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空 회보

[회보 제24호] 장공 다시 읽기 - 교회의 사명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1 16:02
조회
405

[제24호] 장공 다시 읽기


교회의 사명


* 이 글은 1986년 11월 9일 장공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약 두 달 전에 잠시 퇴원하셨을 적에, 천호동 교회의 새성전 입당예배 때의 설교 음성을 녹취한 것입니다. 아마도 장공 목사님의 살아생전 가장 마지막 설교이셨던 듯 합니다. 제목은 내용에 따라 임의로 붙였습니다.


오래간만에 사랑하는 천호동 교회 교우님들을 만나 같이 예배드리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제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 여러분께서 저를 위해서 많이 걱정해 주시고 기도해 주신 것을 다시 한 번 회고하면서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주신데 대해서도 전 목사님과 당회에 감사합니다. 아마 병원에서 나온 다음에 첫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일가(一家)를 이루기


오늘 읽어드린 마태복음 7장과 16장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집을 짓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 자기 전문분야에서 성공을 했을 때, 우리는 그가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가령 철학자로서 자기 철학을 나름대로 수립했다고 하면 그는 철학에서 일가를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철학자로서 자기 자신의 집을 지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우리 기독신자들도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집을 지으려고 하면 기초부터 다져야하는데. 기독교 신자의 기초라고 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했을 때, 예수께서는 “너는 반석이니 내가 그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은 터전만 든든하게 함으로써 되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 여러 가지 건축자재가 있어야 합니다. 돌, 벽돌, 시멘트, 철근, 목재, 흙, 페인트, 유리, 비닐, 그리고 못 등등, 각양각색의 자재가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짚으로 지은 집과 돌로 지은 집이 화재 난 때에 어떻게 되는지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요(要)는 든든한 터전 위에 좋은 재료로 잘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설계도가 있고, 기술감독이 있고, 기술자도 있어서 설계도에 맞춰가면서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노무를 부담하는 일꾼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꾼들이 화목하고 즐겁고 부지런해서 감독과 한 몸이 되어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독이 시키시는 대로 일해야 합니다.


지교회의 총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 책임자는 목사입니다. 장로님들은 목사를 협찬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집사, 교사 등은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분담한 위원들입니다. 총감독은 적어도 교회의 일, 목회의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여야 합니다. 마치 교향악단의 지휘자와 비슷한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어야 자격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무를 기르는 데도 전문 지식이 필요합니다. 여러 종류의 나무가 각기 그 습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짐승을 기르는 사람은 더 치밀하고 복잡한 전문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동물들이 어느 정도 자기의식을 가지고, 자기 번식의 의욕을 갖춘 생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기르는 목자입니다. 하나님도 목자시라고 했습니다. 시편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였고, 예수님도 “나는 선한 목자니, 선한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세상 권력자는 힘, 즉 폭력으로 인간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사랑으로 인간을 화육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쫓아버리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를 용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담담하게 대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하는 때에만, 그 일을 잘 해낸 때에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설교는 늘 그렇게 해도, 실지로 그렇게 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감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라고 하는 것은 선을 행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금식기도나, 무슨 철야기도, 산기도, 또는 부흥회에서의 기도 중에 기적적인 성령 강림을 보았거나 받았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추구하는 것을 아주 일축해버렸습니다. “이 악한 세대가 기적을 구하나 요나의 기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시고서는 그들을 떠나가셨다고 했습니다. 요나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그런 유혹에 대해서는 거리가 멀 것으로 생각합니다. 선을 행하는 데에 열심인 교회인줄로 생각됩니다. 작은 선이라도 진실하게 행하면 그만큼 참 신앙이 생깁니다. 헛풍선 같이 속이 비고 겉이 부풀기만 한 교회는 둥둥 떠서 다니기는 해도, 땅에 발을 붙이고 백년, 천년 자라는 나무의 생명 같이는 되지 못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그런 교회가 꽤 많이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물론 큰 교회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그런 유혹을 받을 위험은 경계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지교회는 300명 정도가 알맞은 것 같습니다. 제 생각만이 아니라 목회학적으로도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면 온 교인이 다 자기 할 일을 찾게 되고, 교회를 위해서 할 직분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즐겁게 교회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교인이 가족 같이 친하고 가정 같이 협력해서 자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성어린 선한 사업에 다같이 동참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교회에 오래간만에 와보니까 그동안에 교회당도 아담하게 수리하고, 목사관도 잘 지은 것이 얼른 보아도 진실과 정성이 배어있음을 느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 예수를 내 구주로 믿는 바른 신앙의 토대 위에, 욕심이 아니라 봉사를 하는 그런 일념으로 새 전당을 세우신 여러 교우님들에게 칭찬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근본 할 일 이웃사랑의 운동


교회는 빛의 등대이고, 산 위에 세운 성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교회의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인데, 그 방법들 중에서도 가장 근본되는 것은 이웃사랑의 운동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교인끼리 서로 돕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세속사회에서 비참한 동족들의 고난에 다소라도 동참하는 데에 우리 한국교회는 굉장히 인색합니다. 내 교회 운영에도 역부족인데 어느 세월에 사회참여를 할 수가 있냐고 합니다. 선행에도 서열이 있는데, 그것은 가까운 데서부터 먼저하고 그래서 차츰차츰 먼데까지 이르는 것이 질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맹자의 ‘老吾老노오노하여 以及人之老이급인지노며 幼吾幼유오유하여 以及人之幼이급인지유’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 집 어른을 받들어서 남의 집 어른에게까지 미치고, 내 집 어린애들을 아끼고 길러서 남의 집 어린애에게까지 미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이랄 수는 물론 없습니다. 또 당연한 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하고 싶은 일, 나 자신의 의무를 다한 다음에 비로소 이웃 생각을 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이웃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안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법으로 소위 복지사회를 건설하려고 하는 그런 나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법률만 있고 그리스도의 신앙이 없는 복지사회는 육신적인 향락에 빠져서 인간을 정신적으로 저하시킵니다. 그래서 소위 복지 사회도 성령의 감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독교적 성령의 감화로 선을 행할 능력이 강해지면 그 다음에는 선을 행할 능력이 점점 더 자라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선을 행할 수가 있게 됩니다. 육적인 유혹과 향락을 쉽게 이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세움에는 기독교적인 빛의 등대 또는 산성, 소금의 방부와 불의와의 불타협, 비폭력적인 항거와 광범한 진리운동 등등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 세속과 함께 부패하고 세속의 불의에 무언굴종하고 어떤 경우에는 세속만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이를 잊어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의미에서 그렇게 참고 계시지만 언젠가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공리적으로 따져보더라도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 됩니다. 지금은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따뜻한 악수와 마음에서 우러나는 위로의 말씀 한마디라도 드린다면, 사랑의 감격은 거기에서 불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서 살리는 그리스도의 윤리


상식적인 세속 윤리는 나도 살고 너도 살자 하는 윤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윤리는 내가 죽음으로 너를 살린다고 하는 윤리입니다.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저된 것은 아닙니다. 값싼 영광이 아닙니다. 바울은 빌립보 2장에서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사람의 형상이 되어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그리스도에게 주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면, 교회는 가장 높은 영광의 장막이고 세상의 빛이며 예수의 증언자이면서 하나님 자녀의 성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영광은 예수의 사랑의 번제, 즉 십자가를 통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고난 없는 영광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損之又損 以至於無爲손지우손 이지어무위’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손해보고 또 손해보고 해서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무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도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손실입니다. 그러나 그 손실 자체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손실 안에서는 능치 못한 것이 없고 가지지 못한 삶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유산이 되고 영원한 나라는 우리의 나라가 되고 영원히 의로운 사랑은 우리의 성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건 작건 교회라고 하는 이 조직은 결코 어떠한 정권이 눌러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패역한 박해자가 있어서 그 핍박에 고만 매장 되어버려 다시 부활하지 못하는 그런 단체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씨가 땅에 심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비록 일시적으로 교회를 멸시하고 교회를 자기의 맘대로 다뤄보려고 하더라도 교회는 결코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시편 제2편에 있는 것과 같이 하늘에 계신 분이 빙그레 웃으신다고 하는 그러한 것입니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우리는 교회의 권위와 교회의 생명, 영원한 그 영광, 그리고 교회의 고귀한 직책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교회에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당당하게 설수 있는 그러한 삶과 죽음을 가져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순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삶의 방위를 그 방향으로 정해야 우리에게 세상 유혹이 감히 덮치지 못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4호] 2015년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