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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시대가 요구하고 하나님이 선택한 예언자 / 박봉랑 교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1-27 09:51
조회
1476

시대가 요구하고 하나님이 선택한 예언자

박봉랑(전 한신대학교 교수)

1.

내가 김재준 박사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서울 역전, 동자동 있던 조선신학교(한신대학의 옛 교사)에서였다. 1947년 늦은 봄. 나는 38선을 넘어서 모든 것이 생소한 서울로 왔다.

일본에서 신학 공부를 하다가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해 9월에 그때의 한국장로교 남부총회의 직영 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 졸업반에 편입을 했다. 1947년 가을, 내가 조선신학교에 편입 했을 때는 이미 조선신학교에는 1953년에 김재준 박사님이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을 받아 장로교가 분열되고 기독교장로회가 새롭게 탄생된, 한국장로교의 교리논쟁을 사건으로 일으켰던 때였다.

장로회 평양신학교에서 편입을 해왔던 50여명의 학생들이 김재준 박사님의 강의에 집단적인 항거운동을 일으켜 50명 전원이 퇴학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재학생들은 압도적으로 이 항거운동의 참여를 거부하고 김재준 박사님과 조선신학교의 주장을 지지하여 그들의 항거운동은 실패하고, 이단의 논의는 신학교 밖으로 나가 노회에서 총회로 번져 갔다.

그러나 학생들은 김재준 박사님과 같이 굳게 서서 밖으로는 항거를, 안에서는 결속과 안정을 찾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편입을 했을 때의 조선신학교의 상황이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일찍이 송창근 박사님과 김재준 박사님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평양에서 장로교의 직영이었던 숭실학교에 다닐 때 송창근 박사님은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귀국하시어 젊은 신학자 목사로서 평양의 이름 있는 산정현장로교회의 당회장으로 계시면서 숭실전문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시고 설교도 하시어 젊은 학생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고 김정준 박사, 전 정대위 한신대학 학장, 조선출 목사는 그때부터 송 박사님의 제자들이었다. 김재준 박사님은 송 박사님과 같이 미국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으신 뒤 귀국하시어 역시 평양장로교의 학교였던 숭인상업학교의 성경교사로 계시며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발간하고 있던 〈신학지남〉지에 글을 쓰시기도 하시고 젊은 학생들에게 교회의 지도자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나는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후에 학교에 출석을 하여 사무실에 들어간 일이 있었다.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고 나에게 상면을 청하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김재준 박사님이시었다. 아마도 나를 학교를 방문한 손님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아닙니다. 교수님 저는 이번에 졸업반에 편입한 학생입니다”고 멋쩍게 대답을 하고 일을 마치고 도망을 하는 사람처럼 사무실을 나온 일이 있었다. 이것이 내가 김재준 박사님을 처음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 상황이다. 그때의 김 박사님은 한국교회의, 신학계의 최고 스승으로 자타가 그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을 받는 분이었는데, 한 알지 못하는 방문객 같은 학생에게 어쩌면 그렇게 겸허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도 그때의 김 박사님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내와 자식들, 부양 가족을 가진 나와 같은 실향민이 신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때의 경제적 사정을 고려하면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꼭 신학교를 마쳐야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더구나 그때에 교회의 사정은 전도사를 해서 가족을 부양하며 신학공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신학교의 편입과 함께 그때 서울 정릉에 있는 경신고등학교의 교사로 근무를 하며 신학을 계속하는 무리를 감행하게 됐던 것이다. 그러니 출석이 정상적일 수 없었다. 당연히 나는 학기말 시험자격의 문제 학생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학교의 은총적인 배려로서 학기말 시험을 치르고 첫 학기를 마칠 수가 있었다. 그 다음 학기부터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

직장을 경신고등학교로부터 조선신학교 바로 옆에 있던 경성전기공업고등학교(현, 수도공업고등학교) 야간부로 옮기고, 또한 신학교의 배려에 의하여 식구들도 가정을 가진 학생을 위한 신학교 구내 기숙사로 옮겨 졸업반의 마지막 학기를 원만하게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나의 바램은 목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또한 그런 기회도 가능할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바램과 기대와는 다르게 1949년 봄부터 나는 모교의 교수회의 말석에 앉게 되어 신학자로서의 나의 카리스마의 삶이 시작됐던 것이다.

2

내가 조선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양적으로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김 박사님의 칼빈신학, 현대신학, 특히 변증법적 신학의 강의들을 학우들과 같이 엄숙하게 듣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그러나 내가 이 소수자의 무리에 속하게 된 것은 나의 신학의 생애에 있어서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일본에서 신학을 수학한 나는 많은 신학의 동지들과 후배들을 얻었고 무엇보다도 훌륭한 신학의 스승들을 얻은 것이다. 송창근 박사님은 내가 신학의 길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고, 최윤관 목사님의 단순, 솔직, 겸손한 인격과 사심없는 ‘목회’는 사명의 성실성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내게 신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고, 기동력이 되고, 신학의 길로 밀어 주고 이끌어 주신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그분이 바로 김재준 박사님이시다.

일찍이 공자의 제자로 자랐으나 청년 시절에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 집회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회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김재준 박사님은 기독교 신앙의 서적들과 성서를 탐독하는 중 신학을 지망하여 일본 청산학원에서 수학을 하셨다. 그는 윤치호 박사님의 호의로 도미하여 프린스턴 신학교와 웨스턴 신학교에서 구약과 조직신학을 전공하여 신학석사 학위를 받으셨다.

귀국하시어 그는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교사로 계셨고, 그뒤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의 성경교사로 시무하신 후 1939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의 설립과 같이 신학교육에 투신하시어 1963년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한신대학에서(교수로서, 학장으로서) 신학교육에 헌신하셨다.

그의 신학의 근본정신은 ‘자유’와 ‘겸허’로 표현될 수 있다. 그의 호 장공(長空)이 말하듯이 그는 원래 유교의 ‘군자’형이며 그의 풍채와는 달리(그는 키가 크지 않고 몸이 넓지 않다) 마음과 생각은 크고 넓다. 그의 신학은 자유의 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만 그의 인간됨의 소질만이 아니라 ‘말씀의 자유’를 말한다. 그의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이며, 여기서 응답의 자유와 자유 안에서의 책임이 따랐다. 그의 자유는 그가 즐겨쓴 대로 ‘예수 그리스도’ 때의 속박에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겸허’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떠한 신학체계도 절대화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신학은 변한다”고 했다고 해서 시비가 있었지만 오늘에 와서 생각하면 그의 말은 옳았다. 이것은 그의 겸허한 신학의 성격을 말한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절대’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은 “인간은 믿음으로 은혜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는다”는 고백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신학을 포함하여 모든 신학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겸허한 신학자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그의 단호한 거부는 그의 전투적인 성격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복종에서 오는 ‘예와 아니오’의 응답의 자유와 책임에서였다. 1937년에 시작하여 39호를 낸 잡지 <십자군>은 이 자유의 표식이고, 그의 논문집 <낙수>는 그의 겸허의 신학의 성격을 말해준다. ‘겸허’와 ‘전투’는 그의 순례의 신학의 두 극을 이루고 있다.

그는 해석적, 설명적인 타입이라기보다는 창조적인 형이다. 책을 읽으면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보다는 거기서 창조적인 통찰의 방향을 얻는다. 그는 구약 연구에서 예언자적 통찰을 얻었고, 조직신학의 훈련에서 전체적인 사고를, 그의 윤리학의 훈련에서 책임적인 행동의 방향을 얻었다. 그의 눈은 현상보다는 본질적인 것에 있었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은 그가 즐겨하는 성경구절이었다.

그의 성격은 조용하고 말씀도 조용하였다. 그러나 한번 ‘이것이 그것이다’는 근본적인 판단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해서 내려지면 그의 결단은 누구도 움직일 수 없이 단호했다. 여기는 타협이나 양보가 허락되지 않는다. 이것은 다름아닌 말씀의 응답의 자유와 책임에서 온다. 박정희 정권 때의 한일수교 반대 운동을 비롯해서, 대통령의 삼선개헌, 유신헌법, 전두환 정권의 광주사건, 인권탄압, 군사투쟁 등에 대한 김 박사님의 항거, 1960년대 이후의 김 박사님의 현실 참여는 ‘말씀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그의 신학적 통찰,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그의 본질적인 사고와 원리적 판단에서 온 것이었다.

3.

1950년 6ㆍ25 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1년에 피난지 부산에서 신학교는 다시 계속되었다. 고 김길창 목사님의 호의로 항서교회의 예배실과 2층 다락을 숙사 겸 교시로 해서 개강했다. 충분히 광고도 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흩어졌던 양들이 우리를 찾아오듯이 오늘도 몇 명, 또 내일도 몇 명 동료 학우들이 나타날 때마다 서로 얼싸안고 기뻐 야단이다. 매일 축제의 연속이었다. 얼마 후에 남부민동에 있는 항남교회의 고 권남선 목사님께서 항남교회 주위의 공지 채소밭 몇 백 평을 제공해 주셔서 교사를 남부민동으로 옮기고 김재준 박사님(학장), 정대위 박사님(학감)을 중심으로 남부민동 캠퍼스의 피난민 신학의 시대를 가졌다. 고 김정준 박사님이 처음에는 거제도에서 목회를 하시며 일 주일에 한 번씩 부산에 오셔서 강의를 하시다가 후에 남부민동으로 이사를 오셨고, 김관석 목사님이 교무과 일을 담당하시고 내가 학생과 일을 맡고, 차보은 선생님께서 기숙사 책임을 맡으셨다. 그리고 이춘우 장로님께서 서무과 일을, 최명한 목사님께서 학생과 일을 도와주셨다. 후에 박한진 목사님께서 서무 책임을 맡으셨다.

김재준 박사님을 선두로 우리는 모두 삽을 들고 인분으로 덮여있던 채소밭을 정리하여 우선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 겸 교실과 작은 사무실 천막 셋을 쳤다. 천막은 숙사이며 식당 그리고 교실이 되었다. 새벽 기도회로 시작해서 취침 전 예배까지 남부민동 언덕 천막촌은 찬송, 기도, 웃음으로 찼다. “어둥지둥 보따리 둘러나 메고 남부민동 언덕에…” 천막 사무실에서 교수님들의 노래가 들려나온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택을 지었다. 김재준 박사님, 이사장 김종대 목사님(지금은 고인이 됨), 정대위 박사님, 김정준 박사님, 김관석 목사님, 박한진 목사님, 이춘우 장로님, 내 가족이 이웃이 되어 살았다. 후에 최거덕 목사님도 같이 고생을 나누었다. 우리는 정대위 박사님의 수고로 미군 종군목사를 통해서 건축물자를 얻어서 다락 윗층을 교무실로, 아래층을 교실 겸 강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교사를 우리 손으로 세웠다.

여기서 우리는 1951년도 졸업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보따리의 신학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의 신학이요, 기쁨의 신학, 희망의 신학이요, 전투의 신학이었으며, 산 아래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변화산의 신학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때에 공부를 한 선배 목사님들이 얻은 것은 많은 지식이 아니었을는지도 모르나 그들이 얻은 것은 이 희망과 창조, 기도와 전투, 소명과 강한 훈련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1952년 가을에 김정준 박사, 김관석 목사 그리고 나는 각각 캐나다와 미국으로 떠나게 되고 전경연 박사와 고 서남동 박사가 오셔서 신학교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1952년에 나는 그때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나의 친구 이영헌 박사(현재, 장로회신학대학 명예교수)를 통해서 미국 캔터키 주에 있는 애스버리(Asbury) 신학교로부터 왕복여비, 등록금, 기숙사비, 잡비 일체를 포함하는 완전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나 3남 1녀에다가 임신중인 아내, 그리고 생활보장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가족을 내버려두고 떠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래서 혼자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었다.

“박 목사, 떠나시오. 이 기회가 두 번 다시 있기 어려울 것이오. 산 사람에게야 무슨 살 도리가 있지 않겠소.” 김 박사님은 하루는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 결단을 가능하게 한 요소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여권 수속이 끝나고 배의 선실도 예약이 되었다. 그러나 차마 해산이 가까운 아내를 그대로 놔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배편을 연기하고 아내가 해산한 후 2주일만에 저물어 가는 가을 오후에 부산 부두에서 학생들의 전송을 받으며 미국 화물선으로 부산을 떠났다. 나도 예측을 하지 못했던 만 6년 동안의 긴 신학연구의 순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1958년 가을에 귀국했다. 돌아온 곳은 부산의 남부민동이 아니고, 서울 역전의 동자동도 아니고, 수유리 산 129번지, 그때의 상황으로는 서울에서 상당한 거리에 떨어진 백운대 밑 넓은 대지의 한 낮은 동산이었다. 언덕에 새로운 강의실들과 강당, 도서관을 가진 아담한 2층 본관 건물과 학생관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남녀 학생기숙사, 15, 6동의 교직원 사택을 가진 오늘의 한신 임마누엘의 공동체, 한신대학이었다. 시내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엑소더스의 공동체를 연상케 했다.

한신대학 수유리 캠퍼스의 출발은 한신대학 역사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한국 신학교육의 역사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의 새 출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 같다. 나는 김재준 박사님에게 직접 배운 제자로서 한국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가 된 것이었다.

김재준 박사님 주위에는 당당한 젊은 신학자들이 모여서 한국신학의 역사의 찬란한 전통을 이루어 나갔다. 정대위 박사(교회사), 김정준 박사(구약), 전경연 박사(신약), 서남동 박사(조직신학), 문익환 목사(구약), 이장식 박사(교회사), 정하은 박사(기독교윤리), 문동환 박사(기독교교육), 이우정 교수(신약)들은 김재준 박사님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신학대학의 얼굴들이었다.

4.

5ㆍ16 혁명 이후 혁명정부의 개정된 정년퇴직법에 따라서 김박사님은 65세를 채우지 못하고 긴 신학순례의 코스에서 일단 퇴직하셨다. 그의 활동은 한신학교의 캠퍼스로부터 교단 전체, 교회 전체로 넓혀졌다. 그는 기독교장로회 총회의 김재준 박사가 되었다. 그리고 사회와 정치, 역사와 민족으로 그의 지평은 넓어지고 깊어졌다. 고난받는 겨레와 민족 속에 들어가서 참여하는 ‘참여의 신학’이 전개되었다. 전투의 신학에서 약속과 승리의 신학으로 그의 소리는 변했다. ‘제3일의 신학’이다. 동인지 <제3일>은 단순히 <십자군>의 계속이 아니고 그것의 성취와 승리의 약속이었다. 창간사의 한 구절을 들어보자.

“‘오늘도 내일도 나는 내 길을 간다!’ 이것이 예수의 삶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대로 가지 않는다고 그를 잡았다. 그래서 첫날에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다음날에는 무덤 속에 가두고 인봉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기 악의 한계점에서 ‘됐다!’ 하고 개가를 부를 때 하나님은 ‘아니다!’하고 무덤을 헤친다. 예수에게는 이 ‘제3일’이 있었다. 그의 생명은 다시 살아 무덤을 헤치고 영원에 작열한다. 제3일, 그것은 오늘의 역사에서 의인이 가진 특권 – 역사의 희망은 이 ‘제3일’에서 동튼다. 이 날이 없이 기독교는 없다. 이 날이 없이 새 역사도 없다”(<제3일> 창간사에서).

김 박사님은 생전에 그의 생애와 역사의 기록을 담은 자서전, <범용기>(전6권)을 완성했다. 이 책은 시간과 같이 가며 오고 오는 세대에 역사의 산 증언으로 남을 것이다. 1971년에 한신대학은 김재준 박사님의 글들을 모아서 『장공전집』(전5권)을 펴냈고, 기독교장로회 총회, 장공기념회는 새롭게 『장공 전집』(전18권)의 출판을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자랑스러운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김 박사님은 웨스턴(Western) 신학교 대학원에서 구약학 교수님의 총애를 받게 되어 어떤 의미에서는 구약의 전공을 강요받다시피 됐다고 하는 말씀을 김박사님으로부터 들은 일이 있다. 그는 신학석사 학위 공부를 하는 동안 히브리어로 모세 5경을 거쳐 예언서들을 읽어나가는 도중 귀국하시게 됐다고 한다.

귀국하신 후에는 그의 생애가 말해 주듯이 한국교회는 그에게 신학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했다. 만일 그에게 계속해서 신학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과 기회가 허락됐더라면 분명히 그는 세계적 신학자가 됐으리라고 믿는다. 그의 신학은 말씀의 신학, 선교의 신학이며, 역사의 신학이다. 그의 신학의 범위는 성서신학, 조직신학, 종교철학, 종교학, 기독교윤리, 삶의 영역 전체를 포함한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그에게는 어느 하나 신학자나, 신학체계, 한 신학의 분야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무기를 잡고 싸우며, 생각하며 쓰고, 읽으며 가르치고, 가르치며 읽어야 했다. 실로 그는 박학자요 진정한 의미에서 ‘박사’였다. 그는 신학자이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이며 애국자, 애국자이며 설교자, 설교자이며 비판자, 항거자, 한마디로 김 박사님은 그의 시대가 요구하고 하나님이 선택한 그의 시대의 ‘예언자적 목사’였다.

5.

어느 기회인가 분명하지는 않지만(그것은 분명히 수유리 신학대학 채플에서였다) 김 박사님이 학장으로서 학생들과 청중들 앞에서 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웃긴 일이 있었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계속해서 위에서 말한 경성전기공업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던 1948년 여름방학에 나는 여름방학을 꼬박 공업고등학교 교사실에서 웃통을 벗어제치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원문 Institutes 두 권을 읽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김 박사님의 신학교 사택은 내가 공부한 교사실 길 바로 맞은편, 교사실 방 속까지 들여다보이는 높은 곳에 있었다. 김 박사님이 창문을 통해서 길 건너편 교사실을 내려다보니 어느 젊은이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혼자서 옷을 벗어제치고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아, 저 젊은이는 무엇인가 되겠구나’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젊은이가 박봉랑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아, 하고 웃었던 일이 있다.

그것이 계기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학기 뒤인 1949년 봄에 신학교는 나를 불러 조선신학교 교수회의 말석에 앉게 했다. 나는 김 박사님을 매일같이 만나고 같이 살았지만 김 박사님은 한 번도 그런 사실을 나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시간 김 박사님의 ‘박봉랑 이야기’를 들으며 학생들과 같이 웃었지만, ‘김 박사님은 뒤에서 나에게 그와 같이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나를 아끼셨구나. 이러한 스스을 가진 제자는 얼마나 축복인가!’ 나는 내 가슴을 짚어보며 다시 한 번 스승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뒤 나는 신학적 문제나 교회적 문제, 때로는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중대한 결단에 직면할 때마다 ‘밤중에’ 조용히 김 박사님을 찾았다. 그리고 김 박사님의 판단은 언제나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