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空 회보

[회보 제24호] 대담 - “장공의 여제자들이 이야기하는 ‘우리 선생님’” / 김경희, 김윤옥, 김지선, 나선정, 박성자, 안상님, 이문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1 15:32
조회
912

[제24호] 대담


“장공의 여제자들이 이야기하는 ‘우리 선생님’”


참여자:
김경희 선생(기장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전 총무)
김윤옥 선생(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전 상임대표)
김지선 목사(장공기념사업회 이사)
나선정 장로(기장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전 총무, 회장)
박성자 목사(서울동노회 원로목사)
안상님 목사(여성교회 전 담임목사)
이문우 장로(신촌교회 원로장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전 총무 외)


(박성자 목사님 기도와 “교회의 노래” 찬송으로 시작하다)


김지선 : 이 시간 함께 먼저 장공 목사님이 작시하신 “교회의 노래”라는 찬송을 함께 불렀습니다. 이 노래가 처음 만들어지고 부를 때는 (가사 중에) “하늘로 줄기가 치솟을 때”라는 가사여서 부르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굉장히 고무되는 노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찬송가에 가사가 바뀌어서 “줄기가지 솟을 때”로 바뀌었더군요. 아마도 찬송가에 좀 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쓰기 위해서였겠지만, 그러나 사실 한국기독교 100주년 때 여의도에서 모여 이 찬송을 불렀던 백만 성도들은 그 가사 그대로도, ‘하나님, 그리스도’라는 단어 없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격의 은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장공 선생님은 “앞으로는 카타콤베의 시대가 온다” 하셨는데, 장공은 그렇게 내세우지 않고도 마음 깊이에서부터의 깊은 신앙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대부분의 남성제자들이 장공기념사업회를 이끌어가고 교단에서도 많은 부분에서 남성들이 앞에서 일하고 있지만, 사실 여성목회자 안수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도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장공에게 배운 신학을 삶으로 살아내는 여성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장공은 열심히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쳐가는 여성 제자들에게 “너희가 제대로 일하고 있다”고 늘 응원해주셨습니다.


오늘 장공에게서 배우고, 삶으로 그 배움을 실천한 장공의 여제자들이 모여서 장공에게서 받은 사랑과 가르침, 그리고 기억하는 정신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돌아가면서 장공과 조우하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해주시지요.



장공과의 조우, ‘목소리 작은 천지선생


박성자 : 나는 평양신학교 여성경학원에 다니다가 전쟁이 나서 배를 타고 거제도로 피난을 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장승포의 진장로(진도선 장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지냈지요. 그때 장승포에 김정준 목사님이 계시기도 했고. 그러다가 서울에 올라와서 동자동에 있던 조선신학교에 편입해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편입하면서 바로 안양에서 교회 전도사를 했기 때문에 매일 새벽 5시에 새벽예배 끝나고 열차 타고 올라와서 수업 듣고 내려가고 그랬지요. 많이 피곤할 수 밖에 없었어요. 장공 목사님 수업을 듣긴 했는데, 사실 학생 때는 목사님은 목소리도 작고 그래서 너무 졸린 수업이었어요. (모두들 웃음. 너나 할 것 없이 장공의 별명이 ‘천지선생-하늘과 땅만 보면서 수업을 하셔서’, ‘천창선생-하늘과 창문만 번갈아보시며 수업을 하셔서’ 였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함.)



김윤옥 : 제가 장공 목사님을 뵈었을 때는 학장을 그만두시고 김정준 선생님께서 학장을 하고 계셨어요. 장공 선생님은 명예학장으로 목회학 강의를 해주셨지요. 목소리는 작지, 눈은 안마주치고 하늘, 땅만 보시지. 게다가 옷은 또 얼마나 촌스러우셨는지. 그냥 겉으로 보기에 첫인상은 촌할아버지 같았지요.



나선정 : 나는 한국신학대학 시절, 59년에 입학해서 졸업했어요. 목사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나는 악착 같이 일등으로 교실에 가서 매번 제일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으려고 했어요. 그래도 목사님 수업이 너무 좋아 기침소리까지 받아적어야 한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어요.



이문우 : 저는 다른 학교를 다니다가 1959년에 편입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처음 한신대에서의 생활은 저에게 지상천국 같았어요. 김재준 교수님을 비롯해서 모든 교수님들의 높은 학문과 인품, 학생들에 대한 자애, 진정성, 또 학생들의 학구열과 순수성이 너무 좋았어요. 그때 김재준 교수님이 학장을 하실 때였는데, 처음에는 수업을 들어도 잘 이해가 안되고 별로 재밌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공선생님과 우연히 딱 마주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분은 강의시간에는 천장만 보시고 학생들은 바라보지도 않는 분이었어요. 그런데 나를 보고는 말을 거시는데, “문우는 요즘 학교공부가 재미있어?” 하셨어요. 이미 제 이름을 알고 계시는 거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 이분은 그냥 하늘과 땅만 쳐다보고 계셨던 게 아니라 통찰력이 있으신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정말 더 존경하게 되었지요.



우리 선생님, ‘장공’ : 장공의 목회신학


박성자 : 정말 그래요. 그 분은 수업에서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업 밖에서 알면 알수록 정말 존경하게 되는 분이었어요. 그 이후에 목회하고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면서 오히려 장공 목사님에 대해 더욱 알아갔고, 나는 목사님이 신학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나라의 귀한 보배라고 생각해요. 인간적인 면에서도 굉장히 존경스러웠고 감사하지요.


나선정 : 졸업할 때가 되면 조를 짜서 교수님 댁을 방문했는데, 김재준 목사님 댁을 갔을 때는, 목사님은 방바닥에 앉으시고 우리들더러 의자에 앉으라고 하시더니 “내가 오늘 콩나물신학을 하겠다”고 하시는 거에요. 콩나물 신학이 뭔가 했는데, “콩나물은 뭘주고 키우니?” “물을 주지요.” “물을 언제언제 주니?” “계속 주지요. 밤이나 낮이나.” “그러면 콩나물이 썩더냐, 아니면 자라더냐?” “물을 계속 주면 콩나물은 자라지요.” “나는 너희들에게 콩나물신학을 물려주마. 가서 일하다가 힘들더라도, 콩나물에 물주면 자라듯이 그렇게 계속 하면 언젠가는 자라게 된다.” 저는 목사님의 이 콩나물 목회신학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목사님은 종종 제자들이 어떻게 목회를 하고 있나 하고 제자들이 목회하는 교회를 순방하셨었대요. 하루는 어떤 교회를 갔는데, 마침 그 교회 목사님이 장공 선생님 설교를 가지고 설교를 하더라는 거예요. 당신도 처음엔 민망하셨겠지. 그렇다고 일어나서 가시기도 그렇고 그래서 앉아계셨는데, 예배가 끝나고 그 제자 목사가 장공 선생님께 와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니까, 장공 선생님 왈, “안죄송하다. 내 제자가 내 것을 가지고 사용을 하니 내가 선생으로서 제자를 잘 두었구나. 앞으로도 개의치 말고 필요할 때 내 설교를 계속 써라” 하시면서 멋쩍고 당황했을 제자를 오히려 위로해주시고 오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이문우 :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것은, 강의 후에 학우들이 장공 교수님을 에워싸고 나오는데 어떤 학생이 짓궂게 “학장님은 왜 수요저녁 예배에 안나오세요?” 하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교수님께서 “나 정도 되면 수요예배는 안 나가도 돼.” 하면서 재치 있게 받아주셨어요. 저는 그 학생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참 어리석게 느꼈지요. 그런데 그 이후로 평생 ‘신앙이 어느 정도 되면 예배 시간에 참석을 안해도 될까’하는 생각을 하곤 하며 장공 목사님을 생각했더랬어요.


김윤옥 : 나는 그때는 목사가 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점 따려고 목회학 수업을 들은 거였는데, 그런데 장공 목사님 수업은 가만히 듣다보면 목회학 이전에 ‘인간학’ 수업 같았어요. 특히 “목회할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현실적인 이야기를 자세히 많이 말씀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예를 들면 “어느 집사가 넥타이를 사줬다고 냉큼 그 넥타이를 하지 마라. 넥타이 못사줘 마음 아픈 다른 교인들 마음도 헤아려라” 이런 이야기요. 또 교회 그만 두면 그 교회 나가지 마라.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옛날 이야기를 하듯 하셨어요.


김지선 : 수업시간에 새로운 것을 많이 말씀해 주시는 편이었는데, 그러면 학생들 중에서 “그럼 우리가 농촌 할머니들 앞에서는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하니까, “내가 한 얘기를 따옴표로 가르치지 말고, 말한 의도와 뜻을 새기면서 현장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미음을 먹일 것인지 밥을 먹일 것인지는 군이 연구해서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더랬지요.


김윤옥 : 목회학을 가르치실 때의 그 어눌하신 말투, 그것과 전혀 다른 목사님을 민주화 운동할 때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아 장공선생님이 이런 분이구나. 장준하 선생님과 함석헌 선생이고 그 어려운 사람들이 목사님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는 거에요. 평소에 말씀이 별로 없으시다가 정말 필요할 때는 한마디 하시고. ‘아, 목사님이 정말 큰 나무구나 또 호랑이 같은 분이구나’ 이런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이우정 선생님께서 사감을 하실 때, 장공 선생님께서 기숙사에 오시곤 했는데, 그때 말씀 나누는 걸 옆에서 들으면서 배운 게 참 많았습니다.


안상님 : 나는 잠깐 학교가 6년제 시절일 때 들어와서 4년만 배우느라 장공 목사님께 배우지는 않았어요. 나중에 결혼식에 주례를 서주신 인연이 있었지. 그런데 내가 기억이 남는 것은 축제 때 가장행렬을 했었는데, 할머니로 분장을 하셨었거든. 조그마하니 어찌나 잘 어울리셨던지...


[학교 축제 가장행렬 때의 장공 선생님]


나선정 : 제일로 잘 어울리셨었지(다같이 웃음). 우리는 짓궂어서 부러 할머니 복장 하시라고 갖다드리면서도 설마 입으실까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어주셨어. 한번은 만우절이라고 우리가 교수님들 놀려주느라, 이우정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기숙사 5동 방에서 이우정 선생님 댁엘 오시는 걸 보니 정말 심각한 얼굴로 땅만 보면서 오시는거야. 근데 문을 여니 죽었다던 이우정 선생님이 “무슨 일이세요?” 하니, 정말 유령을 본 듯 얼굴이 하얗게 놀래시더라구. 우리가 하는 장난도 곧잘 그렇게 받아주셨어요.


안상님 : 목사님은 또 우리가 편지를 하면 회답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셨는지 몰라요. 한번은 미국에서 정신없이 여성신학 공부하고 있을 때였는데, 구춘회 언니가 여성신학 강연을 하라고 해서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열정적으로 그 강연을 맡아 했었는데 마침 미국에 오신 목사님께서 얘기를 들으시더니 저에게 ‘솜방망이’라고,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는데 속으론 쇳덩어리가 숨겨져 있다고 하시던 생각이 나요. 요새 범용기를 다시 읽으면서 선생님을 다시 느끼고 있지요. 제가 사실은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문병을 갔다가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대화 나누느라 혼자 선생님 곁에 있다가 임종을 지키게 되었어요. 가만히 앉아서 선생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시더니 그렇게 가셨었더랬지요. 이런저런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나네요.



김지선 : 그러게요. 가실 때도 어찌 그렇게 가셨는지, 그냥 곱게 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돌아가시기 바로 얼마 전에 함석헌 선생이랑 함께 “새해 국민 여러분께 고함”이라는 글을 유언처럼 남기셨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마지막까지, 또 마지막임을 아시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으셨을까? 참 대단한 분이라 생각 들어요.


나선정 : 목사님이 캐나다에서 돌아오셨을 땐데 총회 사무실에 오셨다가 우리 방에 들리셨었는데 칭찬을 참 많이 해주고 가셨어요. “우리 여신도회가 참 할 일 한다. 내가 제자가 참 많은데 우리 여제자들이 내 뜻을 이어가는구나. 참 고맙다.” 라며 칭찬해주시고 가셔서 어찌나 힘이 되었던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렇게 내 뒤를 이어서 경희가 할아버지 글씨로 생명, 평화, 정의 휘호를 받아 지금까지 오게 된거지요.


김경희 : 나도 김재준 목사님의 목회학 수업을 들었지요. 목사님은 목회학 수업하실 적에, 실제적인 얘기를 참 많이 해주셨었는데, 그 중에 내가 목회하면서도 가장 기억에 남고 도움이 되었던 말씀이 “너가 받지 않아도 될 돈만 줘라” 라는 말씀이었어요. 받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면 주지만, 꼭 받아야겠다 생각하면 꿔주지 말란 말씀이었던 거지요. 수원으로 목회하러 갔던 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었으니까 다들 굉장히 가난할 때였는데, 교인들은 교회 목사가 교회 돈을 다 관리하는 줄 알고 힘든 일이 있으면 자꾸 와서 꿔달라고 하는 일이 많았거든요. 그럴 때마다 목사님 가르침을 기억하며 그때그때 목회자가 받는 사례비와 내 형편 정도에서 받지 않아도 될 결심을 하고 도와주고, 지혜롭게 대처하려고 했지요.


장공에게서 받은 휘호


김경희 : 휘호에 대한 거는, 1981년도에 캐나다 연합교회랑 기장총회가 자매결연을 맺어 열 명이 대표로 캐나다에 갔었는데, 그때 목사님 댁을 방문했었어요. 그때 사람들이 목사님께 글을 써달라고 해서 써주셨는데, 저는 가만히 있으니까 목사님이 “경희 너도 필요해?” 라고 먼저 물어봐주셔서 냉큼 “그럼요~” 했더니, 그 자리에서 시편 1편을 써주셨어요. 그러고는 마지막에 ‘목회하는데 복 많이 받아라’는 뜻으로 성역유복(聖域裕福)이라고 써주시면서 제 이름으로 ‘공경할 경(敬)’자로 쓰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목사님, 제 이름은 ‘경사 경(慶)’자예요”라고 했더니, 목사님 왈, “이제는 존경을 받아야 해” 라고 했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도 그 휘호가 집에 걸려있는데, 볼 적마다 ‘내가 지금 존경 받을 만한 행동을 하고 있나’ 돌아보게 되어요.


제가 여신도회 총무를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그때 정치적으로 핍박받던 사람들, 특히 가족들이 여신도회 사무실에 참 많이 왔었어요. 그 분들 도우려면 돈을 만들어야 하는데 저는 평생 목사가 가져다 준 사례비로만 살아서 안꾸고 살면 다행인 삶이었던지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었지요. 그러다가 목사님이 휘호 써주시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며느님 이정희 장로님 통해서 ‘생명, 평화, 정의’ 글씨를 받게 되었지요. 거기에다 마침 또 안병무 박사님 사모님인 박영숙 선생님이 김지하의 난 그림을 받아다주셔서 그걸로 여신도회에서 접시와 소파 등걸이를 만들어 인권위 영치금을 마련할 수 있었어요.


김윤옥 : 장공 휘호 받은 것으로 그렇게 인권운동도 선교사업도 많이 했던 거지요. 재정적 도움도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은 장공의 글씨처럼 ‘생명, 평화, 정의’의 정신을 이어나가고 확대하는 데도 기여가 많이 되었지요. 많은 이들이 이미 그 글씨를 집에다가 두고 볼 때마다 머리에 새겨지는 거잖아요. 결국에는 WCC 부산 총회의 주제도 ‘생명, 평화, 정의’가 되었고요.


김지선 : ‘생명, 평화, 정의’ 뿐만 아니라 제자들한테 휘호를 참 많이 써주셨던 것 같아요. 한번은 캐나다에서 귀국하셨을 땐데 84년인가 선배들하고 세배를 갔었어요. 나는 (연배상) 제일 끝에 앉아있었는데, 그때 앞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목사님, 저희한테도 글 한 점씩 주세요” 하니까 목사님께서 “그러지뭐” 하시고는 그때 같이 갔던 스물몇명 이름을 다 적고 가게 하셨어요. 이 많은 사람들을 언제 다 써주시려나 했는데, 그런데 봄에 벌써 소식이 왔어요. 저에게는 시편 121편을 써주셨는데, 제 이름을 쓰시려니까 한자로 잘 모르시겠던가봐요. 그게 마음이 걸리셨는지 학장실을 통해서 한문을 보내라 하셔서는 다시 써주신 게 시편 24편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저희 집에는 목사님 휘호가 두 점이 걸려있지요. 스물 몇 명 써주시다 보면 한자로 썼건 한글로 썼건 별로 기억에도 안남을 것 같은데 그렇게 세심하신 분이셨던 거지요. 제자들한테뿐만 아니라, 옆에 덤으로 누가 있으면 그 사람한테까지도 (마음이) 흘러넘치시는 분이셨어요.


나선정 : 그때 우리가 스물 몇명 가서 써달라고 명단 드리고 나니까 목사님이 “나 죽으면 이게 값이 높아진다” 하시며 농담하시던 생각이 나네요. 저에게는 장공이 주신 휘호가 두 점이 있는데, 그중 제가 평생에 교훈으로 삼았던 것은 “信望愛신망애 順天之道순천지도, 智仁勇지인용 養己之㯖양기지덕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하늘 하나님의 도요, 지혜와 어짊과 용기는 네 마음을 다스리고 가는 덕이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저에게 평생 힘이 되었고, 지금은 조카딸에게 줘서 가훈으로 물려받게 했습니다.


이문우 : 저는 목사님으로부터 휘호를 두 개 받았습니다. 하나는 1981년도 즈음이었는데, 당시 여신도회 총무였던 나선정 장로가 캐나다에서 목사님이 휘호를 보내주셨다고 자랑을 하는데 얼마나 부러웠던지, 캐나다에 편지를 해서 저한테도 휘호를 주시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시편 24편 3~6절 말씀을 한문으로 쓰고 한글로 번역을 해 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1984년 즈음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모금 활동으로 교계 어르신들의 휘호를 미리 받아서 백자를 굽는 행사가 있었어요. 그때 또 휘호를 써주십사 하고 부탁을 드려서 ‘진리탐구, 자강자유, 1984년 10월 장공’이라는 글귀를 받았습니다. 후에 제가 글의 뜻을 여쭈었더니 ‘진리탐구’는 교수인 남편 달수를 생각하면서 쓴 것이고, ‘자강자유’는 문우를 위해서 쓴 것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약한 걸 아시고는 강하고 자유하라고 써주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목사님은 심오한 혜안과 통찰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이런 글을 써주셔도 저에게 깊은 의미를 주셨고, 제 삶의 고비마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졸업 다음해에 김달수 씨와 결혼을 했는데, 김재준 목사님이 주례를 해주셨어요. 떨리고 그래서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그래도 김재준 목사님이 결혼의 주례를 해 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또 늘 큰 힘이 되었습니다.


김지선 : 마지막으로 미래를 생각하면서, 한신과 기장의 (여성)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들이나 신앙인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한마디씩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공 여제자 대담 - 왼쪽에서부터 김경희, 박성자, 김지선, 나선정, 이문우, 안상님, 김윤옥]
2015년 8월 17일, 기장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사무실


장공과 여성신학


이문우 : 김재준 목사님은 학문적으로는 진보적인 신학사상을 갖고 계신 석학이실 뿐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시는 예언자적인 분, 신앙을 삶과 행동으로 실천하신 분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님의 논문이나 설교집 전체의 목록을 다 확인해 봐도 여성의 문제에 대해서 쓰신 글이 너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펴보니까 <<새가정>> 글, 53년 12월호. “그리스도교와 여성해방”이라는 글을 쓰셨습니다. 거기서 인간학의 대헌장이라고 해서 몇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그렇게 대헌장을 5가지를 말씀하시면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 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아무 차등이 없다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여성이 잘못된 통념에서 해방 받아야 한다는 “여성해방” 이라는 단어를 사용 하셨습니다. 1953년도에 이런 글을 쓰셨다는 것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여성신학’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으셨지만 남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분명이 명시하시고 고린도전서 등에 나오는 부정적인 언어는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시고 성서의 재해석과 바른 의미를 강조하셨어요. 뿐만 아니라 바울의 갈라디아서 3장에 있는 말씀으로 오늘날의 여성신학적인 해석을 해 주셨어요.


새가정 잡지에도 목사님의 글이 더 있는데 앞으로 이런 글들이 다른 문서 속에도 더 있는지 찾아보아야 될 것입니다. 또 꼭 글이 아니더라도 목사님의 삶을 통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더 발굴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여성제자들, 후배들이 목사님의 여성신학사상을 더 발굴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윤옥 : 장공 선생님은 외모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아주 큰 나무 같은 분이셨습니다. 제가 누가복음의 여성에 대해서 논문을 써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목사님께 자주 들려드렸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여성도 다 똑같은 인간이야” 하고 말씀하셨어요. 사실 제 안에 ‘여성의 인간화’라는 문제가 들어온 것은 다 김재준 목사님의 덕분입니다. 목사님을 통해서 저는 저 멀리 있는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도 먼저 가까이의 인간을 알아야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기장과 한신의 후배들에게


나선정 : 제가 여신도회에서 일할 때 저희의 활동의 방향의 축 하나는 얼마나 ‘기장성’의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면서도 핍박 받고 희생당하는 이들을 위해 발로 뛰었습니다. 그때는 가난했고, 시대가 참 어려웠지만 요즘은 한국교회의 위기 속에서 오히려 ‘기장성’이 빛을 발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김지선 : “눈을 들어 하늘 보라, ... 믿는 자여 어이할꼬” 라는 찬송가를 보시면서 목사님이 “어이할꼬가 뭐냐,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나가서 일해야지, 어이할꼬라는 찬송을 부르고 있으면 어떡하냐”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행동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그 외에도 목사님의 좌우명이셨던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사건처리에는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등의 말씀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가치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목사님의 직제자였기 때문에 그의 신학과 사상을 배우고 아는 행복을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또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그 정신과 사상을 잘 전해야겠지요. 여신도회에 써 주신 ‘ 생명,평화,정의,’와 함께 기장 69회 총회에 써주신 ‘평화, 통일, 전도를 위한 기도의 행진’ 과 우리들의 대담이 목사님의 삶을 조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들의 진정성이 전달되고 후배들에게도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늘 이렇게 장공의 이름으로 멀리까지 어려운 걸음을 해주시고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대화 나눔이 앞으로의 미래를 떠맡은 후배들의 걸음에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4호] 2015년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