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02-2125-0162
changgong@hs.ac.kr

장공 사숙(私淑)

사숙(私淑) : 뛰어난 인물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그 사람의 저서나 작품 등을 통해 본받아 배우는 것

한국 교계에 반짝이는 별 / 김경수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8-22 09:26
조회
1215

한국 교계에 반짝이는 별

김경수
(제주노회 은퇴목사)

[1] 빛 바랜 회색 외투

김재준 목사님은 광복 후 온 나라가 혼란하고 모든 것에 가난하기만 했던 교회와 우리 역사에 반짝이는 별이며 시들지 않는 꽃이며 캄캄한 시대의 창문을 열고 새 생명의 맑은 공기를 숨쉬게 한 우리의 맑은 샘이셨다.

내가 알고 있는 김재준 목사님은 일본 제국주의 강권통치에 짓눌리고 짓밟히기만 하던 불모지와 같았던 배고픈 이 땅에 태어나서 온갖 아픔과 설움, 배신과 굴종, 중상과 모략 속에서도 신학교와 교회에 대한 끈끈한 애정과 넓은 가슴으로 길 잃은 나라의 광야 같은 교회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극단적인 보수주의 신학으로 질식할 것만 같았던 교회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은 선각자이며 예언자였다.

그 김재준 목사님을 내가 처음 뵙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벗어나던 해의 12월 초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미 마음먹었던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머나먼 길 기차 타고 서울역에 내린 다음 동자동에 있는 조선신학원을 이미 고인이 되신 조종협 목사와 목회활동에서 은퇴한 유운필 목사와 함께 찾았다. 그 뒤에 안 일이지만 그때 조선신학원의 학장이 김재준 목사님이셨다. 그것도 모르고 신학교를 찾아갔을 때 우리 세 사람을 다정하게 맞아주신 분이 계셨다. 얼굴은 검은 편이고 코는 납작하고 보통 키에 외투는 겨우 무릎을 가릴 정도의 빛 바랜 회색이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고 사무실 안의 공기는 썰렁했다. 그해는 눈도 일찍 내렸지만 추위도 여느 해보다 빨라서인지 몹시 추웠다. 그러나 처음 신학교를 찾은 우리가 신학교에서 처음 뵌 분이 학장이신 김재준 목사님이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송창근 목사님도 만날 수 있었다.

[2] 천지개벽과 같은 창세기 강의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들은 김재준 목사님의 강의는 창세기였다. 그때 그 시간의 창세기 강의는 나에게 큰 충격이었을 뿐 아니라 신학에 눈을 뜨게 한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노아의 대홍수가 만일 창세기의 기록 그대로 지구 전체를 완전히 덮을 정도였다면 지구의 무게가 달라졌을 것이고, 또 그렇게 되었다면 지구의 궤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에는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콜럼버스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전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구는 저들이 살고 있는, 넓어야 중동지방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이렇게 시작된 창세기 강의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나갔던 나는 ‘축자영감설’이라는 문자주의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신앙생활은 그저 그런 것이려니 하고 믿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김재준 목사님이 던져 준 성서강의는 내게 있어서 천지개벽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양식사적 신학훈련은 내가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나타났다. 이미 그때 미국 신학교에서는 그보다 훨씬 과격한 신학을 강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조선신학교에서 신학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신학에 실망한 나머지 신학을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보수주의 일변도의 신학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한국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결국 김재준 목사님의 신학이 진보적이고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죄명으로 김재준 목사님을 이단자로 몰아 제명하고 말았다. 그것이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가 분리하게 된 시작이었다.

[3]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학문의 자유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의 악독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광복한 후의 우리나라도 교회도 일대 혼란기였다. 광복의 감격과 흥분이 가라앉자 억눌렸던 욕망과 권세욕의 분출로 여기저기 비온 뒤의 대나무, 버섯처럼 정당과 사회단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나면서 어느 하루도 파업과 데모가 그치는 날이 없었다. 그로부터 5년 뒤, 6ㆍ25 한국전쟁이 터졌고, 남과 북으로 밀고 밀리는 와중에 북쪽에 살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대부분이 평신도들이었지만 북쪽에서 시달리며 고생하던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남하하여 서울로 몰렸다.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격돌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장로회 총회가 모이면 이단 시비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때는 칼 바르트도 폴 틸리히도 불트만도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이단자였다. 고등비평이니 성서의 문서설이니 양식비판이니 하는 것은 입 밖에도 내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나 조선신학원에서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신학의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수신학자들의 공격 목표는 언제나 김재준 목사님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기독교장로회도 큰 교단으로 성장했고, 그때 한국신학대학을 이단으로 정죄했던 교단도 이제는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이단으로 정죄했던 신학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것이 세계 신학의 흐름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아직도 축자영감설만을 고집하는 장로교단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신앙의 자유니까 어찌하겠는가.

한국신학대학은 세 가지 깃발을 들고 나섰다. 첫째, 신앙의 자유, 둘째, 양심의 자유, 셋째 신학의 자유가 그것이다. 한국교회가 축자영감설에서 벗어나 세계교회와 흐름을 같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신학대학을 중심으로 한, 신학적인 선각자, 김재준 목사님의 예언적인 목소리 때문이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김재준 목사님은 시를 썼어도 큰 시인이 되셨을 것이다. 김재준 목사님은 강의할 때에도 설교할 때에도 앞을 보지 않고 천장만 바라보셨다. 그리고 목소리는 모기 소리 같았지만,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시적이며 예언자적이었던 것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나비>

가을에는 왜 푸르던 나뭇잎이 빨갛게 물드는지 겨울에는 왜 빗방울이 눈이 되어 흰 꽃잎 쌓이는지
나비는 왜 날고 싶어하며
새들은 왜 쉬지 않고 지저귀는지
사람들은 왜 필요 이상으로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며
그것에 매달리는지 생각하며
어깨의 힘 빼고 나비처럼 훨훨훨 날아보세
너무 서둘지 말고 찬찬히 조용한 파도굽이
푸른 바다 일으켜 세우며 굵은 파도소리
잔잔한 물결소리 노래하며 우리가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
천년이고 만년이고 즐거운 마음 나비처럼
짙푸른 하늘 훨훨훨 자유롭게 신나게 날아보세
흰나비 호랑나비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