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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19호] 장공 다시 읽기 - 인간혁명(요한복음 3:1-8)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07 16:18
조회
623

[제19호] 장공 다시 읽기

인간혁명
요한복음 3:1-8

이 글은 [장공전집] 1권, 324쪽에서 발췌했습니다.

요새 혁명이란 말은 시대적 용어요, 특히 청년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혁명이란 말이 새 말인 것은 아닙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있어 온 말입니다.

죄인들로 구성된 인간사회니만큼 언제나 화산맥 위에 춤추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시 안정되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어떤 폭발점에 이르면 지구는 울화를 터뜨려 용암을 분출합니다.

이 세상 임금들은 폭력으로 자기 과오와 악덕을 덮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기간 지나면 반항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혁명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새로운 등장인물은 또 하나의 폭력자로서 의복만 갈아입는 것 뿐입니다. 혁명은 끝날 사이가 없습니다.

혁명에는 종말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사회는 더 개량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심판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악마의 힘이 곁들입니다. 파괴, 복수, 분풀이 등으로 ‘불바다’를 연출합니다. 일시적이지만 승리의 기쁨이 환호합니다.

혁명은 자유의 깃발 아래서 행진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유대신에 ‘운명’이 이를 구속합니다. 사람들은 우상숭배에서, 폭군정치에서, 귀족정치에서, 유산계급에서 자유함을 얻고자 혁명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새 시대의 배우라는 새 계급, 새 우상이 그들을 사로잡아 여전히 종으로 써먹습니다.

혁명은 사회의 발전이란 슬로건에 심취합니다. 유토피아가 문 밖에 기다린다고 믿습니다.

혁명운동의 방법은 점진적이 아니라 돌발적입니다. 중용의 길이 아니라 극단적입니다. 죄의 과거는 죽여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 죽음 속에서 새것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 속에서 나오는 ‘새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악마의 재등장입니다. 한 귀신 내쫓고 일곱 귀신 모시는 격입니다. 혁명의 비극입니다.

혁명을 도덕적,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은 너무 순진합니다. 혁명이란 그 발단에 있어서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입니다. 그런 것을 가장한 폭력입니다.

혁명은 복수심의 아들입니다. 과거의 누적된 증오감정 없이는 혁명이 안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미워할 적을 제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원수라는 신화에 붙잡혀서 미친 자가 됩니다.

혁명은 공포의 친구입니다. 공포는 권력과 함께 자랍니다. 혁명가가 집권자로 되면 그 날부터 공포가 정치화합니다.

그는 자기 권좌 옆에 두 갈래의 패거리를 둡니다. 그 하나는 언제나 ‘적’입니다. 반집권, 반혁명이 그 한 켠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조건 충성파입니다. 그 후자를 시켜 전자를 칩니다. 숙청, 고문, 단두대 등 공포정치의 집행자로 씁니다. 그러나 그 후자의 운명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람은 나와 나 아닌 I and not-I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not-I는 ‘적’입니다.

혁명운동 진행 중의혁명가들은 자유를 위한 희생정신과 의용심에 불타는 지사요,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한 다음에는 그 때까지의 혁명동지들에게 잔인하고 가혹한 숙청을 감행합니다.

그러므로 혁명의 공포는 그 시작보다 그 종말이 더 중요합니다. 혁명은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성공은 폭력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폭력은 반항자를 상정합니다. 그러므로 폭력의 승리는 부단의 반항자 악몽에 떱니다. 그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미친 탄압에 의존합니다.

혁명은 시간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현재는 없습니다. 과거는 미움의 대상으로 없애버려야 합니다. 미래는 행복, 자유, 평등, 화평, 공의의 낙원입니다. 그들의 심리는 이 과거에서 당장에 미래 낙원에로 도약합니다. 현재는 실재가 아니라 실재를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에서 하는 모든 것은 아무 책임질 것도 없습니다. 방화, 학살, 허위, 이간, 증오, 살부모, 살선배. 모든 것은 비실재요, 미래의 영광에 포섭될 것입니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윤리로 본다면 수단이 목적보다 더 중요합니다. 현재의 생활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신성하고 책임적인 특권입니다. 현재의 사닥다리를 한 계단, 한 계단 걸어간 생활기록이 악덕으로 되어있다면 그에게는 미래의 희망이 없습니다. 폭행은 결코 자유에의 길이 아닙니다. 증오가 형제사랑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물상화한 세계에서는 목적과 수단을 분리시킬 수 있으나 주격의 세계에서는 구분은 있어도 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혁명은 ‘새 사람’을 만들어낸다고 선언합니다. 사실 새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새 실존을 만든다는 것이어서 새 사회를 만든다는 것보다 비교도 안될 어려움입니다.

혁명이 성공한 후에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old Adam이었습니다. 제 욕심에 썩는 인간군산이었습니다. 혁명이나 반혁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새 사람이란 것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회구조의 산물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난 인간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새 사회’도 그러합니다. 하늘나라가 땅에 입하는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회구조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는 장막이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제3의 차원이 필요합니다. 역사적 혁명은 이것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운명적으로 제2차원 밖에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인간, 위로부터 다시 난 인간에게 있어서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탄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있기 전에는 온갖 혁명의 나이트메어(Nightmare)는 또 한 페이지 피의 비극을 재연할 것 뿐인가 합니다.

수평선적이 아니고 수직선적인 혁명은 기적을 요합니다. 이 혁명은 폭력으로가 아니고 사랑으로 진행됩니다. 기만과 압박으로가 아니라 정의와 자유로 되어집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느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19호] 2014년 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