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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長空”의 눈 / 배성산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2-05 10:03
조회
1055

“長空”의 눈

배성산 목사(서울노회 원로목사)

장공에게서 배운 한 사람으로 한국신학대학 예배실, 강의실, 화계사의 산책길에서 나누어 주신 대화, 나의 결혼에 대하여 친히 결혼축하 휘필(揮筆)을 보내 주신 일, 졸업여행을 통하여 교감을 함께 했던 많은 낙수(落穗)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스승을 회유(誨諭)함으로 안중인(眼中人)이 되어 그의 곁에서 본 스승은 조용하면서도 강단(剛斷)있게 보이고 만나보면 온화하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하여 대담, 고결, 염치, 용감, 고매(高邁)하신 분으로 그를 존경하게 된다.

그와 함께 한 분들 후학들은 그의 설교나 강의는 항상 그의 안각(眼角)이 저 하늘 위를 향하여 설교나 강의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후일 모든 이들은 이 모습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만 스승의 아호(雅號) ‘장공(長空)’을 뒷받침하는 그의 사상과 신학과 신앙관, 삶의 철학이 아호로서 은유적(隱喩的) 의미를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본다. 특히 개인적으로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대학원 현관 앞에서 스승과 함께 사진 촬영을 했는데 사진을 보니 스승의 안각은 저 하늘을 향하여 그대로 찍혀 있는 사진을 간직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한다.

김정준 박사는 장공을 일컬어 “그의 생활과 사상이 높고 넓고 푸르고 긴 창공 같아 사람들이 그를 장공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이 “장공(長空)”의 아호는 자의타의(自意他意)가 함께 깃들어 있다고 본다. ‘김재준 전집’의 편집을 맡은 정웅섭 교수는 편집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장공의 “읽게 만들고, 생각하게 하고, 기도하도록 이끄는” 글들 앞에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스승의 안각(眼角)을 통하여 여러 가지를 배우게 한다. 청운의 꿈을 꾸며 세상을 경륜하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 우선해서 가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라 생각한다. 세상을 보는 눈이 없이 세상에 뜻을 펼치고자 한다면 그것은 눈먼 새가 창공을 날으며 대륙을 건너려고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세상을 위해서라면 먼저 세상 속에 깃들여 있는 하늘의 이치와 의미를 알아야 한다. 세상과 하늘을 하나로 보는 눈을 가질 때 그를 비로소 세상에 눈이 뜬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세상의 많은 사회 현상들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통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보일 때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서로 조화하며 작용하고 있고 삶과 죽음의 교류 속에서 영원한 순환을 거듭하며 의미의 계속성을 이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정 우리에게 많은 뜻을 남기는 사람들은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세상을 바로 보는 자들인 것이다. 관(觀)은 ‘체계화’된 나름대로의 견해를 뜻함인데 관점(觀點)에 따라 그 사람이 보는 각도나 입장, 견지(見地)가 생긴다. 그러므로 보는 것은 기초이다.

1946년 5월호 “새사람”지의 “고독(孤獨)”에서 “장공(長空)”의 아호(雅號)의 뜻을 깨우치게 된다.

“그리스도는 고독하였다. 시대에 앞서 높은 곳 보는 자는 언제나 고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고독하시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도 고독하다.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까닭이 아니라 시대에 앞선 까닭이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부른 자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고 그리스도는 혼자 말했다. 날마다 5, 6천명이 따라다녔지만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3년을 함께 숙식하였지만 그의 마음 깊이를 살핀 제자는 없었다. 그 중 한사람은 은 30에 그를 팔았으니 말해 무엇하랴 ‘너희들도 다 가려느냐?’ 끝끝내 그는 단 혼자 능욕(凌辱)과 인고(忍苦)의 해골 언덕 위 속죄 祭壇 十字架에 그 몸을 희생으로 드리었다. 단 혼자다. 불타는 입술에 물 한 방울을 축여주는 이 없었다. 고독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이 무지한 죄인들을 용서하십사 하고 빌었다.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 그 은혜의 넓이 대해(大海)랄까 장공(長空)이랄까 촌지척심(寸志尸心)을 헤아릴 바 아니다. 그는 고독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찬탄(讚嘆)하는 것은 다만 그가 고독하였다는 그것 때문은 아니다. 그는 고독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독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고독이었다는 데에 온갖 열쇠가 놓여있다. 세상에서 온전히 버림받는 순간 고요히 혼자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그의 심경에 들어오는 만상(萬相)은 연민(憐憫)의 강보(襁褓)에 싸인 한 철없는 어린 아기였던 것이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 철리(哲理)적인 고독이었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고독은 하나님 아들로서의 종교적인 고독이다. 호산나의 환호, 골고다의 능욕, 무엇이 능히 이 흥천독립(興天獨立)의 고독을 흔들리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안심하라’, ‘아, 축복 받은 고독이어!’ 하고 성 프란체스코는 눈물 흘렸다.”

1946년 5월의 「새사람」지에서 장공(長空)의 안각(眼角)에 초점을 맞춘다.

1947년 4월 장로교 총회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이렇게 술회하였다.

“그 무한대의 ‘아가페’ 하늘처럼 넓고 푸른 보자기 정(淨)하고 부정(不淨)한 금수(禽獸) 곤충(昆蟲)이 다같이 싸여 하늘로서 내려온 베드로의 환상! 이 심정이 있으면 내 마음은 하늘이다. 이 사랑이 없으면 낙원도 황천(黃泉)이다. 이 심정을 잃으면 교리도 철학도 발부리에 널리는 ‘스텀불링 블록’이다.”

예언자는 ‘보는’ 사람이다. 시대를 잘 보는 시대의 사람이다. 역사의 주류와 그 본질의 의의를 명철하게 파악하고 지금 오늘의 역사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응시하고 그 시대의 정치 경제 도덕 종교 등을 가장 깊은 데서 뚫어지게 본다. 동시에 현실을 결코 도피하지 않고 현실을 지도하는 그 시대의 책임자이다.

예언자는 미래를 본다. 미래의 비전을 보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현실에 안위하고 있을 때 그것을 책망하고 새 역사 준비를 일깨워준다. 그러기에 예언자는 코앞에 보이는 것만을 우선하지 않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아는 자이다. 그의 신앙은 현실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과 그 실천적 표현을 동시에 하신 분이시다. 장공은 한 생애를 1세기로 사신 분으로서 세계 제1차 대전을 겪은 후 근대 물질 문명의 무한한 질서에 대한 낙관주의의 퇴조와 인간성의 원죄적 자각과 우주와 자연과 인간을 보는 새로운 신학이 대두하게 하신 분이시다.

‘장공의 눈’은 20세기의 신앙의 바로미터(Barometer)가 된다. 날씨를 예보하는 기상대는 날마다 일기예보를 한다. 무슨 점패를 흔들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인 정보를 수집하여 얻은 자료를 가지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예보를 하려면 세계의 여러 곳에서 생겨나는 기상의 상황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파악해야 하며 그러려면 현대적인 기계시설과 학문적인 분석 능력과 끊임없는 연구 노력이 동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기상대의 일기예보가 매우 형편없어서 맞을 때보다는 맞지 않는 수가 더 많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 많이 있었다. 폭우가 막 쏟아지는데 그 때 가서야 호우주의보가 내려진다든지 폭풍이 막 지붕을 날리고 거목을 쓰러뜨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폭풍경보를 내리는 경우가 항상 있곤 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인공위성에 의한 기상관측 등이 매우 유효하여 비교적 상당한 수준의 예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일기예보를 하는 이유는 앞으로 생겨날 기상 변화에 올바르게 대비함으로써 불의의 인명 재산 등의 손실이나 재화를 미연에 방지하고 좀더 안전하고 실효 있는 생활을 영위하려는데 있다 하겠다. 옛날 사람들은 오랜 경험을 통하여 때의 표상을 이해하고 미리미리 일기의 변화를 볼 줄 알았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알았다.

일기예보는 기상대의 경우이거나 상식적인 이해의 경우이거나 간에 장차 생겨날 날씨를 미리미리 알아 차려서 그것에 알맞게 대비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예민한 통찰력과 기민한 판단력, 감득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역사의 앞날과 민족사회의 미래에 대한 그러한 예민한 통찰력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으며 또 어느 사회의 지도자이든 간에 지도자의 자질이란 그처럼 예민한 감득력(感得力)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림으로 민중을 바로 인도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지도자가 우매하여 내일의 문제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때에 생겨나는 결과가 얼마나 큰 불행과 비극의 원인이 되었는가는 지나온 역사를 통하여 잘 아는 사실들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너희가 일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보여줄 징조가 있다면 요나의 징조 밖에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나의 징조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나라는 한 예언자가 고기 뱃속에 삼켜져 있다가 3일 만에 살아 나왔다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의를 위해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장공은 「제3일」지를 발간했다. 장공은 「제3일」지에 실린 “제3일의 논리와 역사의 내일”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밝힌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내 길을 간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대로 가지 않는다고 그를 잡았다. 그래서 첫날에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다음 날에는 무덤 속에 가두고 인봉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기 악의 한계점에서 ‘됐다’ 하고 개가를 부를 때 하나님은 ‘아니다’ 하고 무덤을 헤친다. 예수에게는 이 ‘제3일’이 있었다. 그의 생명은 다시 살아 무덤을 헤치고 영원에 작열한다.

‘제3일’, 그것은 오늘의 역사에서 의인이 가진 특권 - 역사의 희망은 이 ‘제3일’에서 동튼다. 이날이 없이 기독교는 없다. 이 날이 없이 새 역사도 없다. …”

“예수의 부활은 역사의 내일을 위한 십자가의 행진에서 그 현실적인 의미가 체득된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진실한 ‘메시지’이며 그것이 ‘제3일’의 논리이기도 하다. 서구와 북미에서도 이것을 깨닫고 외치는 예언자들이 적지 않다. ‘나라와 의’를 위하여 몸으로 역사에 심는 하나 하나의 밀알이 ‘사회화한 교회’의 오늘의 십자가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마치 예수의 부활한 몸 변화산상에서의 몸처럼 바탕에서 변혁된 새 역사가 탄생할 것이다.”

그의 글을 통해 ‘제3일’을 말씀하셨던 것은 결코 우연한 말씀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다. 이것의 의미는 인간의 존엄한 삶 자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신 일 그리고 그의 희생은 패배나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의 연결로서의 부활이요, 영생이라는 점을 보여주신 말씀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노예화하고 사회를 권력의 시녀화 하는 낡은 체제에 대한 예수의 도전이요 개혁운동이었듯이 그의 「제3일」지의 내용과 경과는 고난의 역정 바로 그것이 폐간에 이르기까지 그 경로를 알기에 충분하다.

구약에서 예언자는 ‘로에’라고 한다. ‘보는 사람’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지자, 즉 먼저 아는 사람 또는 선견자, 먼저 보는 사람으로 번역한다. 신앙인이란 것은 보는 사람, 꿈 있는 사람, 늙지 않는 희망의 사람을 말한다. 과학자는 현재 주어진 사실을 탐구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 철학자는 그것이 왜 그런가, 그것과 이것의 관계는 어떠한가, 여기 모든 것에 보편원리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등을 사색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창조와 종말을 하나님 안에서 함께 단번에 보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신앙인은 창조와 종말에 뻗친 끝없는 공간과 무궁한 시간의 길이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를 보는 눈인 것이다. 보통사람은 이 세상 것만 본다. 굳어 빠진 사실이라는 우상에게 너무 과히 사로잡혀 있다. 사실이란 이미 되어있는 객관이다. 그러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기정사실에 그 의도를 국한시키지 않으신다. 오히려 없는데서 있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창조의 기백과 능력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을 극복하거나 현실에 주저하지 않는다. 더 나은 미래를 보며 그 비전을 이룩하려고 싸우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잉태한 인간은 아무리 현실이 막히고 답답하고 어둡고 좁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뚫고 보는 불멸의 눈으로 비전에 초점을 맞춘다. 눈은 몸의 빛이니 네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인데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고 한다. 눈이 어두워 평생 암흑 속을 더듬어야 하는 삶을 생각해 보면서 빛을 보는 눈은 하나님의 은총임을 깨닫게 한다.

「제3일」지의 성구 수상으로 “신앙생활에서 생활신앙으로”라는 신앙관, 장공의 신앙과 신학을 챙겨본다.

“우리가 신앙한다 할 때 신앙이 우리생활의 한 부분인 것 같이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많은 사회생활을 총망라해서 하는 말이다. 생활로 믿는다. 믿음을 생활화한다 하는 말을 삶의 현장에 옮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여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생활 그것은 행하는 믿음을 일컬음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같이 말씀이 생활로 되고 역사는 하나님의 테이블이기에 영원히 살아있는 진실의 증거이다. 생활신앙에로의 개혁은 시급히 요청된다.”

“예수님 말씀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여기서 ‘행한다’는 말은 생활한다는 뜻이다. 실생활 내용으로 화(化)하지 않는 신앙은 밖에서 겉도는 바람과 같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 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과 같다. 장마나 태풍이 닥쳐도 끄떡없다. 그것은 그 기초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장공’은 생활신앙을 늘 강조해 왔고 생활 신학에 대하여서도 늘 피력해왔다. ‘주의 기도문’을 생활신학의 원점으로 설정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생활은 어떤 기강이 확립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학문적으로 정리하면 신학이 된다고 했다. 기도는 단순한 간구나 욕구만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조건에 대한 나의 응답이라고 그의 입지(立志)를 밝힌다. 사실 ‘주의 기도문’은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삶을 위주로 하는 갈망이나 기원이 아니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나라의 실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서 인간의 삶의 보람과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우리의 기도는 너무도 개인적이다. 공동 목표가 무엇이며 그 공동체 의식 속에 각 개인에게 부과된 책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모래알처럼 분산된 개인주의적인 의식구조로서는 진정한 신앙인의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개인이면서도 하나의 큰 목적인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뜻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부르심을 받은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의 우리의 현실은 정확한 역사의 일기예보를 기다리고 있다. 시대의 징조가 올바르기를 갈망한다. 절차와 방향이 불투명할수록 그 요구는 더 절실하다. 낡은 질서가 파괴되고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 때 개혁이란 당위 앞에 커다란 흠집이 나오기 마련이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밝음과 어두움, 참과 거짓, 의와 불의가 모두 뒤섞여 있어서 혼란이 야기된다. 이러한 사회현실을 보면서 역시 진리의 밝은 빛을 따라 창공을 향하여 보던 그 안각 앞에 고개를 숙인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이 찬송을 부르며 저 하늘 향해 지평선 너머 공간을 길게 펼쳐보는 ‘장공의 눈’은 나의 목회관을 세워 주었다. 나의 목회는 ‘내가 살아온 만큼 보여주는 인간의 삶’이 곧 목회임을 천명하며 우리 집의 가훈(家訓)으로 삼은 “믿음 소망 사랑”을 목회관, 그리고 ‘信之 民衆化, 望之 歷史化, 愛之 人間化’를 생활지침으로 삼고 ‘장공의 눈’이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