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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24호] 신학수필 - 범용(凡庸)의 미학과 영성 / 김경재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1 15:53
조회
1303

[제24호] 신학수필

범용(凡庸)의 미학과 영성

김경재 목사
(본회 이사장)

범용(凡庸)- ‘있는 모습 그대로 떳떳, 의연, 자유스러움

장공 선생의 캐나다에서의 민주평화운동 10년 생활 후반 무렵(1981), 그는 자전적 이야기인 『범용기』(凡庸記)를 펴냈다. ‘평범한 인간의 생애기록’ 이란 말인데 굳이 장공은 머리말에서 너무 겸허하게 ‘범용기’를 ‘못난이의 기록’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범용’(凡庸)이라는 한자어 뜻 안에는 ‘못났다’는 자기폄하 의미는 없다. 평범하다, 뛰어나지 않다, 보통이다, 별스럽지 않다 등등의 뜻을 지닐 뿐이다. 그런데 그동안 인류문명사 속에서 ‘비범인’(非凡人)을 영웅시하는 풍조가 강해서 자연히 비범하지 않은 사람은 용렬하고 못났다는 편견이 생긴 것이다.

새삼스럽게 한자 옥편을 찾아보았다. ‘범’(凡) 이라는 한자어 뜻은 “생각하건대, 대체로 보아, 대저, 무릇 ”의 뜻이다. ‘용’(庸) 이라는 한자어는 놀랍게도 옥편에 “떳떳 용”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떳떳하다는 우리말 형용사는 “굽힐 것이 없이 당당하고 어엿하다”는 의미라고 국어사전에 해설되어 있다. 그러므로 ‘범용’(凡庸)의 진정한 뜻은 비록 비범하거나 특출하지 않아 평범하고, 흔하고, 평균적일는지 모르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꾸미거나 남에게 잘 보일 필요나 충동을 느끼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떳떳하고 의연하고 당당하고 자유스럽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진정한 농부나 노동자, 그리고 씨알 시민들은 그러하다.

장공은 평범한 사람?

장공의 제자들이라서가 아니라, 길을 막고 우리와 동시대 사람들에게 장공 김재준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어른을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재주가 비범한 사람이라고는 아니할지라도 훌륭한 사람, 진리를 증언한 사람, 능히 타인의 스승이 될만한 위대한 삶을 살고 간 인물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설을 느낀다. 장공자신은 자신을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는데 왜 제자들과 그를 아는 사람은 그 분을 ‘비범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인가? 필자는 이 역설을 조선 예술작품의 특징인 ‘달항아리 미학’과 장공이 붓글씨로 남긴 노자 도덕경의 구절 ‘좌예해분 화광동진(挫銳解紛 和光同塵)’ 을 음미하면서 ‘범용의 미학과 영성’에 대하여 가벼운 신학적 수필을 써보는 것이다.

조선의 미, ‘백자 달항아리

한신대 신대원 수유리 캠퍼스 중앙건물 장공관 입구에 들어서면 좁다고 할 수는 없는 현관입구 공간 중앙에 조선 백자 달항아리 작품 두 개가 놓여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오른쪽 작품은 <백자 달항아리>요 왼쪽 작품은 <분청 달항아리>이다. 한국 도요계의 원로 중 한 분인 지당(志堂) 박부원 장로께서 학교에 기증하신 것이다. 지당 선생의 작품은 한국의 국립 미술관,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그리고 영국 빅토리아 & 앨버트 박물관에 상시 전시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저명한 도예작가이다. 그런데, 한신대 신대원 공동체 구성원들이 날마다 대하는 이 백자 달항아리의 의미와 가치를 얼마나 체감하고 생활하는지 의문이다.

[장공기념관 현관에 있는 지당 박부원 장로의 달항아리들]

지난 6월 초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Guy Sorman)이 말하기를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를 정해보라고 한다면 백자 달항아리를 심볼(Symbol)로 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가 듣고서 전하는 말이다(한겨레, 2015.6.26.). 미적 감각이 뛰어난 프랑스 석학의 눈에 한국인과 한국 문화와 한국적 영성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예술작품이 흙으로 빚어 만든 도자기, 그것 중에서도 범용의 극치라 할수 있는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지목하는 것에 우리는 놀란다. 한국 미술사를 전공한 고유섭, 최순우, 유홍준 석학들이 밝히고 해설하듯이 한국의 도자기, 특히 조선 백자에서는 비권위적이고 서민적인 질박성, 뽐내지 않는 평범한 형태, 소탈한 친숙감, 예술품이면서 생활용품, 곰삭은 된장국 맛을 느낀다. “정말 제대로 완성된 것은 어딘지 모자라는 듯 보이고, 정말 가득찬 것은 비어있는 듯 하다”(大成若缺대성약결, 大盈若沖대영약충)는 말이 생각난다.

[지당의 분청 달항아리]

[지당의 백자 달항아리]

참사람의 속성

서울 종로구 평창동 산 속으로 옮겨간 (재)대화문화아카데미 3층 건물 안에 장공 선생의 휘호 작품이 벽면에 걸려있다. 제자 강원룡 목사가 원장으로 일하던 때,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발전을 축원하면서 써 보낸 붓글씨이다. 붓글씨 내용은 노자 도덕경 제4장을 비롯하여 여러 군데서 나오는 글귀다. 본래는 노장적인 진리(道)의 속성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진리를 정말 몸으로 터득한 사람 곧 도인, 진인, 참사람의 삶의 모습을 묘사한다. 핵심구절은 다음 네 구절이다(사진참조, 장공의 붓글씨): 挫其銳좌기예 解其紛혜기분 和其光화기광 同其塵동기진. 그 뜻을 풀어 말하면 진리를 터득한 원숙한 참사람은 “예리한 것을 무디게 누그러뜨리고, 분규, 갈등, 복잡함을 풀어서 화해시키고, 번쩍이는 힘과 재기를 부드럽게 하거나 안으로 감추고, 세속 안에서 민초들과 함께 거한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살벌하고 종교계가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재능과 권력과 재물이 많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 힘을 과시하면서 송곳이나 면도날처럼 휘두르기 때문이다. 남북이 명분싸움이요, 정당이 정권싸움이다. 몇몇 대형교회는 물질비리 냄새가 교회 울타리 밖까지 풍겨 나오고 연합기관장 감투싸움에 노욕의 교역자들은 수치심을 잊은 지 오래다. 장군들은 무공훈장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나와 무공을 과시하고, 영악한 처세술로 갑의 자리에 오른 자들은 지위와 쌓은 스펙을 과시한다. 서민과 백성과 교인들을 위한다는 말은 빈 말이고 항상 그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고 무시한다. 모두가 범용(凡庸)이기를 거절하고 비범(非凡)이기를 안달이다.

『김재준 전집』제18권 안에는 “별스럽게 굴지 않는다” 라는 제목의 수필이 두 편 실려 있다. 장공이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니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남들보다 똑똑하고, 재능 있고, 신앙이 깊다고 생각하며, 그런즉 남보다 더 대접받고 높임 받고 군림하고 명예나 이익을 향유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두 자기가 별스러운 사람이고, 별스럽게 대접받고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평생 성직자로서 평생을 지낸 사람들은 그 병에 걸리기 쉽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장공 선생의 영성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범용의 영성’이 아닐까 한다. 자신은 진실로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 못난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여 굳이『범용기』라고 책제목을 붙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우리들의 현대판 모세로 높이셔서 등불이 되게 하여 주셨다. ‘범용의 영성’은 꾸밈없는 질박한 성실성, 날카로운 비판정신에 머물지 않고 화해시키는 생명, 정의, 평화의 영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난당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하나 되는 예수 닮기와 예수 살기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경험의 공정을 거친 순수의 영성

백석대학교 영문학 교수 이인기 박사가 작년말 기념사업회가 간행한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에 대한 서평을 「신학과 교회」제3집(2015 여름호)에 논문형태로 기고했다. 영문학자가 서평을 기고한 점도 놀랍거니와 그 서평내용이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는 장공의 신학함의 정신을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문학 정신과 비교하여 논평했다. 장공의 신학은 소위 종교적 순수를 지키기 위하여 관념적 교리신학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의 고난 경험을 통하여 ‘순금같이 되는’(욥기 23:10) 신학적 영성, 곧 “경험의 공정을 거친 순수”라고 서평자는 갈파한다. 그러한 영성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균형미와 왕족들의 가구가 갖춘 세련미를 잘 아는 프랑스 지성인 기 소르망이 한국의 질박한 조선 달항아리 안에서 최고수준의 미학적 감정을 느끼는 역설이다. ‘범용의 영성’을 지닌 자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고후 6:9-10).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4호] 2015년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