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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날마다 죽음을 사는 심정으로 사신 분 / 이우정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1-27 14:26
조회
1065

날마다 죽음을 사는 심정으로 사신 분

이우정(한빛교회 장로, 전 한신대학 교수)

장공 선생님은 분명히 기독교계의 거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민주화운동을 위한 대표적인 지도자였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고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한 것으로 안다. 많은 저명인사들이 그가 교육계에, 기독교계에, 사회에 끼친 영향과 공헌에 대해서 글을 썼고, 방송을 통해서 소개를 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그런 공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40여 년 간 그의 주변에서 가까이 모시고 지내는 동안 느낀 인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자연과 더불어 사신 분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자연과 더불어 사신 분이라는 인상을 강렬하게 풍기신 분이다. 흔히들 자연을 객관화하고 관상의 대상이나,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장공 선생님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이 곧 자신의 삶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에 대한 친밀감, 사랑, 때로는 두렵고 경건한 마음을 가지시기도 했다.

장공 선생님은 나무 한 그루도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시고 함부로 다루는 것을 싫어 하셨다. 그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한국의 산천을 고루 탐방하시기를 즐기셨고, 지병이신 당뇨병과 간 경화증으로 기동이 불편해지신 후에도 댁 근처의 산길을 산책하시는 일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래서 가족들이 염려하여 너무 무리하시지 않도록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산책에 나서시면 자연에 매료되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아지경에 몰입하시곤 했다고 한다.

장공 선생님의 이런 자연에 대한 경위와 애착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다. 그의 자서전인 「범용기」를 보면 고향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몸담고 살아오신 고향과 그 고향을 연상케 하는 자연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신 것 같다.

장공 선생님은 그 자연 속의 한 그루 거목과 같으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지 잎이 무성하여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 그늘에서 쉬고 갈 수 있게 해 주신 분이시다. 그분의 외모는 별로 위풍당당한 데가 없다. 오히려 초라한 편이다. 물질적으로 별로 여유 있는 생활을 못하신 그분은 옷차림도 초라한 편에 속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분의 인품과 마음은 항상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계셨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억지로 붙잡지 않는 유연함이 있으셨다.

6ㆍ25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환도하였을 때 장공 선생님은 서울역 가까운 동자동에 있는 학교 사택에서 사셨다. 안면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할 것이 없이 많은 사람들이 노비를 보태달라고, 또는 생활비를 보태달라고 왔다. 장공 선생님은 학교에서 받으시는 월급은 적은 액수지만 그대로 사모님께 넘겨주시고 원고료 등 다른 부수입으로 용돈을 쓰셨는데, 때로는 원고료 봉투를 뜯어 보시지도 않고 그들의 손에 쥐어주셨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거절하시지 못하는 성격이셨다. 가끔 사기꾼이 거짓 구걸을 올 때도 있었는데 곁에서 사기꾼 같다고 일러드리면 증거도 없이 처음부터 사람을 의심하는 일은 못할 짓이라고 하시며 여전히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것을 보고 나는 가끔 나 자신의 옹졸하고 초라한 모습을 부끄러워했다. 선생님의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선생님의 이름을 팔고 다니며 전국적으로 사기를 친 사람도 있다고 한다.

2. 한 인간의 가능성과 존엄성을 중요시하신 분


장공 선생님은 각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중요시하며 평생을 교육사업에 바치셨다. 그 덕을 제일 많이 본 사람이 나 자신이다. 나는 원래 완고한 유교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여자가 자기 주장을 강하게 주장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번쩍 들고 이야기하거나, 음성을 높여 토론을 하는 것을 여자답지 않은 일로 기피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학교에 다닐 때도 선생님 앞에서는 물론, 남학생들 앞에서는 고개를 못 들고 땅만 내려다보고 다녔다. 그래서 내가 항상 팔을 잡고 다니는 양정신 목사(당시 동급생 여학생)는 앞을 못보고, 나는 말을 못하는 사람인줄 알았다고 한다. 이런 내가 캐나다에 유학을 갔으니 그 쪽 사람들에게 오해도 많이 받았다. 영어도 서투르지만 의사표시를 제대로 못하는 나를 항상 캐나다생활에 불만을 품은 사람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어려움은 캐나다에 유학을 마치고 교수로 취임한 후부터 겪게 되었다.

밤새도록 강의준비를 해 가지고 가도, 학생들 앞에 나서면 말문이 콱 막히고 멍해지고, 얼굴만 붉어졌다. 도대체 나이 먹은 남학생들, 여학생들 앞에서 목청을 높여 강의를 한다는 것이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만 집착하니 강의를 한다는 것이 점점 더 겁만 나고 좌절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런 나를 격려하시고 추켜세워 주신 분은 장공 선생님이시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무조건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시고, 당신이 내 나이 때는 훨씬 못했다고 하시며 당신의 실패담을 이야기해 주시곤 했다. 선생님이 당신의 실패담을 하실 때, 웃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얻었던 내 마음은 훈훈해지고, 용기를 얻어 내 강의는 계속되고, 점점 익숙해갔다. 나도 여자이기 전에 하나의 당당한 인간이라는 확신을 굳혀가며,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의무와 책임을 다 하는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다지며 살 수 있게 해 주신 분은 바로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시다. 나에게서 작은 가능성을 보시고 포기하시지 않고 꾸준히 가꾸어주신 그분은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선천적으로 갖추신 분이라 하겠다. 장공선생님의 제자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도 많지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장공선생님의 참된 얼을 채 받아 살아가는 제자들이 많다. 이런 의미에서 그분은 교육에 성공하신 분이라 하겠다.

3. 깨 보이는 마음, 깨 보는 마음의 소유자


장공 선생님은 자신의 삶의 자세를 조심스럽게 가다듬으며 사신 분이시다. 그분의 글을 인용한다.

“나는 일제 말기에 하도 피복을 얻을 수 없어서 전부터의 의복을 기워 입고 누덱여 입고 하다가 정숭하게 되면 전에 버렸던 누덕 옷을 또 다시 들춰내서 게다 덧붙여 입곤 했다. 그렇게 몇해를 지낸 어느날 농작을 뒤지던 아내 말이 ‘인제 정말 걸레감만 남았구려’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연(憮然)했다. 무슨, 의복이 다 해졌대서가 아니라, 내 일생의 마지막 날에 내 기록을 들춰보는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할 것이 아닐까? 하는 ‘쇼크’가 내 머리를 스쳐간 까닭이었다. 인생이란 의복처럼 해지고 낡아지게 마련이어서 나의 먹어 갈수록 고깃덩이는 마르고, 찌부러지고, 남는 것은 그야말로 넝마 조각 정도도 못 되는 ‘송장’일 것이 아닌가! 좀 알아 뒀노라 던 소위 지성도 희미해지고 배운 언어도 다 잊어지고 분간 없이 망령을 부리고, 닦아둔 덕도 없이 천대를 받는다면, 그때 가서 내게 남는 재산이 무엇일까? ‘인제 정말 걸레조각 밖에 남은 것이 없구려!’하는 것이 내 무덤 앞에 적힌 비명(碑銘)이 아닐까?”(김재준 회상집 「하늘과 땅의 邂逅」-東洋出版社, 1962, 4-5쪽)

그는 과장된 겉치레나 허세를 싫어하셨다. 또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냥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담담하게 살아가신 분이시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또 6ㆍ25라는 비극을 겪는 동안 극히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외국에 나가 박사 학위를 받고 그야말로 금의환향하여 위세를 떨치던 1950년 중반이었다. 모 일류대학에 봉직하던 젊은 교수가 어떤 공개 강의 석상에서 그 당시 저서도 많이 내시고 강의도 많이 하시던 장공 선생님을 가리켜 “김재준 목사님은 교육자인지는 몰라도 학자는 못된다. 그는 독일어 원서도 못 읽는다!”고 했다. 유치한 이야기지만 그 강연을 들은 제자들은 화가 나서, 설익은 인격의 기고만장하는 그 박사 교수를 욕을 하고 장공 선생님께 달려와서 일렀다. 그때 그분의 반응이 참 재미있었다. 그분 특유의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으로 “그 교수 말이 맞다. 나는 학자는 못돼! 독일어 공부를 한다한다 하면서 차일피일 게으름만 피우고 여태껏 독일어 원서를 자유롭게 읽지 못하거든!” 하시며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화를 내던 제자들이 무색해진 것이다.

1950년대 초반에 장공 선생님의 신학사상이 문제가 되어 “신신학(新神學)”인 “자유신학(自由神學)”이니 하며 이단으로 몰릴 때, 순진한 신도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의 말만 믿고 “김재준이가 빨리 죽게 해달라”는 기도를 제법 여러 군데서 심심치 않게 드렸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 들으신 선생님의 표정도 앞에서와 같이 피식 웃으시고 담담하실 뿐이었다. 순진한 신도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이런 여유는 아마도 도인(道人)의 마음을 채 받으시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글을 다시 인용해 본다.

“도인(道人)의 마음은 백옥같이 맑단다. 거기에 몰욕이 덮이는 날은 도인생활(道人生活)의 황혼이리라. 그 때에는 진리 대신 땅문서가 보이고 의 대신에 권세가 우쭐댈지 모른다. 두 겹 세 겹 ‘비계’가 낀다. 추세 추리에 비루 해진다. 치근치근해서 ‘상갓집 개’ 같으면서도 그런 줄을 모른다. 결국 하늘의 빛이 막혀버리니 그 속에 우물거리는 것은 구더기 종류일 것이다. 맑은 마음, 맑아서 깨 보이는 마음의 소유자는 복 있는 자다. 깨 보이는 마음의 소유자는 깨보는 마음의 소유자다. 그는 현상(現象)의 배후에 가리워진 본체를 본다. 번영의 내막에 숨은 죄악을 본다. 영예의 배후에 움직이는 마수(魔手)를 보는 마음. 내 식탁, 내 취미에서 어려운 이들의 원한을 듣는 마음! 이런 것을 가리켜 ‘께보는 마음’이라 할까. 옛날 아씨시의 성(聖) 프랜시스는 평생을 무소유(無所有)로 표박하면서도 가난한 형제의 양식을 뺏는가 싶어 재를 무릅쓰고 통회를 거듭했단다. 새 세계는 이런 마음의 소유자에게 상속될 것이다. 교직(敎職)이 범죄의 엄폐물(掩弊物)이 되고 자선(慈善)이 위선(僞善)의 피난처가 되는 이유도 이 마음이 흐린데 있는 것이리라”-(같은 책, 72쪽)

누구에게나 넉넉한 너그러움으로 대하시며, 어떤 사태에도 유연하시고, 담담하실 수 있었던 것은 도인과 같은 맑은 마음을 채 받으시려 하셨기 때문이리라. 또 그가 주장하는 ‘깨 보이는 마음ㆍ깨 보는 마음’은 타협을 모른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한치의 양보다 없다. 그래서 그의 동료들이나 선배들에게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한국인의 특성을 말하는 학자들 중에는“이데올로기나 종교나 일단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경직화되어 실리보다는 명분론이 항상 우세하다. 불교, 유고, 기독교,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이 경직화된 상태로 전해진다”고 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수적인 정통 신학자들은 장공 선생님이 주창하시는 학문의 자유, 학자로서의 양심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이단자로 몰아 목사직을 박탈하고,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재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목사직을 박탈하게 되었다. 이 난리 통에 장공 선생님의 가까운 친구들과 선배들은 이 사태를 적당히 수습해 보려고 장공 선생님께 학문적인 입장이나 “예”와 “아니오”를 적당히 얼버무려 주시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장공 선생님은 그것을 못하셨다. 그래서 결국 보수파 정통신학자들이 주류를 이룬 총회에서(1951년) 그와 그의 제자들은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생긴 것이 오늘날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다.

4.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워 주신 분


장공 선생님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무척 강조하신 분이다. 이승만 정권 때 기독교가 그 정권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기보다는 오히려 편승해서 교회의 확장을 도모한 것을 무척 부끄럽게 생각하셨다. 삼선개헌 반대투쟁, 민주수호 등을 위해 주저 없이 투쟁의 전선에 나서신 것은 이런 반성에 연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장공 선생님은 가정에 등한하셨던 분으로 오해를 한다. 내가 곁에서 지켜본 대로는 무척 자상하신 아버지이셨다. 사모님에 대해서도 아기자기한 사랑을 나누는, 또는 심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대화의 상대로 삼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으나, 사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 가득히 가지고 계셨다. 당신을 섬기시는 그 정성으로 예수님을 섬겼더라면 사모님은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실 것이라고 내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의 자서전인 「범용기」에 보면 그의 자녀와 사모님에 대한 애틋한 심정들이 잘 나타난다. 그는 또한 제자들을 무척 아끼셨다. 그리고 몇몇 사람은 그의 편애를 받은 제자들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도 그의 편애를 받은 자들 중의 하나다. 내게 조금이라도 기독교인다운 양심이 있다면, 사회적 책임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편애 덕분이다. 이렇게 정(情)에 약한 것을 인간적인 약점이라고 해야 하는지 장점이라고 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글을 쓰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호흡을 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었다. 그의 마음에 잉태되어, 부글부글 발효되는 그의 생각들을 글로 옮기지 않고는 못 견디는 분이었다. 운명하시기 며칠 전까지도 그는 글을 쓰셨다. 한국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전국연합회에서 해마다 전국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위해 설교문을 써주셨다. 제목은“주여!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주옵소서!”였다. 이 조국이 두 동강이 나서 피를 흘리며 아파하는 현실들을, 남과 북의 집권자들이 분단을 집권연장의 도구로 이용하는 어두운 현실들을 개탄하고, 이 땅에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통일이 얼마나 절실한 민족적 염원인가를 설파하는 설교문이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설교였다. 또 그가 입원하신 병실에서 고 박종철군이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으시고 유언하는 심정으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셨다. 그의 유언과 같은 글과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그들의 제자들이 하나로 정리해서 “새해 머리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나라와 앞날을 염려하는 그의 절실한 심정이 구구절절이 나타나 있다. 그의 수상집 「人間이기에」에 실린 글 중 “죽어서 산다는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글이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사는 심정으로 민족을 사랑했고, 가족과 제자들, 이웃을 사랑하시며 사신 분이라 하겠다.

그는 생전에 찬사도 받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비판도 많이 받고, 미움도 많이 받았다. 그는 장점과 더불어 약점도 많은 한갓 인간이었다. 인간이기에 겪었던, 참 인간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겪었던 날마다의 죽음, 죽음을 산다는 그의 삶은 이제 영원히 끝났다. 그에 대한 참다운 평가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그분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