 말씀이 저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 후로 나는 필요한 책은 목사님 말씀처럼 굶어서라도 사서 읽는 습관을 갖게 되었고 책을 끼고 다니는 습관도 지니게 되었다. 이것은 나를 학자의 길로 가게 했고 영어와 한국어로 십여 권의 책을 남길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문동환 박사의 주선으로 미국 Hartford 신학대학원에 가게 된 1964년 초에 김 목사님을 방문하였다. “목사님, 저는 나이는 서른이 넘고 너무 뛰어 다니느라 어학도 준비되지 않았으며, 공부도 제대로 못해서 실력도 형편없습니다. 이런 저도 유학 가서 공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십니까?” 김 목사님은 한참 침묵하고 계시다가 “유 선생, 자네는 너무 많은 우물을 파서 물이 잘 나오지 않는거야. 우물을 한곳에 깊이 파야 물이 나오는 것이야. 열심히 공부만 하면 반드시 학위를 받으리라 믿네.”


우물을 많이 판다는 것은 이 일 저 일 너무 뛰어다니며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나를 꾸짖으시는 말씀이셨다. 자기도 신학이 개척기에 여러 과목을 가르쳐야 했음으로 한 분야를 깊이 파지 못했음을 후회하신다는 말씀을 함께 하시면서 말이다. 김 목사님의 ‘한 우물 파라’는 이 말씀이 나의 좌우명이 되어 미국 유학 중에는 공부 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어려운 생활 중에도 공부에 전념하려고 노력했다. 학위 마지막 때 교포들의 성화에 못 이겨 토론토 한인교회를 비상임으로 봉사하다가 공부를 끝내지 못할 뻔했는데 교회가 발전되어 자진 사인함으로써 공부를 끝내고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용기를 내어 사임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우물을 파라고 하셨던 김 목사님의 영향 때문이었다.


김 목사님이 일제시대 말에 선린형제단을 시작하셨고 1957년에 이상철 목사님과 같이 선린형제단 학생부를 조직하면서 김 목사님 앞에서 ‘그리스도와 나라 사랑’의 정신을 바탕으로 형제애를 갖고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정신으로 봉사한다는 내용의 형제단 규약을 서약했던 기억이 난다. 미사촌에서 김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선린형제단의 선배들과 학생들이 수련회를 갔던 기억이 난다. 김 목사님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셨다.


지금도 그 씨알은 후배들을 통하여 이어가고 있다. 선린형제단은 학생부까지 서로 이념이 다르더라도, 서로 다른 정당에서 일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이해관계와 사상을 넘어선 우정을 갖고 50여 년 전에 시작해서 30년이 넘는 동안 매해 모이는 단체는 한국에 그리 많지 않다. 선린형제단은 김 목사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교회와 나라를 위한 공동목표로 뭉쳐서 많은 공헌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한신대학을 입학해서 남한산성으로 학생 수련회를 떠날 때와 졸업 여행 때에 친히 동행해서 여주 세종대왕 능과 역사적 유서 깊은 수원을 같이 가시면서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그의 말씀 안에서 ‘역사와 나라 사랑’의 정신을 읽으면서 감명을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김 목사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많이 하시지 않으셨지만 마음으로 사랑하는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김 목사님은 신학교의 교육과 운영의 책임을 맡고 계시면서 경동교회를 봉사하고 계셨다. 이것은 또한 신학과 교회의 다리를 놓으시면서 신학자이면서 목회자로서의 삶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김 목사님은 내가 목회하면서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토론토에 오셔서 십년 가량 계셨다. 그때 사정으로 저의 교회에서 ‘말씀’을 증거 하도록 모시지 못했던 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린다. 김 목사님이 좋아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식혜였는데 우리 어머니가 만드신 식혜를 가져다 드리기도 했고 겨울에 정부 아파트에 계실 때 전기담요를 아무도 모르게 선물도 해 드렸다. 한번은 김 목사님이 긴 편지를 보내 오셨는데 격려하시는 말씀과 더불어 늙으니까 몸이 차가와져서 따뜻한 온돌 생각이 났는데 전기담요를 덮고 자니까 따뜻하고 참 좋다고 하시며 고맙다는 말씀이셨다. 후에 김 목사님이 쓰신 글에 토론토 생활 중에 있었던 이 일을 쓰신 것을 읽고 얼마나 정이 많으시고 제자들을 아끼는 ‘섬세하심’에 기독교 선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김 목사님에게서 감명 받은 면은 무엇보다도 ‘기독교 선비’같은 진실하신 삶의 모습이다. 김 목사님 같으신 분이 언제나 그 손에 책을 놓지 않는 그 성실한 모습을 가지고 해박한 한학의 배경을 그의 신학에 발전시키셨다면 국제 학자로서 크게 공헌하셨으리라 생각하면서 한국적 신학의 수립에도 크게 공헌하실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과도기의 한국신학을 개척하신 선구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한 우물을 꾸준히 팔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초기의 한국의 신학자 환경이 원망스러워지는 것이다.


김 목사님이 신학의 선구자로서 ‘학문의 자유’의 길을 여신 분으로서 김 목사님의 삶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조선신학교로 시작한 한신대학이 성서의 자기 이해를 통한 서구 신학의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인의 얼과 문화를 이어가서 국제적인 신학자를 양성하고 한국신학을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셨더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이제 우리들이 할 일은 목사님이 공헌에 대한 단순한 ‘회고’에 머무르지 말고 이제 우리의 후배들을 21세기에 김 목사님 같은 훌륭한 신학자와 목회자로 양성하는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갖고 도전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몫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