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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9호] 특별대담 - “우리 아버지 장공, 처음과 끝이 같았던 분” / 인금란, 김관용, 이정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7 14:34
조회
1027

[제19호] 특별대담

우리 아버지 장공, 처음과 끝이 같았던 분

장공 막내아드님 내외분 김관용 장로, 이정희 장로 인터뷰


우리 아버지는 자유주의 신학자가 아니라 자유한 신학자’”

인금란 : 장로님 내외분을 함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리 이 장로님은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회장님이시기도 했고, 또 존경하는 선배님이시기도 합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아버님이시고 시아버님이신 장공 김재준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분의 학문적이고 사상적인 면들은 평상시에 접하고 나눌 기회도 있었는데, 오늘은 ‘아버지’, ‘시아버지’로서의 장공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상 속의 장공을 통해 한신인이나 기장인이면 누구나 다 고민하는 바른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좀 풀어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장공 김재준 목사님을 뵌 적이 없는데요, 그래서 김관용 장로님을 뵈면 늘 장로님의 모습이 장공 목사님 모습이거니 하는 게 항상 있거든요. 그렇게 큰 어르신을 아버님으로 두신, 그런 장로님 입장에서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그런 말씀을 듣고 싶어요.

김관용 : 먼저 가족으로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장공기념사업회가 그 동안 기념사업하는데 힘써 주시고, 특히 황성규, 조원길, 김경재 목사님께서 이렇게 신경 써주시고 저희 가족들을 사랑해주셔서 가족으로서 이번 기회를 빌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막내였기 때문에 크는 동안 한 번도 아버지와 떨어져 본 적도 없고, 사랑을 늘 많이 받아왔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부산에 피난 갔을 적에 제가 송도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졌다가 지나가던 대학생에 의해 구조된 적이 있는데, 제가 무사히 살아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무척 기뻐하셨던 그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버지를 밖에서 비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신신학, 자유주의 신학을 했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저도 그렇고 아버지를 좋게 보는 분들은 아버지를 자유주의자나 극좌신학자가 아니라 ‘자유한 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아버지가 모든 것들을 흡수하고 소화해서 창조해내는 분이라서 그런 평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분은 정말 폭이 넓어 동양과 서양의 모든 것들을 아울러서 조화를 이뤄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한 수많은 제자들과 동역자들, 또 교단과 교회 식구들이 많았고, 또 사회, 민족적으로도 사랑을 많이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자식으로서는 여기 있는 저나 또 캐나다에 있는 다른 형제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금란 : 그런데 장로님께서 아버지가 국가, 사회적으로도 많이 존경받는 분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은 건 언제쯤이신지요?

김관용 : 글쎄요. 사실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아버지의 마음속의 왕국에 들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부담이 많이 되고 부끄러운 아들입니다. 그러나 저희 아버지는 단지 그런 부분뿐만 아니라 모든 걸 떠나서 생활에서 늘 진실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존경하고 그랬습니다.

저는 아버지로 여겼고, 아버님은 로 대해주셨어요

인금란 : 아, 그렇게 존경하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게 부럽습니다. 장공 선생님의 범용기를 읽다보면 장공의 며느리 사랑 또한 지극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요, 특히 이정희 장로님을 뵈면 늘 ‘장공의 며느리’라는 게 먼저 떠오릅니다. 며느리로서 가장 가까이에서 장공 목사님을 모시면서 수발하고 그 많은 손님들을 접대하고 하셨는데요, 이번에는 우리 이정희 장로님께서 시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는 이야기들을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정희 : 제가 어려서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요, 그래서 그때부터 ‘아버지’ 소리를 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들어오니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좋아서 ‘아버님’ 이래야 예의인데, 대뜸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또 함경도 분들은 며느리들에게 이름을 부르거든요. 그러니까 “정희야” 이리 불러주시고, 저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 참 행복했습니다. 저를 딸처럼, 아니 딸로 대해 주셨어요. 제가 결혼해서 1974년에 캐나다 가시기까지 모시고 있었고, 또 다녀오셔서 돌아가시기까지 만 3년 동안 모시고 있었는데, 처음에 결혼할 때는 ‘기장’이 뭔지도 몰랐어요. ‘장공 어르신’이 누군지도 몰랐고요. 저는 감리교에서 자라서 감리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결혼을 해서 와보니까 ‘기장 교단’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내가 동경하던 참 멋진 교단이다, 이렇게 신사적으로 예수를 믿어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왜냐면 우리 친정 어머니한테서 너무 호되게 믿음훈련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내가 엄마 그늘을 벗어나면 나름대로 멋있게 신앙생활 해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던 차였는데, 시집을 와보니까 아주 근사하게 예수를 믿더라고요. 그렇게 하면서 아버지 사랑을 받았지요. 참 이뻐해 주셨어요. 당신 일기장에 별별 이야기를 다 쓰시니까, 그 일기가 또 책으로 나올 때는 민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참 진심으로 사랑해 주셨고, 저도 친아버지처럼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제가 첫아이 임신했을 때는 입덧하느라 축 처져 있고 못먹으니까 직접 손잡고 가셔서 링거주사도 맞혀주시고요, 미아리서 양장점 하던 제자한테 가서 임신복도 맞춰주셨어요. 어느 날은 이쁜 여아 사진을 가지고 오시더니, “맨날 저거 보면서 어여쁜 딸 낳아라. 나중에 봐라. 이제 딸 좋은 세상이 온다” 그러셨어요. 그래서 딸 낳았어도 하나도 죄송스럽지 않았지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아버지, 저 퇴직금 주셔야지요” 하고 농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응? 퇴직금?” 하시길래, “제가 기사했죠, 비서했죠, 간호사했죠, 또 집에서 다 도우미했지요, 며느리했지요. 그러니 퇴직금 주셔야지요” 했더니 “그러게. 주긴 줘야 되는데 줄게 별로 없다.” 그러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여튼 시집 와서 마지막 순간까지 옆에 있었다는 게 저로서는 참 행복했고, 지금도 집에 아버지 사진을 걸어놓고 있는데 아침마다 사진을 보면서 속상한 일 있으면 한 번씩 푸념도 하면서 지금도 늘 같이 계시는 느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인금란 : 하나님이 참 묘하시네요. 왜냐면 밖으로도 자랑스러운 장공이지만, 그런 장공을 몰랐던 며느리가 시집 와서 아버님을 모시면서 친아버지처럼 존경하고 사랑하며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었다는 게 사실 참 쉽지 않은 일인데요, 그렇게 만나게 해주신 게 참 감사하네요.

장공의 손님들

인금란 : 김 장로님, 장공이 큰일을 하시면서 주위에 훌륭한 친구분들이 많이 계셨을텐데, 그런 분들 중에 딱 떠올리자면 당연히 만우 송창근 목사님이나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들이겠지요. 아버지 옆에서 뵐 때 아버지와 그런 분들과의 관계는 어떠셨는지요? 또 제가 듣기로는 이 장로님이 음식 솜씨도 참 뛰어나다고 하더군요. 결혼하고 그 솜씨로 그 많은 손님들을 다 대접하셨을 텐데요, 그 당시에 드나드는 손님들은 주로 어떤 분들이 오셨는지요?

김관용 : 그런 분들과의 관계를 폄훼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제가 듣고 또 옆에서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송창근 목사님이야 제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 젊은 시절부터 이미 아버지를 이끌어주고 도와주신 둘도 없는 ‘형님, 아우’ 사이였지요. 평양에 계실 때도, 아버지 글에 여러 번 나왔습니다만, 지루할 만큼 자주 밤 11시까지 대화를 나누다 돌아오곤 하셨다 하고, 언젠가는 무슨 일로 송창근 목사님의 호된 야단에도 오히려 정신나게 해주어 고마웠다고 하실 만큼 그런 신뢰가 깊은 사이셨지요. 한경직 목사님과도 교회사적으로는 서로 다른 길을 가셨지만, 사적으로는 캐나다에서 돌아오시고 나서까지 계속 깊은 우정을 나누셨지요. 그냥 형식적인 우정이 아니라 하실 얘기는 다 하실 만큼 그런 관계셨어요. 한번은 한경직 목사님이 조찬기도회 참석한 일을 아버지가 얘기하니까 한경직 목사님은 또 목회적인 관계 속에서의 상황도 얘기하시고, 그렇게 솔직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사이셨어요.

이정희 : 결혼하고 1971년부터 캐나다 가시기까지는 그야말로 유신시대니까 장준하 씨, 김철 씨나 그 당시에 요주의 인물들이었지요. 그리고 유신 발표되고 나서는 신 형사라는 분이 우리 집 마루에 상주하고 있었어요. 마루에는 신 형사가 있고, 마당에는 보안사 요원이 있고, 그 앞에는 짚차가 있었지요. 그때 결국 “내가 여기서는 아무것도 못하겠다” 생각하시고 캐나다에 가시기로 결정하실 정도로 참 불편해 하시면서도 상주해서 감시하는 신 형사에게까지 잘 대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굉장히 감동을 받았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캐나다에 가신 결정적인 계기는 은명기 목사님 재판 때였는데, 어느 날 새벽에 옷을 입으시길래 어디 가시는지 물었더니 “전주에 재판이 있어서 가야 한다” 하셨어요. 그런데 나가시다 화가 잔뜩 나서 돌아오셨어요. 보안사 요원들이 못가게 막은 거예요. “내가 내 제자 재판에도 못가느냐”고 호통을 한 번 치시고는, 그때부터 캐나다 가실 때까지 수염을 안깎고 지내셨어요. 그때 제자를 엄청 사랑하시는구나 느꼈지요. 아버지는 제자들을 참 많이 아끼셨는데, 그런 제자들도 많이 오셨지요. 당신이 나가질 못하니까 뵈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그랬지요.

장공의 제자 사랑과 가족의 희생

인금란 : 저희들이 전해 듣기에도 장공 선생님의 제자 사랑이 아주 크셔서, 등록금 없는 학생들은 불러다 마련해 주시고 그랬다는데요, 그런 장공 선생님과 사는 사모님은 참 힘드셨겠구나 생각되는데, 실제로 어떠셨나요?

김관용 : 집안형편이 계속 궁핍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고요. 예를 들면, 제가 젖먹이일 적에 어머니가 잡수는 게 너무 없어서 젖이 안나오니까 제가 빨다가 기절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하용’이라는 저희 오촌이 하는 병원에서 분유를 가져다 먹여서 살렸다 그런 얘기도 들었어요.

조원길 목사님도 학생시절 형편이 어려울 때 아버지께 은혜를 입으셨다고 이제는 거꾸로 제가 십 년동안 장학위원장으로 있던 장학회에 12년째 후원을 해주시고 계시지요. 그런 이야기들이 여럿 있는데 아버지의 그런 사랑의 혜택을 이제 제가 받고 있습니다.

인금란 : 정작 장로님 형제들은 학비 때문에 어려운 적은 없으셨는지요?

김관용 : 저는 직접적으로는 없었는데, 누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비도 그렇거니와 하루하루 도시락 싸가는 게 무척 어려운 형편이었던 것 같아요. 도시락을 제대로 싸주질 못해서 맨날 깡보리밥에 반찬도 엉망이어서 한참 예민할 때에 그것 때문에 속상해 했던 것 같아요.

인금란 : 그런 부분들을 표현은 안하셨어도 마음으로는 가지고 계셔서 범용기에는 가난해서 자식들 제대로 못 챙겨주고, 결혼할 때도 없이 보낸 걸 나중에 굉장히 마음 아파하는 글을 쓰기도 하셨는데요, 아마도 더 힘들고 갈급한 이들을 챙겨 주시느라 그랬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 장로님은 어떠셨는지요? 김 장로님이 직장생활을 하시기는 하셨지만, 그래도 손님들이 하도 많이 오시니까 그 분들을 대접하고 그러기에 형편이 어렵지는 않으셨는지요?

이정희 : 학교 퇴직하시고 사택에서 나와 쌍문동 국민주택으로 이사하실 때, 그게 당시에 360만 원인가 그랬는데 그것도 다 낼 형편이 안되셔서 150만 원인가 내시고는 나머지는 매달 얼마씩 갚아나가셨다고 해요. 제가 결혼해서 왔을 때는 그래도 대한일보 논설위원을 하고 계실 때여서 근근이 살았고, 그 외에도 어디 강연 다녀오시고 그러시면 부엌에 슬그머니 오셔서는 “야, 있지. 이거 (살림에) 보태라” 하고 봉투를 주시고는 했어요. 또 결혼하고 바로 《제삼일》지가 시작되어서 식구들이 다 그 일에 매달려 그렇게 살았지요.

어머니는 아주 어려운 시기에도 시골에서 조카들까지 올라와 다 데리고 사시면서 살림을 하셔서 그런지 살림하는 패턴이 딱 있으시더라고요. 아버님이 월급봉투라고 해서 갖다드리면 가장 먼저 연탄 들여놓고 쌀 한 가마니 팔아다놓고, 일단 그것만 있으면 생명을 부지하니까 그 다음에 다른 지출들을 하셨어요. 저는 옆에서 심부름했고, 캐나다 가시기까지 어머니가 살림을 맡아하셨는데 그렇게 하셨지요. 저희는 《제삼일》지를 열심히 했지만 월급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그런 저희를 먹여 살리셨지요. 어머니가 고생을 참 많이 하셨지요. 그 시대의 어머니는 다 그러셨지요. 자식새끼들 먹여살리느라고 당신은 굶으셨지요. 우리가 그리 배고팠을 때 어머니는 얼마나 더 배고프셨을까 나중에서야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버지, 캐나다에서 돌아오신 후

인금란 : 사실 ‘생명, 평화, 정의(生命, 平和, 正義)’ 휘호는 기장여신도회가 받은 거잖아요. 그 뒷배경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양심수들을 위한 영치금 보내기 운동을 여신도회에서 할 땐데 재정이 없어서 걱정을 했더니 그걸 써주셔서 처음에는 접시로 만들었죠. 그리고 걸개로도 만들고요. 그 휘호를 직접 받아서 오신 거잖아요?

이정희 : 예, 맞아요. 저 글씨를 쓰실 때 제가 먹을 갈았으니까요. 캐나다에서 돌아오셔서 1983년 11월, 12월 무렵이었는데, 마음이 급하셨어요. 10년 정도 나가 계신 동안에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그렇고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당신이 한국 땅에 없었다고 하는 그런 미안한 마음이 너무 크셨어요. 이걸 어떻게 다 갚나 하시면서 강의도 많이 다니시고...... 돌아오셔서 가장 하고 싶으신 게 뭔지 여쭤보면 당신 제자가 하는 아주 어려운 시골 교회 뒤편에 앉아서 설교하는 모습을 보는 그런 순례를 해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런 급하신 마음에 여신도에서 부탁했을 때 선뜻 그걸 써주셨는데, 저게 전세계에 돌아다니는 그런 글씨가 될 줄은 그땐 몰랐죠.

인금란 : 예. 작년도 WCC 총회도 저 휘호 그대로 주제로 했죠. 지난 번 여신도회 총회 땐 회원들이 그런 내용을 잘 모를 것 같아서 저건 김재준 목사님이 우리 여신도회에 직접 써주신 거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WCC의 주제가 됐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당시 돈으로 천만 원을 모금했어요. 그래서 영치금을 보내 사회선교를 할 수 있는 기금이 됐어요. 지금은 차가 있지만, 그때는 여신도회 총무님이 저걸 직접 들고 다니시면서 팔고 그랬어요. 김경희 총무님 같은 경우에는 “내가 지금 무릎 아픈 건 접시 들고 다니고 짐 들고 다니면서 파느라고 그런 거”라고 말씀하세요. 베다니 집에도 한자로 써주신 액자를 저희가 소중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장공, 처음과 끝이 같으셨던 분

인금란 : 캐나다에서 돌아오시고 3년 정도 다시 우이동 자택에 모셨잖아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장 옆에 계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시다면 어떤 걸까요?

이정희 : 아버님이 십년 동안 나갔다 들어오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숭실대학교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한 것이었습니다. 한국 역사에 관한 주제였고 어른을 모시고 이야기를 듣는 그런 강연이었어요. 제가 모시고 갔어요. 아버님은 십년 만에 한국에 오셨으니까 나를 이렇게 불러줬다고 하는 고마움에 열심히 말씀을 하셨는데, 논찬을 하는 교수님이 힐랄하게 비판을 하시는 거에요. 틀렸다는 거에요. 장공 선생님의 그 말씀은 옛날 것이지 지금과는 맞지 않다는 거에요. 제 생각에는 아주 새까만 후배가 버릇도 없이 할아버지를 앉혀놓고 저렇게까지 말을 할 수 있나 하면서 마음이 상하셨겠지 했어요. 좀처럼 겉으로는 표현을 안하시는 분이니까요. 내가 이렇게 마음이 상하는데 아버님은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하고 모시고 오면서 눈치를 보았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시더니 어제 논찬한 교수를 집으로 부르라고 하셔요. 그래서 이제 호통을 한 번 치시려나 보다 하고 오시라고 그랬지요. 역사를 공부하신 분이었는데, 집에 오셨어요. 그런데 그분을 앉혀놓고는 “어제 당신이 하는 말을 듣고 많이 깨달았는데 당신 말이 맞다. 내가 십년 동안 나가 있어서 시야가 멈춰져 있었던 거 같으니까 당신이 추천하는 역사책의 목록을 여기 다 적어주시오” 하시더라고요. “내가 한국에서 읽어야 할 역사에 대한 책 목록을 다 적어달라” 그러시니까 이분이 일곱 가진가 여덟 가지를 적으셨는데, 그 책은 아직까지 우리 집에 있어요. 전집으로... 그렇게 적어놓고 가셨는데, 저한테는 서점에 가자고 하셔서 같이 가서 그 책을 다 사셨어요. 엄청 많은 양이었는데 그 책을 다 사서는 집에 가져다 꽂으셨어요. 그때 제가 아버님이 이래서 존경을 받으시는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호통을 치실 줄 알았는데 그걸 다 받아들이시고 “맞다. 내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생각이 굳었을 수 있다” 하시고 그 책을 읽으시면서 원고를 또 쓰시는 걸 보면서 이렇게 흡수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게 참 대단한 품이시구나 하는 것을 옆에서 느꼈어요.

감히 우리 같은 사람들은 흉내도 못내고 따라가지도 못하지요. 책 내시려고 원고 써놓으신 걸 보면 처음 글씨체하고 마지막 글씨체가 똑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희한한 거에요. 글씨체뿐만 아니라 사시는 방향, 방법, 의지 같은 것들의 처음과 끝이 어떻게 저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한차례의 흔들림도 없이. 그런 면에서 존경을 받으시는구나 하고 느꼈죠.

인금란 : 평생 공부하시는 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나가시는 모든 것을 가까이 계신 분에게까지 존경받는 건 쉽지 않잖아요. 그걸 유지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게 있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건강관리나 독서습관이나 음악을 들으신다든지, 운동을 하신다든지 하는 이런 일상적인 그분의 삶의 모습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게 있으신지요?

이정희 : 당신의 건강을 위해서 뭘 하신 건 아닌 것 같고, 아버님 옆에는 어머니가 계셨죠. 제 느낌에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하늘 아래에 있는 하나님셨어요. 제가 옆에서 뵐 때 하나님 말고, 이 땅에서는 일평생 어머니가 하나님처럼 모든 걸 섬기셨어요. 모든 뒷바라지를 다하시고 하셨지요. 건강관리를 위해서 뭔가 특별히 하셨다기보다는 워낙 타고 나신 건강도 있으시고, 노년에 오셔서는 그렇게 고향산천 거니시는 걸 좋아하셔서 제자들 몇 분이 있으신데, 전학석 목사님을 비롯한 몇 분이 수시로 오셔서 모시고 나가는 거에요. 1983년에만 강화도를 세 번에 걸쳐서 가셨는데 끝내 마니산 꼭대기에까지 올라가셨어요. 그때 일기를 쓰셨는데, “나를 세 목사가 부축했다가 업었다가 하면서 끌고 거기까지 올라가서 보았다” 하시고는 그 감동을 다 쓰셨는데, 자연, 생명 이런 것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셨어요.

돌아가실 무렵에는 아침마다 혈당 검사를 해야 하니까 피 뽑고, 체중 재고 하는 절차가 있어요. 그 날 일기에다가 이렇게 쓰셨어요. 책에도 나와 있을 거에요. “의사도 아닌 것들이, 간호사도 아닌 것들이 아침에 들어와서 피 뽑고, 저울에 달고 저것들이 정성스럽게 저렇게 하는데 내가 아파도 아픈 시늉도 못하겠다.” 당시에 참 아프셨는데 내색 안하셨다는 게 돌아가신 다음에 책으로 나와서 알았어요. ‘아, 그렇게 괴로우셨는데......, 우리는 잘 참으셨나, 별로 안아프셨나’ 이랬는데 아프셨지만 참으셨더라고요. 그렇게 아프실 때도 아침에 일어나시면 바로 세수하시고 넥타이까지 매시고 계신 게 우리 아버님의 시작이에요.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명상을 하시는 거예요. “뭐하셔요?” 그러면, “기도하지.” “무슨 기도하셨어요?” 했더니 “기도할 거 많지.” 그렇게 기도하시면서 마지막에는 조용하게 당신 삶을 정리하셨어요. 처음에 한양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혼수상태가 자주 오니까 의사가 면회사절을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면회사절’이라고 병실 문에 써붙였어요. 모시고 나가서 운동하고 들어오는데 당신 방 앞에 면회사절이라고 써있는 걸 보시더니 깜짝 놀라시면서 “면회사절? 그럼 집에 가자. 내가 사람도 안 만나고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이러시면서 화를 내셔서, “아니 그게 아니고 조금 정리될 때까지만요. 그 대신 집에서 하시는 것처럼 여기서도 글을 쓰시고 하시는 걸 다하실 수 있게 해드릴 테니 그냥 계시라”고 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겨우 병원에 계속 모시게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병상에서 글도 쓰시고 그 때 마지막으로 함석헌 선생님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도 쓰셨어요. 병원에서 일도 많이 하셨고 ‘내가 마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땅에서의 마감에 대해 집중적으로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어떤 모습으로 내가 마감을 해야 하나.’ 혼수상태가 여러 번 반복될 때마다 정신을 안 잃으시려고 하는 의지를 보면서 참 정신력이 대단하시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인금란 : 김재준 목사님의 좌우명 열 가지를 책상 유리 밑에 끼워넣고 자주 보며 마음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해마다 여신도회 수첩에 넣어서 여신도 회원들에게도 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김재준 목사님의 정신을 기리고 이어가고 싶은데, 마지막으로 아드님이 교단이나 학교에 바라는 뜻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김관용 : 처음에 기장이 생겨날 때의 그 의미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게 많이 희석된 것 같아 좀 안타깝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면, 요즘 총회적으로도 어려움이 많다고 하고, 한신도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은데, 초심으로 돌아가서 서로 아끼면서 정말 작지만 꼭 해야 할 일들을, 다른 큰 교단이 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하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총회가 화합이 잘 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기장에 속한 교회들을 잘 후원해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교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데, 우리 기장까지 거기에 휩쓸려서는 안되지 않겠나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정성을 다해서 총회와 학교가 여기까지 왔는데, 학교의 문제들도 잘 해결되고 좋은 교육을 하는 한신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기장이 작지만, 이렇게 어려운 때에 서로 사랑으로 끌어주고, 기장 교회에 맡겨진 일들을 잘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인금란 : 참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교단이나 학교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또 이 시대에 교회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때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생각과 뜻으로 돌아가자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강조합니다. 저도 그런 존경할 만한 선생님들이 계시는 한신대학교였으면 좋겠고, 신학생들도 역사와 교회를 선도하는 그런 목회자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기장이 기장답게 가지 못할 때마다 저희는 항상 김재준 목사님을 떠올리면서 참 안타까워합니다. 이 장로님께서도 뭔가 바라는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말씀을 이미 해주셨지만, 그래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정희 : 그래도 한국교회 안에선 기장이 소망이고, 기장이 희망이에요. 우리 시작의 뿌리가 건강했고, 민족 역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어렵고 복잡하고 해도 하나님이 기장을 그루터기로 남겨서 이 민족 속에, 결국은 통일의 역사 속에 쓰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기장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인금란 : 아버지로서의 장공 선생님에 대한 여러 생활 속의 이야기들, 그리고 몰랐던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장공께서 기장 교단을 이끄신 뜻이 있으시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두신 뜻이 있으실 것인데, 어려운 시대지만, 저희들은 저희들 선 자리에서 두 분이 바라신 말씀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9호] 2014년 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