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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22호] 특별대담 - “장공의 북미주 10년을 말하다” / 김경재, 이행우, 정지석, 나핵집, 김관용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1 11:27
조회
819

[제22호] 특별대담

“장공의 북미주 10년을 말하다”
- 장공의 조국 민주화 운동과 평화 운동

사회 : 김경재 본회 이사장(한신대 명예교수)
참여 : 이행우 선생(평화운동가), 정지석 목사(국경선 평화학교 대표),
나핵집 목사(열림교회 담임, 기장평화공동체운동본부 공동의장),
김관용 장로(본회 이사, 장공의 막내 아드님)

김경재 : 오늘 대담의 목적은 첫째로 그간 제대로 잘 알려지지 않아 공백처럼 되어있는 장공의 북미 체류 10년간(1974년~1983년)에 대해 구체적인 말씀을 나누어 알리는 것이고, 둘째는 민주화와 인권운동, 그리고 평화통일에 있어서 장공의 뜻을 어떻게 이어나갈지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참석 하신 분들 모두에게 귀한 시간 내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장공선생님께서 출국을 결행하시게 된 그 당시 상황을 김관용 장로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잠시’라고 가신 것이 10년

김관용 : 저희 아버지께서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것은 한일굴욕회담에서부터입니다. 그 이후에 1969년 7월에 3선개헌반대 투쟁위원장을 맡고부터 정부의 감시가 심해져서 집을 찾아오기도 하고 골목으로 아침저녁으로 짚차가 서있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외출하실 때도 항상 감시했고 목욕탕까지 따라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아버님은 크게 개의치 않으시고 외부활동도 열심히 하셨는데, 그런데 한번은 제자였던 은명기 목사님의 재판을 방청하러 가시려고 새벽같이 나가시다가 그 사람들에게 제지를 당해 못가시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 분인데 제자가 억울하게 재판받는 장소도 못하게 된 것을 굉장히 서운해하고 힘들어 하셨습니다. 아마 그때 캐나다로 가실 마음을 먹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마침 유럽에서 YMCA 총회가 있어서 대한일보 김근우 선생님과 같이 동행해서 나가셨는데, 그 길로 캐나다에 가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셔서 캐나다에 먼저 가 계신 상태였구요. 그때까지만 해도 2개월 정도의 여정으로 생각하셨는데, 상황이 달라지면서 계속 차일피일 미루신 것이 근 10년 가까이 계시게 되었지요.

김경재 : 결국 ‘잠시’라고 가신 것이 국내 상황과 맞물려 돌아오시지 못하고 10년의 유랑생활을 하시게 된 거군요. 이행우 선생님은 그 비슷한 시기에 북미주에서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장공하고 직접 한 것이 없어도 그쪽 분위기를 잘 아시죠? 7, 80년대에 그 쪽 분위기가 어땠는지요?

이행우 : 저는 68년에 처음 미국에 갔습니다. 거기서 공부를 하고 힘이 들어서 거기서 직접 민주화운동을 하거나 할 수 있는 처지는 안됐습니다. 그리고 12년 후에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 때 5월에 광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함 선생님께서 이번에 (미국에) 가서는 좌우가 힘을 합쳐서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하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나갔습니다. 저는 돌아가서는 광주의 일을 알렸지요. 그 당시 미주에서의 민주화 인권운동, 평화운동에 장공께서 중심에 계셔 주셨습니다. 국내에서도 장공과 많은 상의를 했던 것으로 압니다. 장공께서 73년에 오셨고, 그분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조금씩 활동하던 분들이 뭉친겁니다. 토론토는 미국쪽에서도 같은 북미로 생각하니까, 73년에 기독교를 중심으로 해서 만든 단체들이 있었는데 전부 장공 선생님이 위원장이셨습니다.

신학적, 신앙적 고백과 실체 위에서

김경재 : 장공의 북미주 활동을 일탈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공의 소신과 글을 보면 북미주에서의 민주화운동과 평화운동이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의 행위였다 생각이 듭니다. 평화운동에 헌신하시고 평화 신학을 말씀하시는 나핵집 목사님, 정지석 목사님 두 분은 장공 신학의 어떤 부분이 그러한 일에 헌신하게 했다고 보시는지요?

나핵집 : 1972년도 7ㆍ4공동성명 이후에 남과 북이 3원칙을 세우면서 합의했지만, 그 직후에는 서로의 체제를 강고히 하기 위한 길로 갑니다. 민주화는 요원해 보이고 압박이 오는 상황에서 출국을 하셨지요. 이념적으로 편승해서 장공 선생님께서 무슨 일을 하신 것이 아니고 생명, 평화, 정의라고 하는 신앙적, 신학적 실체 위에서 한국 민주화를 위한 세계협의회를 조직해내시고 민족대단결의 원리, 인간존엄성의 원리, 화해의 원리, 실존적 책임성의 결단의 원리, 이 4가지 신학적인 바탕에서 이런 운동을 하신 것이지요.

정지석 : 제 생각에 장공선생님께서 역사참여를 하게 된 배경에는 그 분의 인간애, 이것이 처음이고 끝이 아닌가 합니다. 신학사상도 그 바탕에서 펼쳐나가신 것을 봅니다. 그분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재로서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인간의 그런 자유를 속박할 수 없다는 천부적 자유 인권에 대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런 분으로서는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억압받고 탄압받는 젊은이들, 제자들을 보는 것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으리라 생각됩니다.

김경재 : 사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했지만, 방금 말씀하신 그 점은 원리이면서도 가장 놓치기 쉬운 면이 아닌가 합니다. 장공의 모든 활동, 신학, 투쟁과 새로운 신학운동에 있어서도 사실 그 근본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인간성이라는데 있다는 것을 우리 후학들이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장공이 발간한 민주화, 인권 운동 소식지들]

시대와 사람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김경재 : 그런데, 그렇게 계획되지 않은 상태에서 캐나다에 가셨는데 10년을 계시는 동안에 생활을 어떻게 하셨는지요?

김관용 : 아무래도 어려움이 많이 있었지요.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민주화 운동에의 ‘참여’를 굉장히 중요시 여기셨고, 힘든 가운데서도 많이 노력하셨고 옆에서 가족들이 많이 도왔습니다. 나중에 박봉랑 목사님께 듣기로는 이상철 목사님 통해서 사무실도 얻고 하셨는데, 가보니 너무 작은 공간이어서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났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만큼 형편은 계속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김경재 : 어느 곳에서 제대로 된 재정적 후원 없이도 장공은 꿋꿋하게 국내의 민주화 운동, 평화운동에 투신하셨던 것 같습니다. 캐나다에서 복간한 <제3일>지도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60호까지 내시면서 많은 영향력을 미치셨고요. 그러한 고생들을 가족분들이 함께 하셨지요.

다른 한편으로 장공 선생님은 캐나다에서 본인으로서는 최선의 삶을 살면서도, 고국의 제자들과 젊은이들이 고생하는 이야기를 자꾸 들으니까 마음의 짐을 늘 갖고 사셨던 것 같습니다. 광주항쟁이 터졌을 때의 일화는 지금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소식을 들은 날, 밤 12시가 넘어서도 시내로부터 떨어진 외곽에 있는 댁에 돌아오시지를 않아서 자제분인 김경용 장로님이 실종신고를 해야 하나 하면서 발을 동동거리며 있었는데 1시가 거의 다 돼서 눈사람처럼 눈을 머리에 이만큼 이고 노인이 들어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족들이 걱정하게 이렇게 늦게까지 돌아다니십니까”고 하니까 조용히 “광주 애들이 생각나서 그랬다” 그러시면서 그냥 샤워실로 들어가시더라는 겁니다. 그날 밤의 그 대화가 저는 모든 장공의 마음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광주에서 학살당한 젊은이들을 생각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눈 오는 길을 걸어오셨던 거지요.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젊은이들이 희생당했다고 하는 책임감이셨겠지요. 어떤 이론적인 신학이 아니라 이런 예민한 감수성을 우리 후학들이 이어받아야 하겠지요.

실천적 평화운동가

김경재 : 운동을 하는 그 속에서 장공선생님은 사회주의네 자본주의네 하는 이데올로기에 사람을 고정시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확실했던 것 같은데, 그 점은 우리가 평화통일운동을 하는 데도 똑같이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지석 : 저도 책을 읽으면서 장공 선생님이 일하시는 스타일, 운동을 해가시는 모습을 많이 생각했는데, 장공 선생님의 스타일에 이름을 붙이자면 ‘실천적 평화운동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에 초점을 두고, 그 다음에 이념이나 사상을 생각하는 그런 분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장공 선생님이 캐나다의 친북 인사들을 대하신 것을 보면 당신하고 맞지 않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도 그분들과의 만남도 자유롭게 가지시면서, 그러나 당신의 입장을 그분들한테 분명하게 전달하셨지요. 당신의 원칙은 사람을 대하고 그런 데에서는 상당히 자유롭고 폭넓게 대하셨습니다.

김경재 : 장공의 생활십훈 속에 보면 모든 일처리를 하되 민주적 절차를 밟아서 한다는 것을 당신이 실천하신 것 같아요. 북미생활을 하실 때도 단지 장공의 덕이 높아 어른으로 명분상 모신 것이 아니라, 그 엉클어지고 복잡다단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민주적인 절차대로 잘 해나가시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분단극복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 등에 대해서는 장공은 어떻게 생각하셨으며 지금 평화통일 운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나핵집 : 장공 선생님은 역사참여 신학을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한편으론 역사에 몰입해서 거기에 붙들려서 내몰리는 형식은 또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분단체제를 흔들어가는 것이 종교가 이념의 굴레를 뛰어넘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장공선생님의 사상은 남북통일이라고 하는 지엽적인 문제보다 조금 더 거시적으로 인류의 평화 차원에서 관심이 크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상을 받아들여서 남, 북만의 지엽적인 문제로만 보지 않고 동북아 지역 전체를 평화적인 공동체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존엄은 하나님도 안건드린다

정지석 : 장공 선생님의 통일 사상은 인간 중심의 통일론입니다.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체제의 전력을 짜기 전에 인간부터 재발견해야 한다고 하시거든요. 요즘 젊은 세대들, 한국전쟁을 겪지 못한 이후의 세대들은 우리가 통일을 왜 해야 하냐는 질문 자체에 봉착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장공 선생님의 말씀이 해답이 됩니다. 7천만 한반도가 인간답게 살려면 통일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장공 선생님에 의하면, 분단 상황에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지요. 이건 한반도의 인권선언과도 같습니다.

나핵집 : 장공 선생님은 인간의 존엄은 하나님도 안건드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존엄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꿰뚫는 것이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이고, 그것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생명, 평화, 정의라고 하는 글귀라고 생각합니다. 장공 선생님이 꿰뚫어 보시는 것은 단순히 한반도에서의 문제만은 아니고 전세계 공동체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될 가치인 것이지요.

김경재 :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장로님께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장공 선생님이 십년 동안 계시면서 캐나다 시민권을 받으셨는데, 돌아오실 때는 어찌하셨는지요?

김관용 : 캐나다에 계시면서도 아버님은 끊임없이 돌아오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귀국하면 핍박 받을 것이 뻔하니까 일종의 보호 장치로 아버님께 캐나다 시민권을 받으시길 끊임없이 가족들이 설득했고, 결국 받게 되셨습니다. 그렇지만 귀국하시고 난 뒤 아버님은 곧바로 캐나다 시민권을 반납하셨습니다. 이중국적이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아버님은 끊임없이 조국 땅에 마음을 두고 계셨고 그래서인지 오시자마자 저를 통해 캐나다 대사관에 시민권 취소 신청을 넣으셨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조심하시면서 삶의 신학과 신앙을 지켜가려고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와 ‘제3일’의 소망

김경재 : 저는 요즘 굉장히 절망적입니다. 대화, 인정, 교류는 그만두고라도 ‘현실’을 핑계로, 여전히 폭력적 안보와 흡수통일의 논리를 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장공의 제자로서 뭐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해방 70주년이 되는 오늘, 장공의 사상을 토대로 한반도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떤 목소리와 발걸음을 낼 수 있을지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첨언하시면서 오늘 대담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핵집 : 작년 장공기념강연회 때 한완상 박사께서 지적하셨던 것처럼 장공사상의 핵심을 성서적으로 말하면 결국 ‘인카네이션’이라는 성육신 신학과 ‘케노시스’라는 자기 비움의 신학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정점을 통해 ‘제3일의 신학’의 부활의 소망을 담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마음으로 평화를 실현하고 살아내려는 우리의 여러 가지 노력들을 포기하지 않고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역사의 죄를 뒤집어 쓰는 ‘십자가 사건’을 겪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을 통해 부활의 승리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공선생님께서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실제로 죽지 않고는 새로운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정지석 : 저는 장공 선생님과 함석선 선생님을 비교하며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이 이상적이라면, 장공 선생님의 사상은 땅으로부터 출발하는 사상으로 굉장히 현실적인 역사적 실천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런 실천 속에서 신앙을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가 고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7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사상은 어찌 보면 하나의 도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장공 사상의 역설과 도약이 한반도 역사 상황 속에서 장공의 삶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진리를 택하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분열과 적대 속에서 결국 소망, 성령의 도움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수직적 은총 속에서 소망을 발견하셨던 것이겠지요. 50세 이후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고민하는 저도 결국은 장공의 길을 따를 것 같습니다.

이행우 : 제가 김재준 목사님, 함석헌 선생님 두 분께 배운 것은 공동적으로 당신들의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마음을 비우고, 둘째로 당신들의 믿음을 삶으로 사셨던 그것을 저도 따르고 싶고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관용 : 김경재 목사님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에 저도 동의하고 아마 하늘에 계신 아버님도 그러시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열가지 좌우명 중 하나인 “제자에 대해 실망하지 않는다”, 또 적극적으로 “버려진 물건, 버려진 사람에게서 쓸모를 찾는다”라는 그 마음으로 힘든 시대 속에서도 사람에 대해 희망을 잃지 말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경재 : 이렇게 조금이나마 장공께서 방랑자처럼 사셨더 북미주 10년을 조명하고, 그 뜻 속에서 지금 이 시대와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앞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함께 대담에 참여해주신 네 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핵심처럼 짚어주신 장공의 삶과 사상의 의미들을 잘 되새기고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2호] 2015년 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