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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25호] 장공 다시 읽기 - 故전태일 군 추도예배 설교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1 17:06
조회
1785

[제25호] 장공 다시 읽기

故전태일 군 추도예배 설교
크리스천의 책임(누가복음 4장 16-19절)

지금 우리는 전태일 군의 죽음을 추도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생기가 빠져 무기력한 유해만 남긴 소위 교회인 자신을 추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선교의 첫 선언이 이런 것이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고 주께서 내게 기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자들에게 눈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 앞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성경책을 덮었다 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은 골고루 잘 살게 되는 일이다. 포로된 자에게 기쁜 소식은 해방되는 일이다. 눈먼 자에게 기쁜 소식은 볼 수 있게 되는 일이다. 눌린 자에게 기쁜 소식은 자유, 평등이 선포되는 일이다.

이런 예수의 메시지를 기독교회에서는 추상적, 관념적, 정신적으로만 해석해서 가난이란 것은 마음의 가난을 의미한다, 포로된 것은 죄에 포로된 것을 의미한다, 눈 먼 자된 것은 죄 때문에 어두어진 영혼의 눈을 의미한다, 눌린 자란 것은 죄악과 죽음의 권세에 공포를 느끼며 사는 인간상태를 의미한다 했다. 이렇게 온전히 정신적인 의미만을 위한 메시지가 예수의 메시지였다면 예수는 로고스 그대로 계실 것이지 무엇 때문에 몸을 입어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났겠는가? 정신과 물질이 하나가 되어 구상(具象)화한 것이 ‘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몸으로 괴로우면 그것이 그대로 정신으로 괴로운 것도 된다. 가난에 시달려 어린 몸들이 병균과 티끌 속에서 폐병균이 그 야들야들한 폐를 구멍 뚫고 먹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죽지 못해 몇백원의 임금에 매여 하루 13시간 입술을 깨물며 배를 움켜쥐고 노동하는 그 눈물겨운 인간비참을 못본 체 모르는 체 하면서 정신적인 거룩과 정신적인 해방을 설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한 이 첫 메시지는 몸을 가진 인간 그대로의 상태를 상정하고 하는 선언이다. 가난한 자는 현실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요, 포로된 자도, 눈 먼 자도, 눌린 자도 현실의 환경과 사회관계에서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비참과 비인간화된 인간상을 눈앞에 보면서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에서 과연 이렇게 현실에서의 인간비참 - 그 고난당하는 인간들, suffering humanity-에 파고들어 현실적인, 사회부정, 부패, 악랄한 인간학대에 도전하고 있는가? 그것을 회피하면서, 그것을 안하면서 그리스도의 차자직(借子職)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는 자기 주변의 직장동료들의 인간비참을 조금이라도 해소시키려고 있는 힘을 다하다가 기진맥진 벽에 부딪혀 할 수 없이 젊은 자기 몸을 횃불삼아 암흑한 이 사회를 고발한 고 전태일 씨의 장렬한 인간희생의 제단에서 무어라고 할 말이 없어진다. 말을 할 염치가 없어진다.

인간의 피를 짜내어 내 물건을 만들고 그 물건으로 내 배를 채우려는 탐욕자, 부정부패자, 물건으로 인간성을 썩혀서 내 권력의 거름이 되게 하려는 간악한 자들에게 전군의 생전에 한 번 “No!” 소리도 제대로 쳐보지 못한 교회인 됨을 참회한다.

지금 우리는 전태일 군의 죽음을 추도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생기가 빠져 무기력한 유해만 남긴 소위 교회인 자신을 추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했다. “의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름 같이 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은 그들의 것이다. 옛날 예언자들도 다 그러했다.” 하고 예수는 말한다.

우리가 정말 주리고 목마름 같이 의를 갈구하고 있는가? 이 패역, 불의, 부패한 세대에서 의를 세우려면 불의에 저항하지 않고서 그 의를 발표할 수가 없다. 불의에의 항거가 그대로 의의 선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태일 씨는 젊은 생명으로 이 부정하고 불의한 사회에 의를 심으려 했다. 그는 크리스천이었고, 그의 어머니도 그의 가족들도 크리스천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천으로서의 그는 예수의 말씀대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것이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다. 그의 의를 위한 삶의 희생이었다. 그의 삶은 그의 타오르는 몸으로서의 횃불과 함께 의의 불꽃으로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산 자로서 그의 죽음을 높이기만 하자는 의미에서의 말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몸으로 살아서 우리와 함께 있었더라면! 하고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암매(暗昧)한 인간들은 그의 죽음의 의미까지도 암흑 속에 매장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의 어두움을 깨우치고, 그의 뜻이 사회에 알려지게 하고 그가 몸으로 심은 한 알의 밀이 천배, 만배의 열매를 맺어 그가 극진히 봉사하던 근로대중의 인간비참이 경감되고 – 예수가 선포한대로 -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 포로된 자에게 해방, 눌린 자에게 자유, 평등이 선포되고 성취되게 하기 위한 참회와 결의의 행동이 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것이 달성되기 전에는 가신 전태일 젊은이의 영혼은 계속 그 불타는 몸과 함께 통곡하고 호소할 것이다.

1970.11.24. 전태일 군 추도회에서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5호] 2015년 12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