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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25호] 기념강연 - 이 어른, 의로운 ‘양심수’의 영원한 대부 / 한승헌 변호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1 16:50
조회
843

[제25호] 장공탄생 114주년 기념강연

이 어른, 의로운 ‘양심수’의 영원한 대부

한 승 헌
(변호사)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탄신 114주년을 기념하는 귀한 자리에서 배움과 믿음이 얕은 제가 이렇게 단상에 서게 된 것을 참으로 무엄하고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23년 전의 변명을 다시 되풀이하면서

“저는 성직자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닙니다. 김재준 목사님의 문하생이나 후학의 반열에 낄 수 있는 처지도 아닙니다. 그런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분명히 격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어느 한 종교, 한 교단, 한 신학대학의 울타리 안에 모셔놓고, 어떤 연고자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은 아닙니다. 또한, 별을 말하는 것이 천문학자나 점성가들만의 특권일 수 없다는 이치도 제 변명을 겸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방금 읽어드린 이 말씀은 지금부터 23년 전인 1992년 1월 27일, 《김재준 전집》 발간 축하예배에서 읽은 저의 추모사입니다. 그런데 그 때와 똑같은 변명을 오늘 이 자리에서 또 앞세우게 되니, 겸손이 아니라 상습범이란 가책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그런 저를 오늘의 연사로 불러내신 김경재 목사님에게도 (법적으로 말하자면) ‘선임 감독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제 허물의 감경사유로 내세우고자 합니다.

실은 전에 김경재 목사님께서 쓰신《김재준 평전》가운데, “그(장공)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는 언급이 있고, 또 작년에 한신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에도, ‘1972. 3.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한국위원회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저는 장공 선생의 활동과 업적이 너무도 많고 다양해서 ‘한국앰네스티’의 횃불을 올리신 선구적 역할은 크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김 목사님께서 저에게 출제하신 제목이 바로 “김재준 목사님과 한국 앰네스티”였습니다. 저는 ‘한국 앰네스티’ 창립 때 김재준 목사님을 초대 이사장으로 모시고 일한 적도 있는 사람이어서, 목사님의 활동 중 그 부분을 널리 알리는 데는 제가 적임(!)이라고 감히 자부를 하고 김 목사님의 명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한국앰네스티 출범의 배경과 잊혀진 수인론(囚人論)’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이하 ‘한국앰네스티’)가 출범한 것은 1972년 3월이었습니다. 5.16 군사쿠데타로 국권을 찬탈한 박정희 소장이 장기 집권을 노리고, 3선개헌(1969) 등 ‘불법 시리즈’를 계속 연출하면서, 유신 통치와 대통령긴급조치 발동 등 군사독재의 극단을 향하여 폭주하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서 국제앰네스티가 표방하는 목표, 즉 양심수 구제, 사형 폐지, 고문 철폐, 공정한 재판, 인도적인 행형(수감자 처우 개선) 등은 당시 한국 인권상황이 직면한 과제와 일치되었던 관계로 한국앰네스티의 탄생은 참으로 의미가 컸고 또 그만큼 호응도 대단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한국앰네스티의 출범과 성장은 박정희 당시 집권자의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총회]

국제앰네스티는 영국의 변호사 피터 베넨슨(Peter Benenson)이 <업저버(The Observer)>지(1961. 5. 28)에 기고한 ‘잊혀진 수인들(The Forgotten Prisoners)'이라는 글이 불씨가 되어 탄생한 국제민간인권기구입니다. 그는 포르투갈의 두 학생이 리스본의 한 술집에서 ‘자유를 위한 건배’를 한 죄로 체포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 글을 썼다고 합니다.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느 때고 신문을 펼치기만 하면 당신은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가 그 나라 정부에 의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구금되고, 고문 당하고, 처형되고 있다는 기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때마다 지겹도록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만약 전 세계에 걸친 이 넌더리나는 감정들이 하나의 행동으로 모아진다면, 보다 효과적인 그 무엇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앰네스티의 초대 이사장으로서

그처럼 박해 받는 사람, 그렇게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급격히 늘어나던 1972년 어느 봄날(3월 28일)에 한국에서도 앰네스티운동의 깃발이 올랐습니다. 그날의 창립총회에는 함석헌, 이병린, 송지영, 문동환, 이항녕, 이영희, 윤현, 윤형두, 한승헌 등 각계 인사가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재준 목사님이 이사장으로 선출되었고(명예회장 이병린, 함석헌, 지학순, 앙윤식), 이후 한국앰네스티 초창기의 조직과 활동의 기반을 다지는데 목사님께서 상징적이자 구심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실제 업무는 윤현 목사가 전무이사로 상근함). 목사님은 그날의 ‘창립사’에서 “오늘 우리는 양심에 충실하기 때문에 구속된 인사의 석방, 사형 폐지 운동, 고문행위, 형 집행 중의 인간 학대 등 인권유린에 대한 시정 촉구 등을 세계적인 범위에서 호소 및 촉구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제 우리도 전 세계의 인간 정의 수호운동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많은 동참을 바란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양심수 구하려다 양심수 되는 세상에서

이를 계기로 장공 선생은 이 땅을 휩쓸던 정치 탄압의 광풍 속에서 박해 받는 양심수(Prisoners of conscience)를 지원하는 운동을 이끌어 주셨고, 한국앰네스티의 기반과 위상을 높이는 데 큰 어른의 소임을 다하셨습니다. 이처럼 종교지도자가 교회 밖 인권단체의 책임자가 되는 좋은 선례를 이어받아 한국앰네스티는 그 후 지학순 주교, 조향록 목사, 라길모 주교 등(법조인으로는 이병린 변호사)이 이사장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국앰네스티는 정치적 사건 또는 시국사건의 구속자 석방을 비롯하여 다각적인 인권운동을 벌이는 가운데, 독재정권(그 중에서도 특히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탄압대상이 되었고, 런던의 앰네스티 본부(국제사무국)로부터 ‘자국문제 개입 금지’(각국 앰네스티는 외국의 양심수만 지원할 수 있고, 자국의 양심수를 직접 지원할 수 없다는 제약) 원칙 위반을 이유로 간섭을 받는 등 난관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앰네스티에 박 정권의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는 각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서 반독재 재야세력의 구심체처럼 되자 유신정권의 감시 탄압은 더욱 도를 더해갔는가 하면, 임원과 후원자 및 회원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빈발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1975년의 필화사건 때에는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글이 남파 간첩의 사형도 반대하는 용공이라며 반공법으로 구속된 바 있었고, 1980년 봄의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때에는 한국앰네스티가 왜 남민전 등 ‘반국가적 범죄’의 수감자와 가족을 돕는 등 용공행위를 했느냐는 추궁을 받았습니다. 그때 밖에서는 한국앰네스티 사무실이 경찰의 급습을 받기도 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역사와 사건의 중심에 서야

장공 선생은 한국앰네스티 이사장 재임을 전후하여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1969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1973년)을 역임하셨는데, 그후 1974년에 캐나다로 이주하신 뒤에도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의장(1975), 북미주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위원장(1978)을 맡으시어 꾸준히 조국의 민주화운동을 도와 오셨던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3년 11월 5일 서울 종로 YMCA에서 시국간담회를 하고 있는 재야인사들. 왼쪽에 서 있는 이가 함석헌, 바로 옆에 안경 쓰고 앉은 이가 지학순 주교, 그 옆이 이호철 소설가, 가운데 태극기 아래 서 있는 이가 김재준 목사. 오른쪽 아래부터 김지하, 계훈제, 법정 스님, 천관우(동아일보DB)

장공 선생의 이러한 현실참여는 국내에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통하여 한국기독교의 정치 참여문제가 교회 차원에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박정희의 3선 개헌과 그에 뒤이은 유신 압제를 반대하는 일련의 투쟁에서,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심화된 여러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여 기독교의 현실참여 문제가 더욱 절박한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그 때 김 목사님은 “크리스천은 역사 안에서 사건의 한 가운데 서야 하고, 누구나 극중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1970년대 한국의 역사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 민중신학에서는 눌린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멸시받는 자들을 위한 해방을 선포하고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이러한 진보주의 신학의 대척점에 있는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물론 이에 반대론을 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공박했습니다.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성서의 가르침에 반한다고도 했습니다.

그와 같은 두 개의 흐름은 박 정권의 10월유신 하에서 극명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1973년), 대통령 긴급조치 사건(1974년), 민청학련 사건(1974년), 인혁당 사건(1974) 민주구국선언 사건(1976년) 등으로 성직자와 기독청년 학생들이 줄줄이 감옥에 끌려가는데도 한국 교회 일부에서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기독교인 내지 교회의 반독재투쟁을 비난했습니다. 마치 정치 초월적인 듯한 입장을 내세우는 그들은 압제적 권력을 옹호하고 탄압을 묵인, 정당화함으로써 영합적 참여의 이득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 시기에 한국에서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 고백교회와 본 훼퍼의 주장, 그리고 WCC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공동토의 보고서’를 원용하는 논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독재정권을 추종하거나 묵인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현실참여에 대한 김재준 목사님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서슴없이 정치참여의 당위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인은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역사 참여 중에서도 정치 참여가 핵심입니다. 그런데 교인들, 특히 성직자들은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습성화됐습니다. 성과 속의 2원론을 주장합니다. 하느님은 세상, 즉 우리가 말하는 속세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셔서 자기 외아들을 희생시키기까지 하셨다고 입버릇처럼 노이면서 세상일, 특히 그 가장 강력한 demolish power인 독재정권을 추종하거나 묵인하여 말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땅에는 그러한 김 목사님의 가르침과 영향을 받아 의로운 실천에 나서다가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은 믾은 사람을 양심수의 대열로 나서게 만든 배후인물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른바 시국사범들을 변호하면서 감옥 안팎에서 그런 의로운 수난자들, ‘존경 받는 피고인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때 저는 크리스천이 아니어서 목사님들이나 기독학생들이 자기 결단의 근거로 내세우는 성서의 진리를 알고자 밤늦도록 성서와 기독교 서적을 펴놓고 소나기식으로 공부를 해가지고 법정에 나가서, 마치 저도 뭐나 아는 것처럼 피고인들과 법정 문답을 하고 변론을 한 기억이 납니다. 그처럼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1974년에 발족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반독재 싸움에서 전방을 맡은 분위기 속에서 쟁쟁한 목사님, 장로님들과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그 때,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사회하시는 목사님이 저 보고 “한 목사님도 한 말씀 해주시지요.” 그러자 다른 목사님이 놀란 듯, “한 변호사님은 목사님 아니셔”라고 하자, 금방 “아 참, 죄송합니다. 한 장로님!” 말하자면 저는 졸병도 못 되는 신분으로 감히 장성급 성직자들 틈에 끼어 NCC 인권위원이란 고난도의 전사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감옥과 법정에서 만난 의롭고 용감한 크리스천들의 영향을 받아 마침내 저도 교회에 나가게 되는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저렇게 나설 수 있는 결단이 기독교 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나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때 남산에 끌려가서 자술서를 쓰게 되었을 때, ‘종교’란에 차마 ‘기독교’라고 쓸 수가 없어서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내가 과연 기독교인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종교 무’라고 쓸 수도 없어서 앞으로 기독교인답게 살자는 다짐의 뜻으로 ‘기독교’라고 썼습니다.

지극히 작은 저에게 지우(志友)’라는 격려를

그런 병아리 교인인 저에게 김 목사님은 캐나다에서 계속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첫머리에 꼭 ‘지우(志友)에게’라는 호칭으로 저를 불러주셔서 무척 송구스러웠습니다. 거기에다 가끔 친필 휘호도 써 보내주셨는데, 그 중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되는 마태복음 5장 6절 말씀을 한문으로 쓴 ‘慕義如飢渴者有福모의여기갈자유복’도 있었습니다. 제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징역을 살다가 나온 1981년 봄에는 ‘身亡心不變신망심불변’으로 시작되는 글귀의 휘호를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황공 감사한 마음 한 편에는 ‘아, 이 어른이 해외에 계시면서도 나를 꼼짝 못하게 원격 조종하시는구나,’ ‘마음 변할까 봐서 심불변을 강조하시는구나.’ 라는 생각도 했지만, 세상에 이런 어른이 어데 또 계실까 싶어서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자서(自署)까지 해서 보내주신 《凡庸記》를 비롯하여 목사님의 책을 제법 읽은 외에도 목사님께서 다시 귀국하신 뒤에는 제가 변호사 자격을 발탈 당하고 무직상태에서 시작한 출판사(심민사)에서 《속 장공전집》(전 3권)을 간행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여직원 한 사람 데리고 꾸려나가는 영세 출판사였는지라, 제작 단계에서 원고 교정도 거의 제가 도맡아 보게 되어, 목사님의 글을 최소한 두 번씩은 읽은 셈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대단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존경하고 가까운 사이가 된 기독교계, 특히 ‘종로 5가’ 중심의 기독교계 인사들, 짚어 보건대 이해영, 강원용, 김관석, 서남동, 박형규, 이해동 등 여러 목사님들, 안병무, 이우정 등 신학자, 교수들이 모두 김 목사님의 직계 제자 또는 후학들임을 알게 되고서는 목사님의 위대하심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어른께서 묻어놓으신 삶의 싹을 다시

한국의 기독교, 아니 한국 사회 전체가 제 길을 찾아 깨달음과 고난을 징검다리 삼아 바른 역사의 어느 단계까지 도달했던 성과도 바로 장공 선생 같은 한 시대의 큰 어른이 계셨던 덕분이었습니다. 이제 그 위대한 신앙과 신학과 헌신을 되새기면서 탄신 114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말끝마다 그 유지(遺志)를 계승한다면서 과연 무엇을 얼마나 이어받고 살아가는 지, 우리는 깊이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생각건대, 이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 어른의 가르침과 영향으로 많은 사람이 양심수의 길을 택했고, 양심수가 풀려나는 국면 전환을 불러왔으며, 마침내 양심수 없는 세상을 향한 의로운 대열이 면면히 이어져가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 어른께서 떠나신 오늘 이 세상에서 우리 남은 자들은 감히 그 어른을 추모한다며 유지 계승 운운 하는 말을 입에 올릴 수나 있을 지 부끄럽기 한이 없습니다.

다시 불의한 세력이 판을 치는 세상과 직면하여 장공 선생의 말씀을 교독하면서 우리의 깨달음을 살려 나갔으면 합니다.

“불의한 환경 속에서 의를 말하면 고난이 온다. 그래서 세대가 악하면 의인이 잠잠하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고 분부했다. ‘예’와 ‘아니오’를 똑똑히 하는 것만도 큰일이다. 여기서 불의가 가면을 박탈당하게 되기 때문에 발악하는 것이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교회가 무사주의로 나간다는 것은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어서 거짓 메시아의 신도밖에 되지 않는다.” (“고난과 부활의 함수관계”에서)

지금 이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까? 무사주의로 흘러서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만 입에 올리고 있지나 않습니까? 깊이깊이 성찰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장공 선생께서는 《범용기》 서문에서 “내 삶이 범용 그대로일지라도 땅의 미래에 묻어놓고 언젠가 싹트기를 기다려보자는 것이다.”라고 쓰셨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그 어른께서 묻어놓은 삶에서 돋아난 싹을 제대로 가꾸어왔는지, 자책을 하고 새롭게 다짐을 하고, 온갖 고난 속에서도 그런 믿음에 합당한 실천을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바른 길이자, 우리의 자랑인 장공 선생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요, 참된 추모의 출발점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역사의 한 복판에서” “한 자루의 촛불이라도

이 땅에서 고난 받은 양심수들의 정신적 신앙적 배후에는 장공 선생이 계셨고, 그 어른께서 묻어놓고 가신 고귀한 삶과 가르침에서 돋아난 믿음의 싹에서 지금도 의로운 양심수의 줄기가 자라고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국제앰네스티운동의 창시자 피터 베넨슨 변호사는 “어둠을 저주하기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의 촛불을 밝히는 것이 낫다.”고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장공 선생의 말씀처럼 역사의 한 복판에 나서야 하고, 베넨슨 변호사가 역설한 대로, 이 세상을 밝혀주는 한 자루의 촛불이라도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장공 선생 탄신 114주년을 맞아 그 어른을 추모하는 우리들의 마땅한 도리라고 믿습니다.

삼가 김재준 목사님 내외분의 명복을 비옵나이다.

감사합니다. [끝]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5호] 2015년 12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