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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큰 하늘, 큰 보자기 같은 민족의 스승 / 조형균 동문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1-30 18:42
조회
1036

큰 하늘, 큰 보자기 같은 민족의 스승

조형균(제14회 졸업동문)

일편생 한 님 섬긴 길

오늘의 영광, 창공에 두루 비친 하늘의 영광
일평생 한 님 섬긴 길 더욱 빛나
영원한 주 앞에서 상 더욱 크리
축하, 감사, 아멘

1958년 가을, 이미 선생님 슬하를 떠난 지 3년이 넘은 때 였지만, 장공 선생님께서 캐나다 연합교회의 서두름으로 British Columbia 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받으시게 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나는 나 자신의 일같이 기쁘고 감격하였다. 얼른 서투른 즉흥시 한 수를 적어 내 아버님과의 연명으로 부랴부랴 로마자 표기의 우리말 전보를 그 학교에 친 일이 있었다. “창공에 두루 비친”은 사실은 로마자 표기로 CHANGGONG인데 “장공”(長空)으로 읽혀지므로 창공과 장공의 2중의 뜻을 담아서 하노라는 것이었다. 만인 주시하에 단상에 서 계실 말 수 조용하고 자그마한 몸집의 그 어른, 그러나 거기에는 마치 요단강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처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 하는 하늘 가납(嘉納)의 음성이 빛으로 비추어 들려오는 장면으로 나의 마음에는 비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선생님을 무어라고 불러드릴까? 선생님은 그저 크고 넓은 긴 하늘, 긴 비움(空)이시지, 그리고 다음으로는 김재준 목사님이시지, 박사, 학장, 명예학장 등등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시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차고 넘쳐서 안맞는다는 말이지 힘에 부쳐 억지춘향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다. 하늘에다 어쩐 모자를 씌울까?

선생님은 1956년쯤엔가 “탈모”(脫帽)라는 짧은 글을 쓰신 일이 있으시지만 그야말로 훨훨 모자 벗고 일생을 자유롭게 탈속(脫俗)하고 사신 분이요 씌울 모자가 맞지 않으신 분이셨다. 고당 선생님은 그저 고당이요, 남강 선생은 그저 남강이요, 도산, 월남이 다 그런 어른들 아니시던가? 그래서 위대하질 않으셨나? 그러므로 그 선생님께 박사 호칭을 굳이 드려야 한다면 그 인격과 생애 자체에 드리는 명예 박사야말로 어울리는 것이며, 그나마 이 세상 사람들의 법도라니 마지못해 그리 응하셨을 것이다.

6ㆍ25 사변 전의 일이었다. 언젠가 주일 예배 때 “나는 이렇게 믿으므로 이렇게 산다 하는 생활기록을 남겨야 할 게 아닌가!”고 말씀하신 일이 있으시다. 선생님은 바로 그렇게 사신 분이셨다. 나는 학교에서나 사회에 나와서나 한 번도 선생님께 목사님이라는 칭호 이외의 것으로 부르거나 써보지 못하고 지냈다.

새 사람, 새 나라

내가 장공 선생님의 모습을 처음 뵈온 것은 1947년 봄쯤 되었을까? 영락교회(당시에는 아마 아직 베다니 교회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 같다)에서 시내 기독학생들을 위한 무슨 기독교 강좌 같은 것을 한다고 광고를 접해서였다. 그때 한 3일 동안 했던 것 같은데 제일 알맹이가 있다고 할까, 지적 욕구를 채워주는 시간은 김재준 목사님의 성경을 중심으로 한 신학강좌였다. 그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종말성을 어떻게 연결 조화시킬거냐 하는 문제를 다루어 주신 것 같다. 나로서는 이런 생경(生硬)한 말씀을 접하기는 처음이어서 난해하였고 열심히 적느라고 애썼으나 많이 빠뜨려 집에 와서 다시 보아도 잘 알 수 없었다. 여하튼 적지 않은 지적인 자극이었다. 그때만 해도 난방이 변변치 못한 때라 외투에 흰 머플러를 두르신 것과 가끔 푸룩 푸룩 하시며 말씀 도중에 독특한 트림 같은 기침과 입맛 다시는 듯한 소리를 내시는 버릇이 인상적이었다.

그 후 목사님과 직접 대면하여 인사드리기는 1949년 여름 전국 대학 기독학생 여름 수양회를 수원 농대 기숙사를 빌려서 하게 되었는데 그리고 가는 기차 속에서였다. “역사를 그리스도에게!”라는 주제부터가 당시의 우리나라 기독교로서는 획기적인 충격적인 모임이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 기독교는 등불에 기름 준비를 못한 처녀 모양으로 허둥대며, 고작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당시 3천만 인구 중 1할인 3백만 인구를 예수 믿게 할 수 있다면 대번에 지상천국이 오리라는 식의 것이었으며, 금강산에서 오래 기도생활을 하신 감리교의 박재봉 목사님을 주축으로 하는 부흥회 운동이 있었다. 장․감․성결교를 막론하고 직접 간접으로 그러한 영향과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남대문교회가 그랬다면 당시 감리교 본산 격인 변홍규 감독 시무의 동대문교회는 매 예배 때마다 폐회 직전에 기립하여 큰 목소리로 부른 노래가 있었다. 변 감독이 지으신 노래로 “삼천리 강산이 제단되고, 삼천만 동포가 신도 되고, 일동에 일 교회 설립하고, 온 세계가 우리 교구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오늘을 보자. 일동에 일 교회 커녕은 심하게는 일동의 수십 교회가 심하게는 일동에 수십 교회가 되고 신자수가 전 인구의 10%가 넘어 25%로 불어난 오늘 그것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악과 불의와 사이비가 극성해 간다. 오늘의 우리 상황을 돌아볼 때, 그 당시에는 오늘로 이어지는 한결같은 물량주의적 지도이념의 천박성과 허구성은 여실히 그 본체가 드러난 셈이다.

부흥회적 분위기가 오랫동안 식상해서 고민하고 있던 나로서, 하나의 청량제 소금이 있었다면 해방 직후 1945년 가을에 국내 최초의 기독학생 모임을 교내에 조직하고, 또 이듬해 정월에 최초의 교내 기독교 신문(주보)을 냈던 인연으로 지속해 온 기독학생 운동이 그 하나였고, 또 하나 돌파구가 있었다면 앞서 말한 여름 수양회를 계기로 있게 된 경동교회와의 만남이었다.

나에게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가 왔다. 그것은 당시 기독교계가 가졌던 두 가지 데모사건이었다. 금주운동을 벌이기 위한 시가행진에는 나도 열심히 당시의 가족 교회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시내를 누볐다. 노방전도도 북을 들고 나가 열심히 하였다. 그런데 조용한 경동교회 강단에서는 “술을 덮어놓고 마시지 말라 해서 안 마시나? 현대인이 왜 술을 마시는지 그 컬컬한 심정을 깊은 데서부터 채워야지”하시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대중요법보다는 원인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경동에서는 그 행진에 나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금 하나를 확실히 긋게 하는 일이 생겼다. 50년 봄인가 그 전해인가, 서울 장안의 모든 교회가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운동장에 모여 “미국은 우리에게 무기를 달라!”는 데모를 벌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유독 경동교회만이 거기에 냉정하였다. 그것을 본 내 마음은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장․감 같은 건 처음부터 문제가 아니다. 교회를 설립하고 이름을 손수 지은 수석장로의 외아들의 출가였다. 그리고 누이동생 둘이 또 빠져 나왔다.

목사님 설교는 조용조용히 그러나 오래 남는 촌철(寸鐵)식의 짜릿한 것이 가끔 튀어나오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아예 처음부터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말씀과 대결하는 태도였다. 조용히 집에 돌아와서 한 마디 한 마디를 다시 따져보기 위함이다. 출가승(?)으로서는 범연히 넘길 수 없는 말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었다. 당신 산상수훈을 본문으로 한 여러 차례의 연속설교 필기를 지금도 가지고 있다.

여름 수양회가 끝난 다음 “신인회”라는 것이 조직되어 가고 있었다. 수양회의 후견인격으로 지켜보시던 그분은 “새사람” 문제를 특별히 어느 주일에 취급하시면서 새 사람 되는 문제를 소홀히 넘어가려는 위험성을 경고하시기를 잊지 않으신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그 수양회에 마련된 “투서함”에 “이 모임이 이제부터 새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까 아니면 새사람 다 된 사람들을 모아놓고 어떤 사회건설의 방법론을 가르치자는 모임입니까?”하고 써넣었던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대학 졸업과 함께 6․25가 나고 이듬해 가을 나는 부산 남부민동 언덕 초라한 천막 몇 개가 바람에 펄럭이는 곳을 찾아들게 되었다. 입학이 한 달 남짓이나 다 끝난 때였는데 나는 김 목사님을 찾았다. 신학교엘 가겠노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였다. 다만 미소로 잠잠히 듣고 계실 뿐 반갑다거나 잘했다거나 환영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일 다시 와 보라 신다. 이것이 선생님의 면목이구나 싶었다. 다리 밑에 일부러 신발을 세 번이나 떨어뜨리는 식이라고나 할까?

다음날 다시 가니 담당 교수님을 만나라고 하시면서 그 교수님을 입학원서와 별도로 신앙고백서를 써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입학 시기가 지났으니 교수님 역시 찜찜한 표정이었다. 서류를 제출하니 좀 있다가 장공 선생님한테서 서류가 되돌아 나왔다. 이 입학원서를 얼핏 보니 난 외에 “I know him well, He may be admitted."라고 적혀 있었던가 한다.

큰 하늘, 큰 보자기 같으신 분

선생님의 설교나 강의는 누구나 다 그렇게 인정하는 바이지만 요란스럽고 수다스럽지 않으셨다. 노트에 적으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더 넣을 것도 뺄 것도 없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리고 항상 새 말이었다. 언젠가 왜정 때 선생님께 배운 분이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3년 동안 한 번도 같은 말씀을 다시 하시는 걸 못 보았다고. 사실 꽤 오랜 세월을 목사님을 접하는 동안에 한 번도 같은 말을 또 하시는 것을 못 들었다. 고요히 넘치는 샘물처럼 언제나 청신한 새 말씀의 영양소(營養素)를 먹여 주시곤 하셨다.

한 번은 어느 재주 있는 급우가 각 교수님들의 지성과 강의 특징을 한마디로서 칠판 위에 적는 것이었다. 정통학파, 사변학파, 요령학파, 통속학파 하는 식으로…, “김재준 목사님은?”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칠판 위에는 “권위학파”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렇지!” 하고 모두들 탄성을 울렸다. 장공 선생님의 강의는 그야말로 조용히 그러나 권위 있는 자와 같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선생님께 배운 유일한 성경 주석은 졸업반 때 배운 요한복음이었다. 영문으로 된 주석서 한 권을 가지고 들어오시곤 하셨는데 어쩌다 책에 눈이 가시지만 읽는 것은 옆으로가 아니라 모로 읽으시는 것 같았다. 죽 훑으시고는 연방 책장을 넘기신다.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책의 말이 아니라 장공의 가슴속에서 나오는 그 자신의 말이었다. 무르익은 강의였다.

선생님은 글이나 설교나 같은 말이라도 앞뒤 조판(組版)을 잘하신다. 그래서 눈에 번쩍 띄도록 확 들어오게 하신다. 화룡점정(畵龍點睛)식의 재주라고 할까? 뿐만 아니다. 선생님의 글씨 솜씨 역시 당대의 명필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것을 선하게만 쓰셨다. 6․25 환도 후 포탄으로 한 귀퉁이가 날아갔던 후람한 교회 건물을 다시 짓게 되었는데, 교회 머릿돌을 쓰시면서 거기에 집어넣을 글과 사람들 이름을 교회 아래층 방에 단정히 앉으셔서 붓글씨로 쓰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님의 필체는 자유활달, 재기가 넘치면서도 장부(丈夫)의 위용이 있으시다.

언젠가 선생님의 짧은 원고 글씨를 본 일이 있다. 휙휙 일부러 갈겨쓰셨는데 그 체가 고르고 학이 날 듯 독특한 운치가 있었다. 선생님이 원고를 쓰시는 솜씨는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번역의 경우 저녁진지를 드신 후에 원고지를 방바닥에 놓고 슬슬 그려서 50장을 쓰신다는 말을 누군가에게서 들은 일이 잇다. 그렇게 보면 아마 하루에 150장은 쓰시는 분량일까? 선생님 손은 체구에 비해서 실하고 크신 편이지만 그 바쁘신 학교와 목회생활에 어느 틈에 40여권 역․저서의 500여편의 논문․논설을 잡지에 쓰셨다는 것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까지 붓을 놓지 않으셨다는 것은 참으로 초인(超人)에 가까운 재능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분은 그것을 땅에 묻지 않으시고 계속 이를 남겨 가신 것이다.

長空은 큰 하늘, 큰 보자기, 선생님은 바로 그러신 분이셨다. 언젠가 나는 여인(旅人)이란 필명으로 “졸업년의 일기”라 하여 교내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었다. “한신, 위대한 종합성이 깃들인 곳, 너는 세기의 University여!” 이는 장공 계신 한신과 그 미래를 내다 보고하는 말이었다.

수유리로 가신 후 선생님은 등산하는 이야기를 적으시면서 먼 산꼭대기와 발 밑의 골짜기 길, 예언자와 학자가 사이좋게 어울리는 곳을 학문의 이상향으로 하고 계셨다. 장공은 참으로 크신 분이셨다.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

이제는 이 글도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부터 쓰려는 이 이야기는 나로서는 옷깃을 여미고 눈물 없이는 쓰지 못하는 대목이다. 독자로서의 장공 김재준의 진면목! 민족의 스승!

때는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25, 1차 서울 탈환이 끝난 9․28 후의 일이었다. 처음에 서울에 남아 있다가 못 견디어 시골로 피난 갔다 온 나는 수복 후 허용된 첫 예배에 곧장 교회로 달려가게 되었다. 거기는 비극의 검은 사자가 할퀴고 지나간 무서운 침묵이 내리 덮고 있었다. 원래가 의자 없이 마룻바닥에 앉는, 다 앉으면 100명이나 앉을까 하는 작은 건물이었지만 그 건물 현관 쪽 바른편 모퉁이가 박격포탄에 맞아서 날아가 없어져 버렸다. 깨지고 부서진 돌․벽돌․시멘트․흙 따위는 그런데 벌써 한 모퉁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차곡 차곡 정성 들여 쌓아올려 있고 말끔히 쓸고 물이 뿌려져 있었다. 다 모인 교우는 남녀 합해야 약 20명이나 됐을까? 강원용 목사님의 둘째 계씨 강이용(姜利龍, 당시 신학생)님이 그 파편에 작고하고 없었다. 쓸쓸함과 침통함이 감돌았다.

원래가 조용하신 장공의 목소리가 열리고 고요히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제 순서에 따라 목자로서의 목회기도 시간이 왔다. 교탁 설교대 위에 두 손을 모으신 목사님의 음성이 열렸다. 그런데 그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 북에서 온 젊은이나 남쪽의 젊은이들이나 다 똑같이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나라를 사랑하는 길인 줄 알고 저들의 고귀한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긍휼히 보시사 저들을 용서하시고 그 영혼을 거두어 주십소사. 그리고 저들의 나라사랑의 소원을 들어 주십소사…” 하시는 것이 아닌가.

거기 모인 20여명 남짓한 교우들이 제각기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 기도 소리를 들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로서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는, 참 목자의 눈물겨운 “증보의 기도”의 귀감으로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리라. 당시의 철없던 주책없는 어용적 기독교의 분위기 속에서 이런 참 목자의 굳굳한 민족적 속량의 기도가 몇 군데에서 하늘로 올려졌을까? 당시 몇 주일 동안 예배는 숙연하였고, 장공의 음성과 설교 내용은 비장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날의 설교 말씀은 그 목회기도의 감격 탓인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음 주일쯤의 설교는, 전쟁에 희생된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세속에 물들지 말고 끝내 믿음으로 수절하여 이 고난의 역사를 이겨나가기를 권면하는 내용이었는데, 어쩐지 그것만이 내 귀에는 지금도 들리는 듯 남아 있다.

돌아가시기 불과 얼마 전, 수유리 댁으로 마지막 찾아뵈온 나는 그때 일을 말씀드리면서 노사도께 감사와 위안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을, 이제는 다시 못 뵙는 그 스승께 대한 나 자신의 작은 보답으로 자위하고 있다.

김재준, 그분은 나에게 “선한 목자” 이 한마디 영상으로 꽉 차 있다. 어쩌다 드리는 성탄절 카드나 편지에는 반드시 정성스런 답장을 보내 주신 그 어른, 성탄절 카드도 상업화, 계급화된 이 세대에, 학교 강의 이상으로 교회 설교에 최대의 정성을 쏟으시던 목자. 언젠가 목사님은 피난교회 설교에서 “어떤 이가 얼마나 동그라미 그리기를 열심히 했던지 나중에는 완전히 진원(眞圓)을 그리게 되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목사님 일생이 바로 그런 동그라미를 그리셨는데!

목사님! 주례를 해주신 고마움을 인사드리려 찾아뵙고 기념첩에 서명해 주시기를 청하니 즉석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뒤집어 잡으시고는 “鳳飛千仞 飢不?粟”라고 써 주셨지요. 그 글씨가 아직도 나를 듯 합니다. 그리고 졸업식에 답사를 읽고 나오는 저의 손을 유달리 힘주어 꽉 쥐셨지요. 이 못난 저는 아직도 분명 그 손의 힘과 체온을 느끼고 있는데도 아직 천길 높이 하늘을 못 나르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