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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26호] 에세이 - 장공 김재준 목사님과의 오랜 인연 / 탁연택 장로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1 18:25
조회
1282

[제26호] 에세이

장공 김재준 목사님과의 오랜 인연

탁연택 장로
(전 성북교회 장로)


장공 김재준 목사님과의 인연은 평양 숭인상업학교로 맺어졌고, 김 목사님은 그 학교 교목으로 한경직 목사님의 후임이셨으나, 제가 그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북간도 용정으로 임지를 옮기셨습니다. 평양 숭인상업학교는 한국 기독교계에서 모금하여 설립한 학교였고, 조만식 선생님께서 설립 대표와 초대 교장이셨습니다.

조국이 광복되었던 1945년 겨울 경동교회가 창립되었고, 첫 예배를 드릴 때부터 저는 경동교회 교인이었고, 김재준 목사님께서 교회를 이끄셨습니다. 저는 일본군 학병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1945년 6월 휴가를 이용, 부대에 복귀하지 않고 평양에 은신해 있다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조국 해방의 감격을 체험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께서는 기독교서회로 취업을 부탁해주셨지만 성탄절 준비에 지장이 있어 저는 기독교서회를 사임한 후, 무직자가 되었습니다.

선린형제단은 믿음을 사회봉사 활동으로 구현한다는 강령이어서 의과대학을 나온 권경청 씨와 함께 저는 경기도 광주 깊은 골에 새로 세워지고 있는 효성중학교 선생으로 봉사하고 있었으나, 6.25 사변으로 함께 고향으로 피난 갔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서울로 귀환하였으나, 고향에 남으신 부모님과 두 동생 등, 140여 명의 탁씨 가족이 좌익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께서 부산 피난 시에 마침 제 결혼식을 주례하여 주셨습니다. 내자 장혜선과의 결혼 생활은 믿음 안에서 60여 년, 아들 둘, 딸 하나, 모두 교수직으로 봉사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김 목사님 께서는 아버지 같으신 분이셨고 말씀이 적었습니다. 선친이신 천보(字)께서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셨지만 먼 길, 서울까지 오셔서 김재준 목사님의 댁에까지 찾아가셔서 경의를 표하기도 하셨습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한학을 존중하는 집안의 토양이셨던 것 같습니다. 한학에 능하시고, 목사님께서 직접 한자로 휘호하신 병풍이나 서예 작품이 많습니다. 제 차남(승제, 현재 아주대학교 병원장) 결혼 축하선물로 주신 병풍도 저희 가문의 가보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生命, 平和, 正義”를 쓰신 장공의 휘호 또한 우리의 귀한 교훈입니다.

김 목사님께서 댁에 걸려있는 ‘백두산 천지’의 큰 사진을 친지에게 자랑하셨으나, 그 친지는 “고작 사진을 가지고?!”라며, 동의하지 않았다면서, 저더러 ‘천지’를 유화로 그려줄 수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가로 135cm, 세로 45cm의 컨버스에 오랜 작업을 통해 유화로 백두산 천지를 완성하여 수유리 댁에 계시는 사모님께 드렸는데 그때 김 목사님은 한양대학교 병원에 입원해 계셨고, 이후 소천하셨고 지금은 그림의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그림은 없어졌지만, 제 유화 작품 중 “가을의 맑은 계곡”이 라는 작품을 막내아드님이신 김관용 장로님께 기증, 장공 김재준 목사님 영전에 드렸습니다.


저는 성북구 수유리에 있는 성북교회에서 첫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그러나 ‘長’자도, ‘老’자도 젊은 제 이름 밑에 붙는 것이 싫었습니다. 믿음의 깊이도 없는 제게 ‘장로’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장로 장립식 안내문이 발송되었는데도 장로 취임을 거부하여 전경연 목사님의 속을 크게 태웠습니다. 고인이 되신 전 목사님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장로임직 수개월 후 서울 화곡동으로 옮겼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중, 고등학생이 되자 집이 너무 작았기에 화곡동에 같은 교회 조창한 교수님이 설계 해주셔서 조금 넓은 이층집을 지어 옮겨갔었습니다. 이후 여러 여건상 성북교회에는 출석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화곡동에서는 가족끼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일지와 헌금도 하였고, 설교는 『장공전집』 에서 선택하여 읽었습니다. 그러나 큰 아이는 결혼 후 대전으로 옮겨갔고, 둘째 아이는 수련의여서 주일에도 병원 근무를 해야 했기에 저와 아내, 딸, 이렇게 세 명만 남았습니다. 몇 해나 이 상태가 계속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딸의 불평으로 수연이는 연세대학교회로 나가고 말았습니다. 나와 아내는 어쩔 수 없이 연세대학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집 교회의 역사는 8년으로 끝났으나 8년 간의 우리집 교회 일지는 아직까지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연세대학 교회는 어느 교파에도 속해있지 아니합니다. 저를 ‘탁장로’라고 호칭해줍니다. 장로 장립 전에는 ‘장로’라는 호칭이 싫었는데, 요즘에는 ‘그리운 호칭’으로 받아드리고 있으며, ‘싫지도 않은’ 칭호로 받아드려지는군요!


경동교회에서 초창기 고락을 함께 해왔던 교인 중 장로가 된 교우는 모두 3명입니다. 노명식 장로는 경동교회, 의사인 권경철 장로는 화천교회, 그리고 저는 성북교회에서 장로가 되었지요. 이 세 장로는 한 해에 몇 차례 서울역 구내의 중국음식점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었는데, 노명식 장로는 몇 해 전 소천하였고, 권경철 장로는 덕소 어느 아파트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때때로 전화통화로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장공 김재준 목 사님의 신앙의 제자들은 신앙생활의 지표로 남아계 시는 김재준 목사님을 존경하며, 그렇게 각지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 그분은 ‘한국 기독교계의 거성’으로 빛나고 계시는 분이시고, ‘한국인의 빛나는 양심’으로 우리 국민의 마음 속에 간직되고 계시는 ‘큰 어른’이십니다. 과묵하시고 ‘표현하기 힘든 미소’ 로 바른 길과 의로움을 밝히시는 분이십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 새봄 길목에서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6호] 2016년 3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