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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회보

[회보 제29호] 제39회 목요강좌 - 동방정교회 영성의 역사적 고찰 / 이기영 목사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07-13 12:54
조회
1837

[제29호] 제39회 목요강좌

동방정교회 영성의 역사적 고찰

이기영 목사

동방정교회의 역사

그리스도교역사에서 동방과 서방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헬라어 권역과 로마 교구를 중심으로 라틴어 권역에 속한 서방으로 구분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324-337)는 ‘문명화된 세계’로 간주되어온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을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이후 로마제국이 1453년 투르크에 멸망하기까지 1100년이 넘도록 이 도시가 제국의 수도로 있는 동안, 교회 역시 ‘필리오케 논쟁’과 동서방 교회가 서로를 파문한 일(1054),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사건(1204) 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스도교화 한 로마제국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역사적 구조물은 헬레니즘 문화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그리고 로마의 국가 형태가 종합되면서 비로소 성립했다.”

이 글은 비잔티움 제국의 시대(324-1453)에 일어난 ‘동방정교회 영성의 역사적 고찰’에 대한 소고(小考)이며 장공의 「십자군」과 「제3일」의 영성과 관련하여 고찰한 것이다.


제2의 로마

초대교회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은 어떻게 박해 받던 그리스도교로부터 위대한 제국을 떠맡게끔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출발은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주적 멕센티우스를 무찌른 ‘밀비안브리지’의 전투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전투 전날 밤에 그의 군대와 더불어 프랑스를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을 때,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태양 앞에 있는 십자가 빛을 보았다. 십자가와 함께 거기에 비문이 있었다. 즉 그것은 “이 표징으로 정복하라”(In this sign couquer)였다. 이 환상의 결과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첫 번째 로마 황제가 되었다.

일곱 에큐메니칼 공의회(325-787)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 믿음의 종교이지만 또한 지식을 중시하는 종교로서, 점차 제기되던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신학적 의문에 응답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비잔틴 시대의 교회 생활은 일곱 차례의 보편적 공의회의 지도를 받았다. 공의회는 삼위일체, 그리스도론, 그리고 성화상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결정하였다.

니케아 공의회 (325년)

여러 숙적들을 제거하고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제국에 문제가 발생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Arius)는 하나님만 성부로 인정하고, 예수는 피조물로 주장하며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이 아닌 ‘유사본질’(Homoiousios)이라 주장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There was a Time When He was Not)고 비성서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아리우스가 주장을 굽히지 않자,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처음 열렸던 325년 니케아 공의회였다. 토론 끝에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이라고 선포하였다.

이후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는 특별히 성부와 성자가 하나님인 것처럼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확정하여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발전시켰다.

에베소 공의회(431년) : 그리스도론 논쟁―‘크리스토토코스냐, 데오토코스냐’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444년 사망)과 콘스탄티노플의 다른 감독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서로 조화를 유지하지 않고 투쟁으로 들어간 것은 그리스도교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비극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처녀 마리아를 이미 대중적 신앙 안에서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가 아닌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의회에 의해 지지를 받은 시릴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라는 본문으로 대답하면서 ‘마리아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머니로 본다. 에베소 공의회(431)는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칼케돈 공의회(451년): 신성과 인성

황제 마르키아누스(재위450-457년)가 소집한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가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니케아 신앙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칼케돈의 결정으로 양성론(兩性論,dyophysitism)을 지지하는 비잔티움 교회와 단성론을 지지하는 오리엔트 교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후 제 5차 공의회(553년)는 알렉산드리아 관점으로 칼케돈을 재해석해 보다 건설적인 용어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의 단일한 위격을 형성하도록 연합되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제6차 공의회(680-681)는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의 단일한 위격이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의지(意志)를 가져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참 인간이다.

제7차 공의회,(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 : 성화상 논쟁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들은 8-9세기에 들어 성화상들(The Holy lcons), 그리스도의 모습, 하나님의 어머니, 그리고 교회와 개인의 집에서 숭배되었던 성자들(the saints)에 집중되었다.

교회는 이콘을 정교회의 가르침의 전체로서의 정통신앙(orthodoxe) 그 자체의 표현으로 본다. 이콘에 대한 공경은 제7차 공의회(787년)에서 정식화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교리이다. 성화상에 대한 최종적 승리는 ‘동방정교회의 승리’로 알려졌다. 성화상은 아름다운 예술을 통해서 피조물을 구원하는 영적 능력의 생동감 있는 표현이다. 성화상의 예술적인 완벽성은 조화(調和)와 아름다움(美)으로 환원된 실물의 구체적 예이며 성령의 그릇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성화 상은 승리의 노래요, 계시이며, 악령의 치욕과 성인들의 승리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이다.

공의회의 역사적 의미

7개의 공의회들은 동방정교회에 대단히 중요하다. 동방정교회는 모든 세대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구함에 있어서 공의회들은 성경 다음의 기준과 안내서로 삼고 있다. 7개의 공의회는 325년부터 787년까지 진행된 동방과 서방의 연합 공의회였다. 이 7개의 공의회는 동방의 4개 주요 도시에서 개최되었다. 7개 공의회의 주된 관심은 삼위 하나님의 세 위격과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였다.

오늘날 동방정교회는 7개 공의회만 인정하는 교회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방정교회는 ‘7개 공의회 교회’로 불렸다. 물론 몇몇의 동방교회들은 칼케돈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초기의 4개 공의회만 인정하는 교회도 있다. 로마 카톨릭은 7개의 공의회 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포함한 14개의 공의회까지 모두 21개 공의회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성공회와 칼빈 중심의 개혁교회는 초기 4개 공의회만 인정하였다.

동방정교회의 영성

예배의 아름다움의 영성

9세기경부터 러시아의 공후들은 간헐적으로 세례를 받다가 988년에는 키에프 루스 전체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일도 있었다. 당시 키에프 루스의 통치자 블라디미르(Vladimir) 공후는 한 종교가 자기백성에게 적합한지를 검토하며 여러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성찬전례에 참석한 비잔틴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당에 인도 되었을 때, 만여 개의 촛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진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된 예배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와서는 이렇게 동방정교를 찬미하였다.

“소신들은 소신들이 천국에 있는지 지상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나이다. 지상에는 그러한 광휘와 아름다움이 있을 수가 없기에 제대로 묘사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다만, 그곳에서는 신께서 인간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의 예배의식은 다른 민족의 예배의식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소신들은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없나이다.”

블라디미르는 이듬해(988년)에 세례를 받고 키예프 루스의 국교는 동방정교임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러시아가 동방정교를 받아들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 예배의식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동방정교는 로마 가톨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교의적이고 덜 체계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고, 실제로 동방정교는 관상하고 전 존재로써 체험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러시아인에게 하나님은 진리와 믿음의 신일뿐 아니라 아름다움의 신이었고, 그리하여 신앙이란 곧 아름다움이라는 등식이 그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아름다움은 곧 진리였으며 진리는 곧 선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감히 진단해 볼 수 있는 것은, 예배의 아름다움, 신앙과 아름다움의 합일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중세문학 작품과 찬란한 이콘과 장엄한 성가, ‘미(美)가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러시아의 문화와 예술 전체를 아우르며 천여 년 동안 면면히 지속되어 온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사들의 영성

수도운동은 박해시기에 사막으로 피신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313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밀란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허용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4세기 초부터 이집트는 엄격한 수도운동의 중심지였다. 수도사들은 사막, 광야로 은둔함으로써 교회생활에 예언자적이며 종말론적인 성직의 의무를 다하였다. 은수생활의 큰 모델은 수 도운동의 창시자, 이집트의 안토니오(251-356)이다.

동방정교회 수도사의 첫째 사명은 기도생활이다.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도 기도를 통해서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수도사가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오히려 수도사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하는 것이다.

10세기 이후 정교회 수도원의 주된 중심지는 아토스(Athos)인데, 6,670피트 높이의 꼭대기에 정점을 이루는 북그리스에 있는 돌 바위가 많은 반도이다. 거룩한 산(聖山, Holy Mountain)으로 알려진 아토스는 완전히 수도원 촌(村, town)으로 되어 수도원이 팽창해 나가던 시대에는 거의 4만 명의 수도사가 거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시대 대다수의 영적 아버지들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자신을 낮추면서 영적인 투쟁을 하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에 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떠한가? 학문적으로는 수준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논리를 내세워 지금까지 쌓아온 믿음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마음속에 질문과 의문만이 가득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기 힘든 세상을 만든 것이다. 어째서인가? 기적이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일 뿐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기도와 헤시카즘 - 쉼 없는 기도와 침묵의 영성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정교회 전통에서 ‘예수기도’는 세 단계의 진행과정을 가진다. 첫째, 입술의 기도로서 외적 자아가 육체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단계이다. 둘째, 마음이 무정념, 아파데이아(Apatheia)의 상태에서 평정심을 가지고 드리는 내면적 단계이다. 셋째,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심장으로 드리는 육과 영의 연합된 기도 단계이다. ‘예수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절대적 침묵인데, 이 침묵기도를 가리켜 ‘헤지카즘’(Hesychasm)이라 부른다. 헤지카즘은 13세기 중엽에 정교회 영성의 샘이라 일컬어지는 아토스의 수도사 니케포로스(Nikephoros)가 기도법으로 추구한 이래 정교회 수도사 들의 중요한 기도법이 되었다.

「예수기도」에서 수도정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저자 이에로테오스(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순종, 겸손, 자기멸시, 기도를 향한 끝없는 갈망이다. 영적 아버지에 대한 순종 모든 이들을 향한 겸손이며, 가장 위대한 활동은 겸손과 거룩함을 얻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 부유해진다. 겸손과 거룩함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공동체 사업도 금방 흔적도 없이 무너지지만, 거룩함과 겸손이 함께한다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놀라운 차원의 열매를 맺는다.’

예수기도는 언제라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또는 혼자서도, 공동기도로도, 개인기도로도 할 수 있다. 예수기도는 모든 세대를 위한, 어떤 장소이든, 매 순간을 위한, 사막이든, 도시이든, 초보자이든, 경험자이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장공의 십자군과 제3일의 영성

장공 김재준(長空 金在俊, 1901-1987)은 한국 근대사를 살며, 목사와 신학교수 그리고 저술가로 진리추구와 신앙적 양심으로 사회 역사참여와 구도자적 그리스도인 삶의 본을 보여주었다. ‘영성’이란 달리 말하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초월체험과 그 구현이라 할 수 있는데, 장공이 그리스도교 와 민족역사에 평상 솔직하고 충실하려 노력했던 것도 그의 영적체험과 구현의지 때문이었다.

장공은 3·1운동 이후, 우리민족이 일제에 항거하던 무렵에 고향을 떠나 신앙의 새 여정을 시작하였는데, 가슴이 뜨거워지는 신앙체험, 기도에 열중, 밤새워 성경읽기, 전도와 가난한 자 돕는 마음이 일어나는 등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그의 진리추구의 마음과 청빈, 무소유의 낭만은 장공에게 신앙체험 전과 체험 후의 삶을 확연히 갈라놓는 분기점(turning point)이 되었다. 이런 거듭남(重生)과 신생(新生)의 체험을 통과함으로 그리스도인 장공의 삶의 시작, 새 출발이 되었다. 이것에는 동방정교회의 신생체험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십자군의 영성

장공은 1937년 5월에 개인 신앙잡지 월간 「십자군」(十字軍, The Crusader)을 창간하였다. 장공은 귀국해서 평양에서 신학논문과 글을 발표했고, 얼마 후 간도 용정에서 2년 여 지내면서 많은 글을 발표하며, 고독과 혼란의 어둔 시대 상황에서 예언자적 영성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잡고 행진하는 ‘십자군 영성’을 가졌었다.

역사적으로 ‘십자군’은 중세기 성지(예루살렘)회복이란 명분하에 이교도(이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추방하는 집단이었지만, 장공에게 ‘십자군’은 영적 의미를 갖고 그리스도를 총수로 하며 칼 대신 성경으로, 폭력 아닌 사랑의 실천으로 어둠의 시대 상황에 계몽과 선한 사회사역을 추구하는 복음의 일꾼들을 의미했다. 장공의 십자군은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를 결성했던 무디(3차대각성운동)나 빌리그래함(4차대각성운동)이 승리주의에 도취되어 성장신화를 끌어냈던 것과 반(反)하는 것이었다. 장공은 속간 「십자군」(The Crusader, 1950.1~1956)을 내면서 보수 근본주의, 한국교회 어두운 상황에서 계몽적 역할을 하며, 개혁교회의 개혁적 사명에 온갖 힘을 쏟았다. 1947년-1953년 기장 출범 당시 종교개혁자적 사명으로 한국교회의 바른 방향을 향하여 계몽적 책임성을 갖고 용진했고, 민족수난(6.25전쟁)의 와중에서 교권다툼과 교회 분열의 이중고(二重苦)라는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었다.

장공은 그때에 세계교회의 신학적 주류(主流)에 병진함으로써 교회신학의 본류(本流) 또는 주류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1) 세계교회의 신학은 정통주의에서 그 정반대인 자유주의로 옮겼다가, 다시 종합된 더 높은 차원에로 진행되고 있다. 2) 역사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교는 ‘우리는 세계교회와 병진함과 동시에 전적인 그리스도가 인간생활의 전 부문에 주(主)가 되게 하기 위하여’ 전 존재를 바치려 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이라 하였다. 3) 현실교회 자체의 문제로서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인격적친교에 있다는 것이다.

제3일의 영성

장공은 1970년 9월 「제3일」을 창간, 1974년 4월까지 44호를 발간하고, 1974년 10월 「제3일」 속간 1981년 6월까지 60호를 발간하였다.(카나다)

장공에게 있어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악의 정점에 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아니오’가 바로 무덤을 열어젖힌 부활이었고, 죽음으로부터 제3일째 되는 날이었다. ‘제3일’은 오늘의 역사에서 의인이 가진 특권-역사의 희망은 이 제3일에서 동튼다. 이 날이 없이 그리스도교는 없다. 이 날이 없이 새 역사도 없다고 장공은 창간호 「제3일」(The Third Day)에서 외쳤다.

장공에게 이 세 번째 날은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였고 역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이자 토대였기에 이를 그리스도인의 영적 정체성이라 여겼다. 따라서 ‘제3일’은 지난(至難)했으나 궁극적으로 사망(불의)을 무화(無化)시킨 생명부활의 믿음이며 영성의 본질이었다.

장공에게 그리스도의 몸(교회)은 인간과 우주, 민족과 세계를 아우르는 공동체적 생명을 일컬었으며, 하나님 사랑 안에서 만물이 정신, 영으로 변화하여 자유케 되는 상태와도 비견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믿는 그리스도는, 교회는 물론 세상을 넘어 온 우주를 품어 속량할 만큼 넉넉한 사랑의 존재였다.

초대 그리스도교와 동방정교회는 ‘부활’을 중요하게 여겼다. 부활을 통해 예수는 하나님 현존을 영적으로 매개할 수 있었고, 따라서 역사성을 넘어 종말론적 우주와의 연결고리를 갖게 된 것이다. 예수의 부활로 인해 인간과 우주의 미래, 곧 우주자체의 전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었다. 장공이 끝까지 잡으려 했던 목표, 곧 우주적 생명 공동체는 천지인(天地人)의 일체 관계성이 회복된, 죽음 본능이 지배(역할)못하는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모습이다.


[장공기념사업회 회보 제29호] 2016년 12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