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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온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사신 분 / 이상철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1-27 10:15
조회
882

온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사신 분

이상철(캐나다 토론토 빅토리아대학 챤슬러)

「세계와 선교」가 다양한 집필자들이 쓴 “장공회상”을 20여회 실리고 이제 그 칼럼을 마무리할 단계에서 나에게 글을 청탁해 왔다. 지금까지 실린 글을 나는 거의 읽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무슨 얘기를 써야 할지 망설여지기도 한다. 나는 장공 옹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가족의 일원이기도 하니 그분과 가까이 지내면서 경험했던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해 보려 한다.

1.

내가 김재준 목사에 관한 얘기를 처음 들은 것은 북간도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이었다. 내가 은진중학교에 간 것은 김재준 목사님이 그 학교에서 교사로 가르치다가 떠난 직후였다. 일부 학생들은 김재준 선생을 극찬하고 영원한 스승으로 모실 분이라고 말했고, 다른 일부 학생들은 별로 인기 없는 따분한 선생이었다고 말하였다.

1946년 서울에 와서 경동교회에서 그분을 처음으로 만났다. 극히 담담한 대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설교를 즐겼다. 경동교회를 중심한 대학생들의 집회에서 그분은 자주 강연을 해주셨다. 역사가 토인비에 관한 얘기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의 신학자들에 대한 얘기를 그분에게서 들었다.

어느 학생이 김재준 목사님에게 “김목사님의 강연은 쉽고 명백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데 왜 다른 어느 신학자의 강연은 산만하기만 하고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까?”하고 얘기했더니 김목사님이 재미있는 대답을 해주셨다. “사물을 보는 사람의 자세에 두 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작은 창구멍을 통해 보고, 다른 사람은 발코니에 올라가서 활짝 열린 세계를 내려다본다.”는 것이었다. 김재준 목사님을 오래 접촉해 보면서 그분은 분명히 세계를 발코니 위에서 바라다보는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고 실감하게 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그분의 이해도 어느 한 신학자의 렌즈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을 비판 수용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특히 장공 옹은 그의 삶 속에 짙게 아로새겨진 유교나 도교의 깨달음을 버리지 않고, 기독교를 모든 진리와 문화를 축복하는 창조주의 넓은 품같이 받아들이는 분이라고 느껴지곤 했다. 나는 그 분 속에서 동과 서가 만나서 미묘한 샬롬을 이루어가고 있다고 느끼곤 했다. 그의 이와 같은 신학적 입장은 앞으로 두고두고 파헤쳐서 정리해 볼 만하다고 생각이 된다.

한국 동란 중 피난지 부산에서 장공 옹의 둘째 딸 신자와 나는 사랑이 생겨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는 신자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결심을 전달했다. 신자의 말에 의하면 그 일에 대해서 가타부타의 대답을 주지 않고 듣기만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공 옹은 나를 잘 아는 K목사를 만나 자기 딸과 나의 관계 발전을 얘기하고 “상철이가 어떤 사람이야?” 하면서 당황해 하더라는 것이다. 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나는 그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이었고, 그가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수학한 학생이었으니 그가 나를 알만큼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막상 딸이 나를 결혼의 대상자로 택했다고 하니 딸을 가진 아버지의 본능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도 역시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느껴져서 흐뭇함을 느꼈다. 그는 우리 두 사람의 결혼식을 손수 준비하였는데 물샐 틈 없는 자상한 준비를 해주셨다. 결혼식날 입을 옷이 없는 사위에게 구제품 양복 한 벌도 얻어주고 심지어는 하객들이 서명할 싸인북까지도 손수 만들어 주셨다. 그는 삼남삼녀 육남매를 키우고, 수많은 손자 손녀들을 슬하에 두셨는데 그의 아버지의 역할모델은 역시 동과 서의 아버지상이 미묘하게 합쳐진 모습이었다.

2.

장공옹은 1974년 박정희 군사독재에 밀려 캐나다에 오셨다. 10년 가까운 기간 그는 나와 캐나다에 와 살고 있는 자녀들과 함께 지냈다. 그때 나는 이미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그분과 나는 문자 그대로 동분서주하는 민주인사가 돼버렸다. 장공 옹은 어느 특정인을 분노를 가지고 대한다든지 평하지 않은 분이었는데 박정희에 대해서만은 격렬한 분노를 가지고 있어 나도 저으기 놀라곤 했다. 그는 아마 군사권력의 파괴적인 요소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둘이 미국, 구라파, 일본 등을 수도 없이 함께 날아다녔다. 그는 자연스럽게 해외 민주운동의 어버이가 되어버리고 나는 이분을 모시는 날라 다니는 보좌역이 되어버렸다. 또 우리 둘이는 자동차를 몰고 수천마일을 달려다니면서 피곤을 풀기도 했었다. 그 수많은 날들을 계속 얘기하면서 지낸 셈이다. 그분은 본래 등산여행 등을 즐기는 분이어서 함께 여행하면 즐겁기만 했다.

호텔이나 모텔 방에서, 카페테리아에서, 달려가는 자동차 안에서 그분의 삶의 냄새를 실컷 맡은 셈이다. 그분의 삶의 냄새가 섞여 있는 몇 가지를 살펴보려 한다.

장공 옹은 그의 말년에는 거침없는 “세계인”이 되어갔다. 그는 모든 인간을 아무 차별없이 품어 주는 마음의 폭이 생겨갔다. 그를 만난 다양한 민족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그가 진심으로 자기들을 포용해 준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곤 했다. 나 자신은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대륙에 살면서 새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인종차별을 극복하는 사회를 꿈꾸어 왔으니까 장공께서 그런 폭넓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크게 격려가 되곤 했다.

국내에서 계속 귀국을 종용해 왔을 때에 종종 착잡한 심경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특히 군사 정권이 계속되는 현실에 귀국하는 것은 마치 항복하고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었다. 내가 엿보기로는 온 세계를 향해 열어놓은 그의 마음은 한 민족의 울타리 속에 갇히기가 몹시 힘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가 귀국을 결심한 것은 “조국땅에 와서 묻혀야 한다”는 논리 때문이라기보다는 “고난받는 후배들이, 목사님이 옆에 계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호소에 그의 미암을 아프게 하고 가서 함께 고난받자는 동지의식을 더 많이 작용했다고 나는 알고 있다.

북한 사람들이 장공 옹과 내가 함께 평양을 방문할 것을 여러번 종용해 온 일이 있었다.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 두 사람은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국내에 있는 동지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이 돼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었다. 한번은 30여통의 편지를 국내에 있는 동지들에게 보내어 북한 방문건을 상의하기도 했었다. 30여명 중 한 사람만이 가도 무방할 것 같다는 회신을 보내오고 나머지는 다 반대했었다. 그 회신들을 둘이서 읽고 “동지들의 의견이 이러니 갈 수는 없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옹졸했다는 평을 면할 길이 없게 됐다”고 얘기하면서 쓴 웃음을 웃기도 했었다. 장공 옹은 “가서 제멋대로 훌훌 돌아다닐 수 있다면 신나겠는데 안내자라는 감시원에게 포로처럼 끌려다닐 바에야 안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하고 그 본연의 자유인의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북쪽 정부는 “장공 옹은 애타게 방북하고 싶어했는데 사위 이상철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못했다”고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3.

귀국하기 직전에는 캐나다 정부가 제공하는 노인 아파트에 내외분이 들어가서 아담한 살림을 하시게 되었다. 두 분은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나는 목회와 교단 일 또 한인 사회 일 등으로 쫓겨서 어떤 때는 한두 주 찾아뵙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면 전화를 걸어서 “요새 무척 바쁜 모양이구만!” 하신다. 그 전화통에서 들리는 음성 속에 외로움과 섭섭함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을 나는 직감하곤 했다. 나는 찾아가 뵙고 사과를 드리고 얘기를 나누면 여러 시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얘기가 계속됨에 따라 그분의 음성과 얼굴에 기쁨이 넘치기 시작하고 둘이 다 눈물이 글썽해지곤 했었다. 늙음이 가져오는 외로움에 대해 그분을 통해 많이 배운 셈이다. 그러나 그분은 존경스럽게 늙으신 분이었다. 나는 그분에게서 곱게 늙는 법을 배우기도 한 셈이다.

귀국을 결심하고 나서는 더 자주 만나서 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만날 때마다 “상철이도 한국에 돌아가지!” 하는 말씀을 되풀이하시곤 하셨다. 늙으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된다고 하는데 그분의 마음 어느 한 구석에 혼자 귀국하는 것에 대한 불안한 생각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 무렵 느닷없이 “이 목사는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장 한번 해야지!” 하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라고 설명을 드렸다. 그런데 귀국하신 후에 남북 통일문제를 가지고 일본에서 협의회가 모였었다. 이 모임은 WCC가 주선해서 ‘도잔소’라는 수양관에서 모였었다. 나는 그 회의에 참석하고 전화로 시간이 없어서 서울에는 못 들리고 돌아가야 하겠다고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전화를 받으시면서 “서울 들려 가야지”하는 명령조의 말씀을 하셔서 할 수 없이 서울에 들렸었다. 그때도 “아직 총회장이 안됐어?”하고 물으셨다. 나는 그분이 어디서 그런 착상을 하셨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분이 세상 떠난 후 1988년 내가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장이 됐다. 나는 그해 9월에 기장총회를 방문하러 가서 장공 옹의 산소 앞에 가 서서 “제가 총회장이 됐습니다”하는 보고를 드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뜨내기로 떠돌아다니다가 20대 초반에 부모님 옆을 떠나 외톨이로 살아왔다. 그러다가 결혼하여 장공 옹을 장인으로 모시게 돼어 다시 어비이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게 됐다. 장공 옹은 젊은 시절에는 무뚝뚝한 아버지였다고들 한다. 그러나 말년의 장공 옹은 그 자녀들에게 그냥 흐뭇한 신뢰감과 애정을 느끼게 해줬다. 특히 어린 손자 손녀들에게는 할아버지가 너무도 좋은 분이었다. 나는 장공 옹과 자주 함께 여행을 했었다. 아무리 여정이 바빠도 쇼핑시간을 꼭 만들어 드려야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고 아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면서 선물을 사는 것을 무척이나 즐기셨다.

캐나다에 계시는 동안 성지순례의 기회를 마련한다고 여러 번 얘기하면서도 실현이 되지 않았다. 구약학자이신 그가 성지에 가보시지 못한 것은 유감스럽다. 그런데 사실은 장공 옹도 나도 온통 장사판이 되어버린 성지에 흥미를 잃고있어 성지순례를 성사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장공은 말년에 온 세계와 인류 전체를 품에 안을 만큼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계셨다. 그 뜨거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계셨다. 그 뜨거운 마음을 쏟아놓을 세계를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것이 나로서는 “한”이 된 셈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겸허하게 가족들의 자상한 아버지로, 동지들과 후배들의 좋은 친구로, 민족의 내일을 염려하는 지사로 지내시다가 조용히 떠나 가셨다. 평생 그분을 마음에 모시고 흐뭇한 삶을 살게 된 내 처지를 감사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