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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22호] 권두언 - ‘제1부 장공(長空)은 이렇게 살았다’에 더하기 / 김상근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1 10:12
조회
668

[제22호] 권두언

1부 장공(長空)은 이렇게 살았다에 더하기

김상근 목사
(장공기념사업회 이사, 6ㆍ15 공동선언실천 남측 명예대표)


책을 받자마자 ‘제1부 장공(長空)은 이렇게 살았다’를 서둘러 읽었습니다. 참 잘 썼습니다. 장공의 생애를 어느 만큼은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미처 알지 못했던 장공의 삶들을 만날 수 있어 새로웠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170여 쪽이니 적은 양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어른의 삶을 좀 더 많이 전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어른의 87년 생애는 남달리 깊고 훨씬 넓은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것을 모조리 기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번 같은 큰 작업을 또 누가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만이 알고 있는 장공의 이런저런 삶을 거기에 덧붙이고 또 덧붙이면 그런대로 그 크고 깊은 삶이 얼마만큼은 옹글게 드러나지 않을까. 하여 저부터 두어 가지를 더해 보려고 합니다.

기장은 한국교회라는 화살의 촉이다

“기장은 한국교회라는 화살의 촉이다”라는 경구가 장공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밝혀 이미 출간된 책에 더하고자 합니다.

제가 어딘가에 그 출처를 이미 밝혔습니다. 이 경구는 기장에서 널리 쓰고 있는 하나의 상용어로 되었습니다. 그 경구, 장공의 가르침입니다.

제가 기장 총회총무로 선임 받았던 1982년에 장공은 캐나다에 체류하고 계셨습니다. 총무로 일하게 되었다는 서신을 드렸지 않았겠습니까. 즉시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기장 총회총무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과 사명감, 한국교회와 사회 그리고 세계교회에서의 기장의 중요성을 길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서신에 “기장은 한국교회라는 화살의 촉이다”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상용하는 그 경구는 장공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편지를 분실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잃어버린 겁니다. 저의 부실함입니다.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기장은 큰 교단이 아닙니다. 기장이 어떤 변수에 의해 갑자기 대형 교단이 될 리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교단의 크기에 매어 있지 않습니다. 뉘라서 자기 교회가 커지는 것을 싫다 할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기장 교단이 성장하는 것을 뉘라서 싫다 할 것입니까.

그러나 한 교회, 한 교단의 존재이유가 성장에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분명한 고백이지 않습니까. 감당해야 할 몫이 존재이유라고 우리는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존재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자문하기를 중단하지 않는 것, 우리 기장의 특성이지 않습니까.

“기장은 한국교회라는 화살의 촉이다.” 이것, 기장의 존재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이 가르침을 이어 이어 마음에 깊이 담아야 합니다. 세상풍토, 아니 만연해 있는 ‘교회풍토’를 분별없이 따라 산다면 화살의 촉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화살의 촉이다’라고 말한다 하여 화살촉이 되는 게 아니지요. 자신을 그리 만드는 부단한 담금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답지 않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교회풍토를 거부하는 단호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풍토에도 미치지 못하는 교회풍토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성찰하고 혁신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지금 일하시고 계시는 그 구속사의 현장에 정확하게 날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구속사를 과녁으로 삼아 달려가야 합니다.

기장은 그랬습니다. 기장은 과녁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어느새 한국교회가 화살촉의 궤적을 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랑합니다. 자랑함은 자랑하는 그의 고백입니다. 선언입니다. 이것이 기장다움입니다.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을 너나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제 기장이 먼저 고백하고 선언해야 합니다. “이것, 아니다! 저것이다!” 그리고 선언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고백대로 살아야 합니다. 힘들어도 그리해야 화살촉입니다. 한국장로교 나이 100살이 됩니다. 100살이면 늙은 것이지요. 그러나 기력을 다시 찾아 청년처럼 선언합시다. “이것, 아니다! 저것이다!” 그리고 새 교회를 이룩해 냅시다.

기장을 화살촉이라 하신 것은 교파주의나 우월주의가 아닙니다. 혼자 뽐내 달려 나가자는 것 아닙니다. 화살촉은 화살의 몸통과 함께 있다는 가르침을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몸통 없는 촉은 촉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촉과 몸통, 그것은 하나의 화살입니다. 기장은 한국교회를 한 단위로 가슴에 담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장공의 가르침입니다.

성령의 구속사를 따라 선택하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를 더 더하려고 합니다. 선택의 연속이 장공의 삶이었다는 것을 밝혀 이미 출간된 책에 더하고자 합니다.

1986년 가을이었습니다. 장공께서 부르셔서 수유리 댁으로 찾아뵈었습니다. 병상에 누워 계실 때였습니다.

병상에 누우신 장공, 교단을 생각하셨을 것이고, 한신대학을 생각하셨을 것이고, 머지않아 남기고 갈 가족들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 제자, 저 제자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걸어온 일생을 되짚어 여러 일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머리맡에 앉자마자 직선제가 되면 누굴 대통령으로 밀거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저는 즉답을 피하고 선생님의 뜻을 여쭈었습니다. 머뭇거림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직선제가 되어 선거에 임하게 되면 아무개가 대통령이 되도록 해!” 이 말씀을 하시려고 저를 부르셨던 겁니다.

마침 대통령직선제 투쟁이 한창이었습니다. 군부집권세력이 체육관선거를 고집하고 있지만 장공은 머지않아 직선제를 쟁취할 것이라고 믿고 계셨던 겁니다. 신앙적 직관이었겠지요. 그리 되었을 때 이 나라가 취해야 할 선택을 장공은 벌써 하신 겁니다. 저는 장공의 뜻을 단순하게 받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에 담긴 많은 함의를 주석하고 또 주석했습니다.

목사는 이런 정치적 선택을 모호하게 하는 것을 좋은 덕목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옳은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교회 담임목사가 자기 교회에서 정치적 선택을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그 교회의 신앙고백에 따라 모두가 일치를 이룬 경우는 다르겠지요. 이해관계를 따져 선거운동원을 자임하는 것을 신앙자의 선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시대를 읽고 진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평소의 삶이 가벼워서는 교인들이 목사의 선택의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장공은 모호함을 거부했습니다. 이건지 저건지 아리송한 태도를 거부했습니다. 바름에 그랬고, 선택에도 그랬습니다. 민주주의는 선택이지요. 이것과 저것 중에 선택하는 것, 이 후보와 저 후보 중에 선택하는 것, 그 선택으로 세상을 바꾸고, 세상을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고백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신앙은 구체적입니다. 신앙은 선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장공은 선택을 해야 할 때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위 대목은 2001년에 출간한 『장공이야기』(267쪽)에 제가 이미 쓴 대목입니다. 그 글에는 지목하신 그를 ‘아무개’라 표기했습니다. 그 아무개는 후광이었습니다. 후광이 대통령이었던 때에 쓴 글이어서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선택은 신앙고백적 선택

저는 장공에게 배웠습니다. 성령의 구속사를 따라 선택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저는 증언하고자 합니다. 장공의 후광 선택은 사적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신의 신앙고백적 선택이었다는 것을. 장공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 나라가 위중합니다. 민중의 삶은 고달파지기만 합니다. 민족의 협력과 평화는 간두에 내몰려 있습니다. 나라의 자주는 부끄러워 무슨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여기서, 저기서 무너지고 손상당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협력과 평화는 간두에 내몰려 있습니다. 나라의 자주는 부끄러워 무슨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내 나라 영토에 또 하나의 군사기지를 물색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어도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넘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동맹국 사이라 하더라도 내 영토를 이리저리 더듬고 다녀도 불쾌함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이, 아니 우리 국민들도, 아, 중국과 미국 사이에 끼게 된 우리, 어찌해야 할 것인가? 장공이 살아 계신다면 어찌할까? 장공은 살아있지 않습니까. 우리 혼 가운데!

저는 중립에 자리를 잡지 않겠습니다. 화살의 촉처럼 과녁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가자! 애써 장공을 닮아 살려 합니다.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진실하게 편파하려 합니다. 그것이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이리라. 우리 모두 함께 장공의 삶을 배워 삽시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2호] 2015년 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