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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23호] 장공 다시 읽기 - “때밀어주는 분”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1 14:37
조회
649

[제23호] 장공 다시 읽기

“때밀어주는 분”

☞ 기장 회보 1984년 9월호 장공칼럼에서

나는 해외에 오래 체류하는 동안, 본국의 공동목욕탕을 그리워했다.

아침 식전에나 저녁 고즈넉한 시간에 공동목욕탕에 들어가면은 우선 윤기 도는 후끈한 기류가 몸덩이를 감싸준다. 집안에 화기(和氣)가 가득하다. 두 벌 세 벌, 몸에 씌웠던 거추장스런 옷가지들을 한 벌, 두 벌 벗기고 홀랑 알몸이 된다. 해방감이랄까, 자유감이랄까? 어쨌든 개운한 기분이 된다. 수증기가 이엄이엄 치솟는 데 빠져나갈 출구는 없다. 겹치고 덮쳐서 배부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목욕탕 물은 그리 깨끗하달 수 없겠다. 그러나 목욕탕안 벽들이 파랑색이고 ‘떠도리’ 때는 조리로 건졌기에 아주 더럽거나 묵은 물 같지는 않다. 아낌없이 더운 물을 퍼내어 알몸에 끼얹는다. 싸늘한 몸이 훈훈해질 때가지 마구 퍼붓는다. 머리에도, 낯에도 용서없이 끼얹는다. 그리고서는 탕 안에 들어앉는다. 체온 이상이지만 못 견디게 따갑지는 않다.

턱밑까지 잠그고 앉아 있노라면 몸뚱이가 온통 녹아 증기 타고 떠올라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다. 아편쟁이가 아편 먹은 때의 ‘몽환경’도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해본다. 땀이 나고 숨이 가빠진다. 가벼운 몸이라, 앉은대로 떠오르려 한다. 두 팔로 여가리를 붙잡고 오래 앉아 있다. 그 맛이 좋아서 공동탕에 가는 것이니 스스로도 나무랄 생각이 없다. 결국 나온다. 대기하고 있던 때밀어주는 분이 특제형 의자에 앉힌다.

그는 내 때를 밀어주는 분이다. 그 표정이 담담하고 겸손하다. 세수수건을 손에 감아갖고 내 때를 밀기 시작한다. 나는 특정형의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내 손을 자기 손바닥에 단단히 잡고 팔을 이리 뒤지고 저리 뒤지고 하며 때를 민다. 그렇게 정성스러울 수 없겠다. 뒷잔등, 앞가슴, 옆구리, 새채기, 다리 할 것 없이 돌아가며 한 거풀 벗긴다. 두 주일만의 목욕인데 때가 그렇게까지 달라붙었나 하고 혼자 놀라기도 한다.

그는 나를 세워놓고 다시 한 번 전체를 문지른다. 그리고서 수건에 비누를 잔뜩 칠해가지고 전신을 비누로 닦는다.

“이젠 다 됐습니다. 샤워하고 말끔하게 비누를 닦으십시오.” 한다.

나는 감사하고 또 감격한다. 자기 때도 아닌 남의 때를 더럽다 하지 않고 그렇게 담담하게 정성스레 밀어 준다는 것은 놀라운 봉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그에게 돈 천오백 원 드렸다 하더라도 그건 대가(代價)도, 임금도 아니다. 그건 그에게 드리는 감사의 작은 선물에 불과하다. 청계천 빈민 부락에서나 땅속 하수도 굴속에서 오물처리에 종일 분주한 분들의 봉사는 우리로서는 발벗고도 못 따라갈 섬김이라 하겠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부끄러울 뿐이다. 강원도 석탄광 속에서 왠종일 돌탄 바위를 곡괭이질하는 탄광 노무자들의 새까만 얼굴들은 우리 얼굴의 때를 대신하는 얼굴들이다. 그러다가 받침나무와 받침천정이 와르르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들은 곡괭이 들고 생매장이다. 그 목숨은 우리를 대신한 목숨이 아닐까!

제각기 자기 분야에서 일하는 분업인데 남의 분야에서 생기는 일에 그렇게 관심할 건 무어냐? “Do your own business.” “네 일이나 해라!” 하는 분이 대다수인 것 같기도 하지만, ‘분업’이란 것은 “내가 할 일을 네가 나누어 해준다” 하는 쉐어링(Sharing)의 안목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분업’이란 것은 “그 사람이 아니면 나도 일이 안 된다”는 시스템이다. 어느 한 부분이 안되면 제품이 완성되지 못한다. 완성되지 않은 제품은 시장에 내놓을 수 없다. 분업은 ‘협동’이요, ‘분리’가 아니다.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한 몸의 지체라 하겠 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해당한다.

존 웨슬레는 자기 집 벽에 바를 벽지를 사가지고 왔다가 통곡했다고 한다.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는 굶주린 내 형제들의 일용할 양식을 가로채서 이 벽지를 사온 셈이니 나는 화있을지라!” 하며 울었다는 것이다. 때미는 분에게서, 지하에서 오물 처리하는 분들에게서, 탄광 속에서 곡괭이질 하는 분들에게서, 빈민부락의 판자집 식구들에게서, 내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음씨가 그리워진다. 이 마음이 예수님 마음이기 때문이다. (空)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3호] 2015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