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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어아부운”(於我浮雲) 하시던 스승 / 박광재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25 09:50
조회
1144

“어아부운”(於我浮雲) 하시던 스승

박광재
(서울노회 공로목사)

8ㆍ15 해방 후에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재건파(고신파)가 등장하면서 분규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마침 1950년부터 성서관 문제로 분규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성서관 문제란 자칭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축자영감설과 성서 문자무오설이 과연 올바른 성서관이냐는 문제를 제기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일으킨 분이 바로 장공 김재준 목사였다.

장공 선생이 축자영감설, 즉 성서 문자무오설을 부정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써 붙인 죄패는 공관복음에 각각 다르게 기록되었다. 마가복음 15장 26절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하였고, 누가복음 23장 38절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하였으며, 마태복음 27장 37절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한 죄패에 세 가지가 쓰여 있을 리는 만부한 것이며 그렇게 말할 아무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복음서 기자가 자기의 기억에 가장 똑똑히 남아 있는 것을 기록하였을 뿐이다. 만일 축자영감설대로 따진다면 이 셋 중에 하나만이 정확한 것이요 다른 둘은 절대로 틀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경 기사 중에는 이렇게 상이한 곳과 상호 모순되고 상반되는 기록이 많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공 선생께서는 성경의 권위를 오히려 높이기 위하여 성서 문자무오설을 배격하고 성서 목적영감설(의지영감설)을 주장하셨다. 성경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인데 이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한 것이다(요 5:39). 따라서 성경은 과학서적이나 철학서적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진리나 철학적 이치에 어긋난 점이 있다 해도 영생을 얻게 하는 데 지장이 없는 한 성경의 권위는 손상받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문자적으로 오류가 있고 같은 사건이 상반되게 기록된 곳이 더러 있다 해도 성경은 성경대로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은 예수님이 누워 계신 말구유이지 예수님 자신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워 계신 말구유가 소중한 것처럼 예수님을 증거하고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는 성경은 거룩하고 권위 있는 책이다”라고 말하였다. 프레테릭 데니슨 모리스(Frederik Denison Maurice) 박사는 성서 문자무오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성경의 연대나 역사적 기록에 다소 착오가 있다고 해서 예수 믿는 것을 그만둘 듯이 야단법석을 떠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들을 신임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무시하겠다. 그따위 믿음은 그들을 위하여 하루 속히 무너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50년 당시 예수교장로회 총회 안에는 모리스(F. D. Maurice) 박사가 혹평을 내린 성서 문자무오설을 주장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노회, 총회 단위로 구수회를 자주 모이고 공식, 비공식적으로 회의를 개최하여 장공 김재준 목사를 이단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또한 이들은 당시 예수교장로회 기관지인 「기독공보」(주간발행)를 통해서 장공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재판도 없이 이단 운운하면서 인신공격을 계속했다. 이들은 이렇게 부당하게 처신하면서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은 듯 자기네들이 자칭 정통주의자라고 자처하고 광란하기 이르렀다. 이 광란하던 사람들은 박형용 박사를 중심으로 한 고려신학파(재건파) 목사들과 평안남북도에서 월남한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과 맞서 우리 한신대학 동문 목사들과 신앙 양심을 지키려는 많은 목사와 장로들은 장공 선생과 우리 한신대학 그리고 신앙의 양심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서서 자칭 정통주의자들과 맞대결하여 선한 싸움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정통주의자들과 싸우는 명분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나라 장로교회 안에는 정통이라고 하면 덮어놓고 신봉하는 일부 교회 지도자와 순진한 크리스천들이 있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이란 것은 보수주의자들이 따르는 신학의 한 학설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학설은 시대의 유물로서 복음의 본질에 역행하는 바리새적 율법주의에 빠져 버리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 소위 정통주의 신학이란 것은 교회의 자라나는 속생명의 움을 짓밟아버리는 우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화된 외피와 같이 생명령이 없는 조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신학과 새로운 교회를 이 땅에 정착시키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났다”(김재준, “총회에 보내는 말씀”, 「십자군」, 1950년 3월호 참조).

1953년 6월 10일 한신대학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호헌총회 선언문에는 우리 총회가 투쟁하여 나아갈 명분을 다음 네 가지로 설정했다.

1.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2. 우리는 건전한 교리를 세움과 동시에 신앙 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3.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조 정신을 함양한다.
4.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제38회 총회 회의록 15쪽).

 

우리는 1950년도부터 1953년까지 약 4년 동안 경제적 그리고 수적으로 외로운 투쟁을 계속했다. 설상가상으로 캐나다 선교부를 제외한 북장로교 선교부, 남장로교 선교부, 호주장로교 선교부까지 바리새적인 정통주의자 편에 서서 바리새적인 위선자들의 못된 역할을 하였다.이 일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웃지 못할 희극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렇게 외롭지만 선한 싸움을 하다가 드디어 195년 봄 정통주의(성서 문자무오설 주장) 총회에 의하여 김재준 목사는 이단이란 죄명으로 제명되고 한신대학 졸업생과 재학생들 전원은 교회 강단에 설 수 없다는 벌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총회에서는 일 라운드 격으로 싸움이 끝나고 이 싸움이 불은 노회와 지교회로 비화되었다. 노회와 지교회에 싸움이 붙자 수년 동안에 걸쳐 노회가 둘이 되고 교회도 두 편으로 갈라서면서 벌어진 온갖 음모와 모략, 재산과 교회당 쟁탈전 그리고 폭력 등 온갖 추태를 기록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 노회와 교회는 판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말려서 교회라는 면모를 어느 한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때에 싸움의 도화선이 된 장공의 마음(심정)이 어떠했던가 생각해 봄직하다. 만일 그가 범인(凡人)이었더라면 그의 심정은 허탈, 실망, 좌절감에 빠져 있었으리라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는 범인이 아니었기에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1953년 6월 10일 제38회 호헌 총회 후 필자는 어느 날 「기독시보」(사장 : 강수학)에 게재된 장공 선생의 짤막한 글을 대하게 되었다. 그 글의 제목이 ‘어아부운’(於我浮雲)이었다. 이 말의 뜻은 총회와 노회 그리고 교회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 필자에게 섬광처럼 성구 한 절이 떠올랐다. 그 성구는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개겠다 하고 이른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어떠할지 분별하면서 때의 징조는 분별치 못하는도다”(마 16:2-3)였다.

이 성구는 당시의 사두개파 사람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천기는 분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 다시 말하면 역사의 징조는 분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위선자들이라고 예수께서 힐책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장공은 하늘의 징도와 땅의 징조를 공히 아셨던 분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과연 그는 대인(大人)이었다.

성서 문자무오설과 정통주의 논쟁과 싸움의 소용돌이판이 장공에게는 뜬구름 어아부운(於我浮雲)이었다. 뜬구름은 시간이 흐르면 흘러가 버리고 푸른 창공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낮에는 태양이 빛과 열을 지구 위에 보내고 밤에는 시정을 담은 달이 고운 얼굴을 보이고 무수한 별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장공은 당시 어수선하고 침울한 성서간 논쟁을 둘러싼 지저분한 사건을 뜬구름으로 갈파하셨다. 이 말을 풀이하면 장공은 역사의 발전과정을 미리 터득하신 선각자였다는 것을 필자는 지금에 와서 회고한다. 그때에 김재준 목사께서 총회에서 제명되고 한신대학을 졸업한 목사와 재학생들이 교회 강단에서 설교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 같은 소인들은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으며 걱정도 하였다. 그러나 장공은 그때의 소용돌이를 새로운 역사를 잉태하는 시련으로 보았으며 역사발전의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에 억울함도 분통함도 걱정도 없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짐작한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소인이었고 그는 대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공은 분명히 천기도 분별하고 시대의 징조(표적)도 분별하신 분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시대의 징조”는 성경 주석가들이 “구원의 때에 나타내는 징조(표적)”라고 입을 모아 해석한다.

장공은 성서 문자무오설과 정통주의 시비와 악몽 같은 그 싸움을 구원의 때에 나타내는 시대의 징조라고 보았다. 이 싸움을 통하여 해산의 고통을 겪고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옥동자는 탄생했다. 장공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생활에 뿌리를 박고 탄생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과거 39년동안(1953-1992) 구원의 때에 나타난 시대의 표적(징조)들을 많이 보였다. 그러나 지면상의 제한으로 세 가지 시대의 표적만을 적기로 한다.

첫째로, 학문의 자유운동이다. 보수주의에 길들여진 교회주의자들과 바리새적인 위선자들의 못자리 판인 한국교회 풍토 속에서 학문의 자유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질식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출범을 하면서 한국 교계에 학문의 자유(신학의 자유)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시대의 유물인 성서 축자영감설과 문자무오설을 세상의 유일무이한 진리인 양 여기는 풍조가 195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학문의 자유란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기장의 공헌으로 현재 한국 교계에서는 아무리 급진주의적 신학논쟁이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구원의 때에 나타난 기장의 첫 번째 표적이다.

둘째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활성화이다. 1953년, 즉 기장이 출범하기 전까지 ‘에큐메니컬 운동’이란 용어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낯선 낱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 지도자와 신학자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서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무지했다는 말이다. WCC가 1948년에 암스텔담에서 모였는데 한국교회에서는 고작해서 김정준 박사가 신문기자(기독시보?)의 자격으로 참석했을 정도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당시 한국교회 내의 에큐메니컬 운동은 황무지였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장이 에큐메니컬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이후 오늘에 이르러서는 감리교단, 예장 통합측, 그리고 기장이 WCC의 정식 회원 교단이 되었다. 그리고 강원용 박사 등 수명이 WCC 중앙위원으로 봉사했으며 박상증 목사 등 여러 사람이 WCC 간부직원(유급직원)으로 당당하게 에큐메니컬 운동을 위하여 공헌하였다. 국내에서는 1960년 이후 지금까지 약 32년동안 KNCC 역대 총무 세 사람 중 기장 출신 총무가 두 사람(길진경, 김관식)이고 현 총무도 기장 목사(권호경)이다.

1953년 기장이 에큐메니컬 운동을 제창한 후 약 40년이 경과한 오늘 한국교회 내에서의 에큐메니컬 운동은 활발하기만 하다. 이것이 구원의 때에 나타낸 기장의 둘째 표적이다.

셋째로, 자유와 인권운동이다. 기장 호헌총회 선언서 네 가지 중 세 가지가 자유와 자주 문제이다. 자유와 자주라는 말을 통합하면 인권 혹은 인간의 존엄성이란 말이다. 그러나 5:16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 씨가 군사독재 정권을 수립하여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송두리째 뭉개 버렸다. 박정희 씨가 살해된 후에 자유가 오는 줄 알았더니 12ㆍ12 별들의 전쟁과 5:18 광주항쟁 등으로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숫자를 알 수 없는 광주 시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많은 목사, 교사, 학생,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많은 국민이 매를 맞고 전기와 물 고문을 당하며 불법연행과 연금을 당했다.

왜 감옥살이를 했으며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았는가? 왜 분신자살을 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기장이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반독재정부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피 흘림 없으면 자유함이 없느니라”, 즉 희생이 없으면 자유와 인권은 없다는 믿음으로 우리 기장은 도전하는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 자유와 인권운동이 구원의 날에 기장이 보여준 세 번째 표적이다.

기장이 보여준 표적, 즉 ‘학문의 자유, 에큐메니컬 운동 전개, 자유와 인권운동의 뿌리’는 장공이신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김재준 전집」 1권 간행에 붙이는 글 가운데에 김정준 박사의 말을 인용하여 긴 문장으로 장공을 찬하였는데 필자는 장공의 인격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평한다. “장공, 그는 살아 숨쉬는 학문의 주체요,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의 몸이며, 인권과 자유의 화신”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