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空 회보

[회보 제20호] 특별기고 - “선생님(이우정)과 나” / 이문우 장로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7 17:08
조회
787

[제20호] 특별기고


“선생님과 나”


이문우 장로
(한신대 전 여동문회장)


* 이 원고는 지난 2014년 5월 29일에 제12주기 이우정 선생님 추모예배 추모사를 정리한 것입니다



처음 인연


제가 선생님과 처음 만난 것은 한신대학에서 교수와 학생으로입니다. 저는 2학년 편입생으로 한신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약학대학에 다니다가 도저히 학비를 조달할 수가 없어서 중도에 휴학을 하고 돈을 벌어서 다시 복학을 하려고 취직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어떤 계기가 와서 마음을 바꾸어 한신에 들어갈 결심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6.25 한국전쟁 때 일찍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의 농사로 5남매가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는 유교 학자셨고,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는 절에 다니셨고, 저 혼자서만 교회에 다니는 일세대 신앙인이었습니다. 아무도 제가 신학교에 간다는 것을 환영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는 대학엘 꼭 가고 싶은데, 한신대학에 가면 학비도 싸고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어서 간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의 향학열을 막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시고 묵인하셨습니다. 기숙사비를 낼 형편이 안 되어서 서울에 있는 친척집 여기저기로 거처를 옮기며 미아리에서 삼양동 산길을 걸어서 수유리 임마누엘 동산 한신을 1년을 다녔습니다. 기숙사에 살지 않으니까 교수님들과 가까이 접할 수 도 없었습니다.


이 선생님과 만나는 시간은 영어통독, 헬라어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여학생이 많지 않았으니까 어느 날 선생님이 저를 불러 이야기를 시켜보시고는 다음 학기부터는 우리 집에서 학교에 다녀라 하시더 라고요. 마침 선생님 조카인 이인기가 신학교에 들어와서 선생님 댁에서 있는데, 그 방을 같이 쓰면 된 다 하시면서...... 저는 체면을 차릴 형편이 안되니까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그냥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졸업 때까지 2년을 선생님 집에서 한 식구로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저의 신앙의 어머니가 되신 것 뿐 아니라 저를 양육해 주신 육신의 어머니의 역할을 해 주셨고 저의 삶의 인도자가 되셨습니다. (기숙사에 있는 여학생들에게는 ‘여당’으로 왕따를 당했던 것 같지만)


‘고난의 살벌한 시대’를 함께 하다


졸업 후 교회목회도 하고 결혼하고 남편 따라 이곳 저곳 다니다가 1968년도에 취직해야할 것 같아서 선생님께 말씀 드렸더니 인천에서 이국선 목사님이 산업선교를 하고 계셨는데, 가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당시 산업선교라는 단체는 군사정권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곳에서 4년 실무자로 일을 하면서 그 시대의 정치 현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는 셋째 막내를 낳고 집에서 얼마간 쉬고 있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요새는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안부를 물으시고는 애들을 키우며 쉬고 있다고 하니까 “쉬고 있을 수가 없다 나와서 나와 같이 일을 해야겠다” 하시더라고요. 선생님의 말씀은 다급해 보이기도 했고, 내게는 하나님 다음 가는 명령 같이 생각한 때라 거부할 수 있는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 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가 되어 선생님과 함께 1975년 5월부터 1985년 5월까지 11년을, 고난의 살벌한 시대를 함께 했습니다.


선생님은 1973년 5월부터 1977년 5월까지 4년 간 회장을 하셨고, 연이어 1977년부터 1980년 5월까지 4년은 공덕귀 선생님이 회장을 하셨는데 두 분이 회장과 인권위원장을 번갈아 하시면서 군사독재 정권의 가장 살벌한 시기를 보냈다고 생각됩니다. 사무실 앞에는 항상 서대문 경찰서의 정보부원이 감시를 하고 있으면서 드나드는 사람, 어떤 회의가 있는 지를 체크했습니다. 그리고 이우정과 공덕귀가 가는 곳은 정보부원이 항상 뒤쫓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두 분은 제가 혹시 다치기라도 할까 봐서 모든 일은 회장, 인권위원장에게 떠넘기고 “총무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라”하고 신경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민청학련 사건, 간첩 사건, 기자들 해고사건, 여성 근로자들과 대학생들의 데모 사건, 방화 사건 등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모든 사건들의 구속자 영치금이나 가족들을 돕는 일은 거의 교회여성연합회를 통해서 은밀하게 실행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구속자 영치금이나 가족돕기 헌금이 외국에서 많이 왔는데 선교사나 개인을 통해서 비밀리에 교회여성연합회로 들어 왔으니까요. 다른 개교단에서는 구속자를 돕는 일을 감히 할 수 없는 긴급조치 경계 속에 있었습니다. 1976년 3.1 구국선언문 사건에는 직접 선언문을 낭독하심으로 재판을 받으셨는데, 그 재판은 역사상 가장 삼엄한 경계 속에서 방청권을 배부한 살벌한 재판이었습니다. 이때 얻은 별명이 재판 내용을 그대로 전달한 탁월한 기억력으로 인해 ‘영구보존해야 할 컴퓨터’였습니다.


현재,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진보적인 여성단체들 중, 예를 들면 한국여신학자협의회는 1980년에 교회여성연합회의 여성신학 세미나가 선생님의 동기 부여를 통해 태동했고, 최근 여성 국회의원을 많이 배출시킨 한국여성단체연합은 1987년도에 진보적인 여성단체들의 강한 결집을 위해서 연합된 단체로 이우정 선생님이 초대회장을 하면서 결성이 되었으며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도 97년도에 통일을 갈망하면서 초대 수석대표를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시는 예지를 겸비한 분이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이우정 선생 고희기념 출판기념회에서]


그 모든 것은 깊은 신앙심으로부터


이런 일련의 선생님의 삶의 목표는 신앙에서 근거한 것이었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었고 고통 속에서 남녀차별적인 삶을 사는 여성들을 일깨우고 싶은 일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선생님은 하나님을 믿는 깊은 신앙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에 근거를 두고 약자에 대한 배려, 양심에 따라 욕심 없이 자기를 주는 삶, 정의감으로 생을 살아온 분이셨습니다. 특별히 여성의 인간적인 삶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고난당하는 근로여성의 많은 사건에는 몸을 사리지 않으셨습니다. 다행히, 엘리야 선지자 같은 선생님에게는 그를 믿고 따르는 그루터기들이 주변에서 함께 했습니다. 그들 이 버팀목이 되어주었기에 선생님도 힘을 쓸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선생님에 대해 덜 부각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선생님은 인권문제, 사회문제에만 깊은 관심이 있는 것 으로 오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오해로 선생님은 교회여성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한국교회 안에서 몸소 당면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제도나 성경이 남녀 차별적인 것 때문에 교회여성들의 의식이 낙후되어 있다고 인지를 해서 교회제도의 평등을 위한 개선은 물론, 교회여성 의식화교육이라는 차원에서 ‘여성의 눈으로 성경읽기’ 교육을 처음 초교파적으로 교회여성연합회에서 그 치열한 민주화의 투쟁 속에서도 78년도에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차 교육은, 구약성경은 아주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감신대 민영진 교수, 신약성경은 이우정 선생님이 주 1회씩 12회를 걸쳐서 강의를 했습니다. ‘여성신학적 성서연구’는 교회여성들의 눈을 뜨게 했고, 그 인기는 폭발적이었다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교육은 교회여성들의 열망에 따라 83년까지 4회에 걸쳐 했는데, 박준서, 장상, 손승희 같은 진보적 여성신학적 성향을 갖고 계신교수들이 강사로 초빙되었습니다.


그녀의 곁에서 고맙고 행복했습니다


여신학자협의회도 이런 여성신학 교육의 일환으로 1979년도에 신학을 졸업한 여성들을 초교파적으로 초청하여 70여명이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교회의 민주화’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한 후에 참가자들의 요청에 의해 결성되어진 열매입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그 작은 체구에, 많은 일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저는 11년을 교회여성연합회 총무로서 아주 측근에서 선생님과 함께 일을 했고, 그 후 다른 직 장에서 일을 해도 개인적으로는 딸과 같은 심정으로 측근에 있었습니다.


[이우정 선생님과 나, 오른쪽은 교회여성연합회 후임이었던 윤영애 총무]


김재준 목사님이 캐나다에서 오셔서 수유리에 계실 때도, 정월 초하루 세배는 꼭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전날 어데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공덕귀 선생님 댁에 먼저 들려 세배를 하고 김목사님 댁으로 갔습니다. 93년도 국회의원 하실 때, 캐나다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실 때도 한송죽 언니와 같이 가시면서 “너도 같이 가자” 하시더라고요. 제가 항공료 때문에 머뭇거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코노미 티켓을 준비하셨는데 국회의원 수행이라고 처음으로 비지니스 석에 앉아도 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선생님을 모셨다고 했지만 제가 선생님의 그늘에서 사랑과 인정을 많이 받았고 고맙고 행복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고 그 많은 수난을 견디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간 것 같이 그렇게도 열심히 마지막 여생을 통일 운동에 헌신하셨는데, 애타게 염원하던 통일을 못 보고 가신 것이 못내 안타깝게 생각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 먼저 가신 사랑하는 가족들, 은사님들과 동지들을 만나서 기쁘게 지내실 것을 믿습니다.


[김재준 목사님과 이우정 선생님]


김재준이 세상을 뜬 후 이우정은 김재준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선생님은 자연 속의 한 그루 거목과 같으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지 잎이 무성하여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 그늘에서 쉬고 갈 수 있게 해주신 분이시다. 그분의 외모는 별로 위풍당당한 데가 없다. 오히려 초라한 편이다. 물질적으로 별로 여유 있는 생활을 못하신 그분은 옷차림도 초라한 편에 속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분의 인품과 마음은 항상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계셨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억지로 붙잡지 않는 유연함이 있으셨다.”


그렇게 흠모하면서 물들어간 것일까. 사람들은 지금 이우정이 스승에 대해 쓴 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이우정을 기억한다. - 이문숙, 『이우정 평전』, 84쪽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0호] 2014년 9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