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나는 오늘도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고 산다 / 이춘우 장로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1-27 15:38
조회
2191

나는 오늘도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고 산다

이춘우 (3회동문, 송탄중부교회 원로장로)

1) 나와 장공의 첫 만남

나는 1941년에 조선신학원에 입학해서 1943년 12월3일에 제3회로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혁신교단’ 사건으로 감리교 신학교와 합동 수업도 했었고, 장공 선생님의 용단으로 다시 조선신학원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꽤 복잡하고 힘든 학교생활을 한 셈이다. 1941년 3월 나는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 1층에 자리잡고 있던 학교로 입학원서를 받으러 찾아갔다. 사무실에 들어가 입학원서를 달라고 하니 국방복을 입고 머리가 짧은 약간 촌스러워 보이는 분이 입학원서를 내주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장공 선생님이셨다. 이것이 나와 선생님의 첫 만남이었다.

4월 초 입학을 하고 보니 나이 많은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윤인구 목사님이 학교 원장이시고 여러 중진 목사님들이 강사로 나오셨다. 나는 경기도 도농리에서 기차와 전차를 이용해서 통학을 했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할 수는 없는데, 어느 날 학교에 가보니 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우리 장로교가 없어지고 혁신교단으로 일본 기독교단의 일부가 되면서 신학교도 통합된다고 했다. 얼마를 지내자 그 이야기대로 교단 명칭도 바뀌고 신학교도 서대문 냉천동에 있던 감리교 신학교와 통합되고 말았다. 우리는 감리교 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았다. 날로 어려워지는 상황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감리교 학생들과 사귈 수 있었던 것은 기쁨이었다.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은 박설봉, 김창희, 고영춘, 김윤수, 김광덕, 조병직 등이다.

학교는 통합된 지 몇 달 안 가서 다시 분리되었다. 이번에는 학교 장소가 정동 일본교회로 정해졌다. 당초부터 장공 선생님은 통합을 바라지 않고 계셨는데, 좀 지내다 보니 신앙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소위 혁신교단에서 탈퇴해 버리신 것이다. 선생님은 전부터 조선식학원 교수로 계시던 일본인 목사 미야우찌 아끼라라는 선생님과 함께 손을 잡고 우리를 이끌고 정동 일본인 교회로 이사를 하신 것이다. 학교를 새로 시작하면서 교수진이 보강되었다. 정동교회의 무라기시 목사, 약초교회(초동교회의 전신)의 야마구찌 목사, 전성천 목사, 유호준 목사 등이 강사로 오시게 되었다. 친일적인 교단으로부터 탈퇴하여 만든 신학교에 일본인 목사들이 적극 협력하여 가담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그해 여름에 나는 선생님들을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이 있다. 시골이니 야외로 소풍 나가시는 기분으로 오시도록 부탁드렸다. 장공 선생님, 미야우찌 목사, 전성천 목사, 유호준 목사, 무라기시 목사, 야마구찌 목사님이 모두 오셔서 하루를 지냈다. 그 때는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라 손님 대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대접을 변변히 하지 못했는데도 선생님들은 매우 즐거워 하셨다.

소위 ‘대동아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인들은 우리를 몹시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당시 선생님은 뚝섬(현 성수동)에 살고 계셨다. 선생님은 “아무래도 소개(疏開)를 해야 하겠는데, 우리가 이군 집에 가 있을 수 있겠는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과 상의를 하여 허락을 얻어 도농리(현 미금시 지금동)에 있는 우리 집으로 모셨다. 선생님 가족은 내외분과 따님 3명, 아드님 3명을 합쳐 모두 8식구였는데, 우리 집에서 지내는 동안 내외분은 물론 자녀들까지도 그처럼 조용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는 전쟁 중이고 공출이 심할 때라 면직원과 순사들이 종종 떼지어 몰려와서 식량을 빼앗아 가느라 온 집을 뒤지고 땅을 찔러 보다가 식량 감춘 것이 있으면 빼앗아 가던 때였다. 우리 집은 제법 부농이고 넓은 땅을 경작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공출로 빼앗겨 식량 확보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여러 곳에 식량을 감추고 심지어는 마을 건너 편 산에까지 가져다 묻어 두고는 밤마다 조금씩 가져다 먹으면서 두 가족은 굶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이웃에 집이 나는 것이 있어 이 집을 사셔서 해방될 때까지 사셨다. 방이 셋이고 마루와 부엌이 갖추어져 있어 큰 불편 없이 사실만 했다. 나는 저녁마다 목사님 댁에 들리는 것이 일과였다. 선생님은 도농에 사시는 동안 잔치를 두 차례 치르다. 한번은 조카인 의사 하용 씨의 결혼식이었다. 도농교회(당시 지사리 교회)에서 예식을 거행하고 피로연은 집에서 아주 조촐하게 치루었다. 만주에서 신영희씨가 찾아오자 전부터 혼담이 있었던 모양으로 부랴부랴 예식을 했었다. 역시 지사리 교회에서 예식을 거행하고 목사님 집에서 피로연을 치루었다.

내가 조선신학원을 졸업한지 며칠 뒤 배진성 목사님께서 집으로 찾아와 광주(廣州) 세곡교회 전도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에 순종하여 1월달에 부임하여 징용장이 나오기까지 9개월 동안 시무하였다. 징용장을 받은 나는 어쩔 수 없이 교회를 그만두고 징용을 면하기 위해 서울 관수동 동회로 나가 납세조합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만 1945년 3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 발진티푸스에 걸려 앓아 눕고 말았다. 병원에도 못 가고 집에서 나 스스로 주사를 놓으면서 투병을 했다.

간신히 살아나 정양을 하고 있던 5월초에 형사 두 사람이 갑자기 나를 찾아 왔다. 이들이 나를 끌고 가자, 가친께서 어디로 끌고 가는지를 말해달라고 사정하여 성동경찰서로 가는 것을 알았다. 성동경찰서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유치장 독방에 갇혔다. 유치장 안은 벼룩이 들 끊고 있어 잠을 잘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불려나가 취조를 받았다. 출생부터 살아온 내력을 상세히 말하라는 것과 친구들의 이름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이 한 차례 반복하곤 하였다. 그러다 8일째 되던 날, 오전에 취조가 끝났는데 오후에는 간수가 소지품까지 내주면서 나가 보라고 했다. 취조실로 가보니 장공 선생님께서 와 계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담당 과장에게 언제나 부르면 다시 온다는 내용의 서약을 써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경찰에 잡혀 들어간 사실을 아시고는 각 방면으로 수소문하여 나를 석방시킬 방법을 찾으셨다고 한다. 그때 마침 성동경찰서장이 경성제대 법과 출신인 것을 아시고 우리 신학교 강사인 하나무라 교수에게 부탁하였다. 법학박사로 우리 조선 신학원 법학통론을 강의하고 있었고 그 경찰서장을 가르친 바도 있었던 하나무라 교수(교회 장로)가 나서서 석방을 주선해 준 것이라 하였다.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다음 날인 16일 선생님께서는 나보고 동리 사람들을 모으라고 하셨다. 저녁 때 온 동리 사람들이 이장집 마당에 모이자,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가 그 동안 겪었던 고난과 우리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중심으로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서울로 올라 가셔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셨다.

2) 장공의 부름을 받아

나는 미금면 사람들과 의논을 거듭한 끝에 면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10월 말 선생님의 기별을 받았다. 나는 한동안 선생님을 뵙지 못했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에 11월 2일 서울 학교로 찾아갔다. 학교는 서울역 앞 동자동 17번지의 건물로 전에 일본 종교단체인 천리교(天理敎)가 사용하던 곳이었다. 가보니 마침 이사회를 하고 있어 기다렸다가 저녁 식사시간에 이사님들과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이 집사를 신학교 초대 서무과장으로 임명하였으니 당장 취임하여 직무를 수행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갑작스러운 말씀에 당황하여 사무경험도 없고 고향에서 하는 일도 있어 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이 집사는 할 만한 능력이 있으니 모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맡아주어야 하겠다”고 계속 권하셨고, 다른 이사님들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더 이상 거절하기가 어려워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 자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사퇴하고 집안을 대강 정리한 다음, 11월 사무과장 일을 맡아보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신학교는 선생님께서 교장을 맡고 계셨고, 교무과장은 정대위 목사님이 맡고 계셨다. 서무 일을 맡을 다른 직원이 없어 나 혼자 일을 했는데, 기숙사 사감 일도 하고 교수들의 살림살이도 돌보아 드려야 했다. 교장인 선생님이 그 동안 직접 경리를 맡아 장부를 정리하시던 것을 인계해 주셨다.

그 당시 조선신학교는 천리교의 많은 건물을 인수하였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피난민들에게 내주고 청년들에게 점령당하고 다른 재산들도 흩어져 결국 남은 것은 동자동의 교사와 기숙사, 그리고 사택뿐이었다. 학생들은 날로 늘어나 수십 명이었던 것이 300명으로 늘어났고, 기숙사도 매일 들어오는 학생이 늘어났다. 쌀, 땔나무 등 모든 것이 부족하였다. 당시에 미군정청이 식량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양의 쌀을 구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때 기숙사 식감을 맡고 있던 임창희 군이 그의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쌀을 구할 수 있다기에 정읍으로 가서 학생 10명과 트럭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많은 쌀을 수송해 왔던 적이 있었다. 우리의 안전을 걱정하시던 선생님께서 우리가 무사히 도착하자 크게 기뻐하시던 기억이 난다. 땔나무는 포천의 산판에 직접 가서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김장 때는 광주 신사리에 가 밭떼기로 사다가 선생님 사택 가족과 기숙사 식구들이 함께 김장을 담기도 했다. 방학 기간에는 기숙사를 폐쇄하고 개학할 때 누구나 쌀을 두 말씩 가지고 오도록 하여 기숙사 운영이 어려웠던 때를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1946년 어느 날 장공 선생님께서 교장직을 그만 두시고 송창근 목사님이 취임하셨다. 그 때 학생들 사이에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일을 아신 선생님께서 반대 움직임을 막으라고 하시면서 학생들을 직접 설득하시기에 나도 함께 학생들을 설득하였고, 무사히 무마되었다. 그 뒤 나는 좀더 서무 일을 보다가 12월에 사임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내 사업으로 한편 경영하던 우리상회 경영을 계속하였다. 외국도서를 수입, 판매하는 일도 했는데 그런 가운데 국제적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번역․출판하기로 작정하고 장공 선생님과 정대위 목사님께 여러 차례 상의를 드렸다. 그리고 정일형 박사의 도움과 이철원 박사의 용단으로 어려운 허가를 얻어내고, 사무실은 화신 구관 건물에 차렸다. 출판을 준비하는 일도 두 분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직접 번역해 주시고도 했고, 제자들 가운데 능력 있는 사람들을 구해 주시기도 했다. 1950년 1월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어판 창간호를 내놓고 매월 발간하여 5월에 5호까지 발간할 수 있었다. 이 일과 함께 나는 도농에 도농 고등공민학교(후에 도농 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학교를 시작하였다. 내가 직접 교장을 맡았고, 당시 전도사였던 이상철 목사가 교감을 맡고, 신학 졸업생이었던 신양섭 목사가 교무주임을 맡았다. 6․25를 당하자 『리더스 다이제스트』 발행은 중단되었고, 학교도 휴교하고 말았다.

나는 27일 서울 종로 다이제스트 사무실에 있다가 이주운 국장의 권유로 함께 피난을 떠났다. 한남동 나루를 건너 광주 둔전교회에서 하루 밤을 자고 오산, 대전을 거쳐 부산에 갔다가, 김해 진영의 한얼 중고등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인 강성갑 목사를 찾아갔다. 거기서 나는 이주운과 함께 그 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강성갑 교장이 선거 과정에서 야당을 지원한 것으로 미움을 사서 경찰에서 암살을 당하는 바람에 더 학교에 남아 있기가 어려워 부산으로 가서 지냈다.

내가 피난간 뒤 선생님은 도농 우리집에 피난하셔서 숨어사시면서 무사히 6ㆍ25를 넘기셨다. 이때 도농에는 강원룡 목사가족, 김기주 장로가족, 홍성걸장로, 홍만길 교장 등이 피난을 와 있었고, 신양섭 목사님은 도농에 근거를 두고 불사조처럼 서울과 경기도 일대를 누비며 정보수집과 식량조달을 하셨다. 당시 도농에 오신 분들은 다행히 모두 무사하셨다.

부산에 있던 나는 일군단을 따라 북진도 해 보았다. 수복이 되자 북진하여 조향록 목사와 함흥, 원산에 갔었고, 강원룡 목사와 평양, 순천을 가보았었다. 1ㆍ4후퇴 때는 다시 부산으로 피난 갔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인천에서 군인 가족 후송 LST를 타고 부산에 먼저 가 있었고, 나는 동생 남우대령 부하 군인가족을 인솔하고, 인천에서 김동진 씨 가족일가, 선주들 가족과 함께 목선(범선)을 타고 출발하여 마치 뱃놀이하는 것처럼 한 달 이상 걸려서 간신히 부산에 도착했었다. 온 가족이 나를 애타게 기다렸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부산의 분위기는 제주도로 피난 가야 한다고 한참 술렁거렸고, 6ㆍ25당시 피난하지 못했던 분들은 제일 먼저 피난 와 있기도 했다. 장공 선생님께서 부산으로 와 계셨기 때문에, 나는 곧 선생님을 찾아뵈었고, 신학교 여러 선생님들도 만나 뵈었다. 한번은 장공 선생님과 몇 분 목사님들이 거제도 학교 산림에 가보자고 하셔서 가게 되었다. 장승포에 계시던 진정율 장로님 댁과 옥포의 그분 계씨 댁까지 두루 찾아 뵈울 수 있었다.

3) 625동란 중 부산 남부민동 시절

두어 달이 지나서야 전쟁은 소강상태가 되고 휴전회담이 진행되었다. 나는 이주운 국장과 『리더스 다이제스트』 속간을 추진할 수 있었다. 5월호를 목표로 추진하던 중 이주운 국장이 어렵게 서울인쇄소까지 가서 6ㆍ25전에 발행하려고 했던 지형을 찾아와 큰 힘이 되었다.

이때 하루는 장공 선생님이 부르셔서 찾아뵈었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나보고 “신학교를 여기서 개교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시며 신학교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다이제스트 속간을 추진중에 있고 내게는 많은 직원과 그 가족들이 딸려 있다”고 말씀드리면서 부명하게 못하겠다고 했으나 장공 선생님도 완강하셨다. 선생님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나에게 강권하셨다. 첫째 이유는 지금 전쟁이 소강상태이고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다. 전쟁 중에는 학생들이 모두 정신 못 차리고 살기에 급급했지만 이제 여러 가지 범죄할 기회가 많아졌다. 이들이 다 목사가 될 사람인데 탈선한다면 큰일 아닌가? 이 학생들을 모두 거두어 모아 보호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꼭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대답을 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둘째 이유로 정대위 박사가 학감이 되어 학교운영을 맡아야 할 터인데 정박사 말이 춘우가 꼭 같이 일해 주어야 그 일을 하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한얼중․고등학교 교장을 하라고 교섭이 온 것도 초향록 목사를 추천하고 거절했음을 말씀드리면서 제발 용서해달라고 간곡히 말씀드렸으나 선생님은 양보를 안 하시고 모교를 네가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느냐고 강권하셨다. 결국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2개월간 학교를 운영하기 위한 준비만 해드리고 그만두기로 하고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장공 선생님께서 돈 오만 원을 내어놓으시며 그 돈이 사모님 돈까지 긁어모으신 전 재산인데, 이 돈으로 학생들을 모집하되 (1)수업료 전액 면제, (2)숙식 제공하는 것으로 학교를 시작하라고 하셨다. 나는 바로 광고 원고를 만들어 신문광고를 냈다. 그러자 오만원이 모두 광고비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다음 학교할 곳을 정하기 위해 정박사와 항서교회를 가보았으나 피난민으로 꽉 차 있어 도저히 개교하기가 불가능하였고, 다시 항남교회에도 가보았으나 그 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마침 항남교회 담임목사이던 권남선 목사님께서 장공 선생님과 청산학원 동창이라 각별히 가까우셔서인지 당신 땅이 좀 있으니 쓸만하면 쓰라고 하셨다. 권 목사님 안내로 항남교회 부근 토지를 살펴보고는 우리는 곧 남부민동 22번지에 터를 잡을 수 있었다. 그곳은 돌로축대를 높이 쌓은 집터였는데, 그때는 동네 사람들이 각종 오물을 옮기기도 하고 파묻기도 해서 깨끗이 한 다음, 정 박사와 함께 김해비행장으로 갔다. 거기서 천막과 폭탄을 담아 온 군용 나무상자를 몇 트럭 얻어, 학생들을 시켜 동리 집집을 돌아다니며 톱, 도끼, 망치, 빠루, 까귀 등 연장을 빌려오도록 해서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널판지들을 도끼와 톱으로 쪼개고 연결해서 천막기둥, 보, 도리 등 골조를 만들고 천막을 치고 마루를 깔아보니 비록 15평밖에 안되었으나 대궐을 지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곳을 우리는 낮에는 교실과 식당으로, 저녁이면 여학생 기숙사로 사용했다. 기숙사 사감 차보은 선생이 굉장히 기뻐하던 생각이 난다. 계속해서 우리는 식당, 교무실, 교실, 창고, 화장실 등을 세웠다. 온 직원과 학생들이 천막교실을 지어 놓고도 자기들의 작품이라 그랬던지 여간 흐뭇해 하는 게 아니었다. 이 일은 부산 교계에 널리 소문이 나기도 했다.

당시 김재준 박사가 이때 우리들의 모습을 직접 작사하고 박재훈 씨가 작곡하여 노래를 불렀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허둥지둥 보따리 둘러나 메고 서울있는 학교를 떠나 왔지만
남부민동 언덕에 천막을 치니
우리들의 새살림 근사도 하지
우리들의 새살림 근사도 하지

오랑캐때 북소리 아무리 커도 우리학교 외침엔 어림도 없지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편이니
어허둥실 두둥실 얼시구 좋구나
어허둥실 두둥실 얼사이 좋구나”

내가 악보를 그릴줄 몰라서 여기 가시만 기록했는데 곡까지 기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때 천막과 포탄 담았던 나무상자는 모두 김해 비행장에서 얻어 왔는데 그것은 비행장 군목 빤스 목사의 헌신적인 협력에 의한 것이었다. 정 박사와 빤스 목사는 대형 군수품들을 담아온 목재를 많이 구해오곤 했다. 천막으로 교육장 짓는 것이 끝나자 나는 정 박사에게 사택을 짓자고 했다. 정박사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좀 주저하는 것을 가족이 받는 고통을 생각해, 또 봉급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니 방 한칸씩이라도 마련해 드리자고 역설, 마지못해 동의하셨다. 그리하여 이미 권남선 목사님께 얻어 둔 교회 위에 채미밭을 집터로 닦고 한 건물에 세집씩, 한 집에 방 하나, 부엌 하나, 작은 마루방 하나씩으로 설계해 모두 세 채를 지었다. 이사회로서 열심히 학교를 돕고 계시던 김종대 목사님도 한 집에 사셨고, 전임선생님들은 거의 그곳에 사실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사택은 피난 중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김해 비행장에서 빤스 목사는 군인들이 먹는 레이숀을-군인들은 고기 등 한두 가지만 빼어 먹고 전부 남겼다-많이 실어다 주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팔아 기숙사 식량과 반찬거리를 사는 데 보태곤 했다. 어느 때는 거제도 진 장로님 댁에서 당신네 어장에서 잡은 생선 몇 궤짝씩 가져다 주시면 그날은 차보은 선생님이 특별히 비린내 제거방법을 써서 만든 생선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4) 서둘러 졸업식장을 짓다

나는 처음에 두 달만 하겠다고 했는데 어느새 석달이 넘었다. 그래 장공 선생님께 그만두겠노라고 하니 졸업식도 있고 하니 7월말까지는 더 일하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중앙교회 노진현 목사님을 찾아 뵙고 졸업식을 할 수 있도록 교회당을 빌려 달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 목사님은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그렇게 보고 드리니 이번에는 광복교회 이 목사님께 가보라 신다. 역시 한마디로 거절하신다. 그러자 이번에는 항서 교회로 가라고 하신다. 이번에는 내가 반대했다. 건물이 좀 좋다고 중앙/광복교회를 찾다가 안되니까 이제 와서 우리편 목사님께 가라시는게 아닙니까 하고

“그냥 여기서 하지요”

“여기 어디서 하나?”

“이 천막에서 하면 될 게 아닙니까?”

“졸업생은 어디 앉고 손님은 또 어디 앉나?” 하시며 난감해 하신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사님 말씀을 거역하였다.

그래서 나는 졸업식 예정 날짜대로 통지하고자 하고 진행시켰다. 나도 걱정이 되었지만, 학교 아래지역 약 200평 가량 되는 공지를 발견하고 이곳에 건물을 짓기로 했다. 그 토지는 적산토지로서 미군이 주둔할 때 물탱크를 설치했던 곳인데 동네 사람들이 채마를 부쳐먹고 있어 20만원 정도를 주고 해결하였다. 이렇게 토지를 확보하고 정 박사가 이리저리 뛰어 다녀서 목재를 다 구해왔다. 목수들도 여러분 구해 놓았다. 장마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졸업식을 4일 앞둔 날 목수들을 모으고, 초등학교 교사처럼 교실 2개 50평, 강대자리 3평 그리고 2층에 교무실 10평, 총 63평의 건물설계를 했다. 첫날 목재를 재단하고, 둘째날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얹고 합장(일본말로 갔쇼)을 만들었다. 그것을 밤새 학생들이 올려놓았다. 3일째는 문틀중방과 지붕 가로지름, 나무걸침 등으로 마무리 짓고 구해 두었던 천막을 올려 지붕을 덮어 그런 대로 졸업식을 치를 수 있는 건물공간이 생겼다. 의자는 항서교회에서 빌려왔다. 졸업식 날은 많은 손님이 오셨고 졸업축사는 건물축사가 되어 버렸다. 나는 눈물이 나서 건물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 지붕에 천막을 덮어놓았으니 바람이 불면 펄럭거릴까봐 걱정을 했는데 마침 그날은 바람이 없었다. 또한 바닷가니까 덥지도 않았다.

그 해 12월 그 건물에서 또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그때는 양철지붕을 했고 유리창도 마루도 깔고 해서 제법 건물 같아 보였다. 그 창문 유리는 한신 7회 졸업생 박승우 장로가 끼워주었다. 이 건물과 사택 등은 이후 한신이 환도할 때 항남교회에 형식적 값으로 십만원에 드리고 왔다고 들었다. 내가 수년 전 가보니 사택은 주거용으로 쓰고 건물은 교회가 되어 있었다.

그 당시 정대위 박사와 나는 어떻게 하면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을 벌 수 있나 하는 것이 관심사였다. 그래서 하게 된 일이 CTS(한국 신학교 건설단)사업이었다. CTS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정대위 박사께서 회고록에 자세히 쓰셨기 때문에 이 글에서 생략하려 한다. CTS는 부두 하역업도 했고 제법 수입도 올려서 피난중 학교 운영에 충당도 하고 동자동 재산불하대금도 냈다고 한다. 나는 두달 작정하고 신학교 피난학교 건설에 참여했다 무려 9개월이나 근무를 했고 낮에는 신학교일, 밤이면 이주운 형 댁에 가서 『리더스 다이제스트』 발간하는 일을 봐왔다. 나는 12월초 졸업식을 마치고는 사임했고, 김창준(삼익무역사장)집사께 CTS일을 보시고 신학교 일은 최명한, 박한진 두 목사님이 맡아 하셨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6년간 발행하였고 한편 도농중․고등학교를 24년간 경영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 동안 언제나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충고와 사랑을 받으며 지낸 셈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율원’(栗園)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호를 지어 주실 때 남기신 ‘작호사’(作號詞)가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 내가 거처하는 방에는 선생님께서 손수 붓으로 써서 만들어 주신 병풍이 있고, 써주신 글이 액자에 담겨 집 여러 곳에 걸려 있다. 가끔 이 글을 보고 읽으며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억한다. 나는 오늘도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