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삶

[장공의 삶] 8장 : 세계로 끈을 잇다(1974-1982) - 북미주 ‘한국인권수호협의회’의 중심이 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8-1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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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장공의 삶] 8장 : 세계로 끈을 잇다(1974-1982)


북미주 ‘한국인권수호협의회’의 중심이 되다


이듬해 김재준은 북미주 각 지방 한인민주단체 총연합회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 모임을 갖기 위해 문재린 목사 부부와 로스앤젤레스에 함께 갔다. 김재준은 권력구조적 연합회가 아닌 기능적인 연합회를 지향하자고 했다. 모두 합의하고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북미주 한국민주건설연합운동(United Movement for Democracy in Korea)’이라 불렀다. 약칭 ‘민건(UM)’ 이라 결정됐다.


“우리는 우선 남한의 반독재 민주운동 지원에 대동단결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체 안에 쐐기를 박을 만한 균열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근자에 KCIA는 국외 교포사회 교란작전은 가속도로 강화되고 있습니다. 기회는 준비한 사람에게 옵니다. 너무 피곤하면 얼마 쉬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포기는 금물입니다.”284)


민건 창건 후 첫 월례회 모임을 열었다. 워싱턴에서 죄수복 차림으로 데모하기로 했다. 김재준은 문재린 목사와 함께 먼저 백악관 공원으로 갔다. 얼마 후 전세버스로 뉴욕,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보스턴에서 동지들이 도착했다. 뉴욕부대가 죄수복을 싣고 왔다. 밤새 부인동지들이 생광목으로 만든 바지저고리였다. 모두가 양복 위에 죄수복을 입고 한국에서 연행된 민주인사들의 이름을 새긴 명찰을 가슴에 달았다. 김재준은 윤보선의 이름을 달았다. 긴 밧줄을 한 사람, 한 사람 손목에 묶고 시가행렬에 나섰다. 선창은 이승만, 시노트 신부가 했다. 백악관, 한국대사관, 일본대 사관, 국회의사당을 지나면서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며 한국 민주화를 외 쳤다. 저녁에는 한경직 목사가 친여적 부흥회를 하는 황재경 목사 교회로 갔다. 교회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민건’ 대원들은 밖에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데모 구호를 외치고 헤어졌다. 다음 날은 주일이었다. 민건은 백인들과 연합하여 예배를 드렸다. 이날 3ㆍ1 민주구국사건으로 수감된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의 연설이 참여한 모든 이들을 감동시켰다.


“나는 내 아들이 먼저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동료들이 다 같이 나올 때까지 거기 머물러야 한다. 나는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만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감옥 안이나 감옥 밖이나 통틀어 ‘감옥’이기 때문이다.”285)


김재준은 친여적 부흥회를 이끌었던 옛 친구 한경직을 만나러 한인장로교회에 갔다. 집회가 끝나는 대로 만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기다렸으나 감감무소식이다. 새벽에 떠난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재준은 그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속내를 알고 싶었다. 아침식사를 같이했다. 김재준은 식탁에 앉자마자 그의 의향을 물었다.


“한 목사는 박정희와 단짝이 되어 그의 부탁으로 북미주를 순강한다는데?”


“천만에! 나는 육 여사 장례식 때 한번 그를 만난 것뿐이오. 그것도 처음에는 순기독교식으로 거행한다기에 허락했는데, 다음에는 불교, 유교, 기독교 종합예식이라고 해서 두세 번 거절했었소. 그랬더니 문공부에서 일부러 사람이 와서…… 기독교로서의 기도를 원하는 것뿐이 아니겠소? 그러니 내가 거절할 말이 없잖소!”


“조찬기도회에서 한 목사는 박정희를 모세 같은 민족지도자라고 극찬 했다면서?”


“내가 언제 그랬소? 그러나 대통령을 잘하라고 기도하지 못 되라고 기도할 수야 없지 않소! 나는 교회 제일주의자란 말이오.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라는 거요. 박 정권은 이 일을 방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지원 하는 편이오.”286)


김재준은 한경직에 대해서 크게 실망했다. 한경직은 박정희 정권하에 있는 특권층이 대부분 영락교인이어서 한국 민주화를 위해서 어떠한 발언도 못하고, 민주화운동을 위해 감옥에 들어간 젊은 목사들에 대해서도 기도 한번 안하는 목사였기 때문이다. 김재준은 그가 목사이기 전에 참 크리스찬이 되기를 원했다.


“나는 크리스찬 된다는 것과 교회주의자가 된다는 것과는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 참 크리스찬은 하나님의 의로 교회를 비판한다는 것, 신앙이란 것은 수(數)의 마술에 마취되지 않는 의로운 바탕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 ‘교회주의’에서 ‘그리스도주의’에로 방향을 다시 모색해야 한다는 것.”287)


김재준은 이톤 기념교회에서 목사장립식에 참석차 방문하였다가 문익환 목사가 단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 목사 어머니가 귀국한다기에 “하나님께 바친 몸이니 내 맘대로 해서는 안 된다. 박이 죽이면 영광입니다 하고 죽어도 좋다. 그러나 내 손으로 죽는 것은 자학이오 진정한 신앙적 순종이라기 어렵잖느냐.”288)는 당부를 드렸다.


김재준은 ‘북미주 한국 민주건설 연합운동’에 이어 ‘북미주 한국민주화 단체연합운동’을 결성하기 위한 회의차 세인트루이스로 갔다. 절차를 거쳐 이름을 ‘민협’이라 약칭하고, 중앙집행위 의장으로 김재준이 선출됐다.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1978년 새해를 맞았다. 김재준은 새해를 맞이하여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야만 이 한해도 새롭게 용기를 내어 민주화운동을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장공도 명색이 목사인데 왜 정치 문제에 그렇게 열을 올리느냐는 충고도 받는다. 그러나 ‘민주운동’은 정치 이전의 문제다. 민주주의란 개인 자유에서 싹이 터, 사회, 국가에로 자란다.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그는 인간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자기를 배반할 여백을 인간에게 주지 않았다면 그 인간은 하나님의 로봇일 뿐이다. 독재자는 인간을 자기의 로봇로 만들려 한다. 자유는 자기만이 갖겠다고 선언한다. 적어도 인간 구원을 설교하는 목사, 크리스찬, 그리고 엘리트, 또는 절대 다수의 인간이 의식화한 민중이라면 잠잠할 수 없다. 그래서 민주, 즉 백성이 주역이라는 진실을 말하고 글로 쓰고 몸으로 데모하는 것이다. 민주운동 대열은 목 사의 이단도 여가도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본직이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목사만이 방관, 냉소, 굴종, 또는 도피의 연막 속에 자신을 묻는 것이다.”289)


김재준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하나님을 닮아 자유하는 인간, 그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현실에서 본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290) 민주화운동은 그 부름에 응답한 것뿐이었다.


국내에서 모든 민주단체를 하나로 규합하여 ‘민주주의 국민연합’을 발족했다. 문익환은 유신체제하에서의 대통령 선거를 전면 부정하고 반독재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성명서를 냈다. 김재준은 문익환과 문동환이 구속됨에 따라 윤보선과 직접 교섭했다. 김재준은 ‘민건’ 총회를 소집하여 국내에 있는 ‘민주주의 국민연합’의 창립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공식절차를 통해서 ‘민주주의 국민연합 북미지부’ 발족을 선언하는 성명서를 냈다. 상임집행위원장으로 김재준이 선출됐다. 국내와 국외가 하나로 뭉쳐서 반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의 선언이었다.


“인간 존엄과 민권 신장이 강력하게 전개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민족주의가 인간화하고 대중화해야 하겠다고 외칩니다. 이것은 민족의 의무임과 동시에 교회의 본직이 됩니다. 인간 구원이 교회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일을 위하여 국내 국외 우리민족이 공동전선을 형성해야 하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291)


김재준은 평소에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며, 큰소리 한번 내는 일이 없었다. 항상 먼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을 존중했다. 그러나 공식석상에서의 그의 모습은 칼날같이 단호했다. ‘민건’ 총회 2차 대회 때의 일이었다. ‘민건’ 전체 구성원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먼저 남한 민주화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룹과, 친이북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날 통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룹이 회원수로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시도로 회의가 진행될 수 없었다. 상황을 정리하고자 김재준은 언권을 얻어 자신이 사회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여기저기서 큰소리가 오갔지만 김재준은 이에 개의치 않고, “내가 위원장이니까 직분상 당연한 것이다. 사무국장 한승인 선생은 내가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라며 회의를 진행시켜 마무리했다.


김재준의 나이 79세, 팔순을 앞에 둔 그는 고향이 그리웠다. 어린 시절 동무와 뛰놀던 들과 산이 그리웠다. 당나라 현종 때 벼슬아치인 하지장의 회향우서(回鄕偶書)로 마음을 달랬다.


어려서 고향 떠나
나이 먹어 돌아왔네.
‘사투리’는 그대론데
내 머리만 희었구나!292)


이듬해 김재준은 지인들로부터 귀국을 종용받았다. 지난해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세 사람의 연서로 귀국을 요청한 바 있었다. 김재준은 이상철 목사와 상의했다. ‘그냥 나가서는 안 된다. 이곳에의 삶을 정리하고 나가야겠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김재준은 자신의 신학에 대해서 정리하고 싶었다.


“요새 교회 신학이니 화해의 신학이니, 혁명의 신학이니, 민중의 신학이니 하는 형용사 붙은 신학이 말버릇처럼 유행하는데 그보다도 더 깊이 ‘우리 혈맥에 뿌리박은 신학’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한국 민족과 역사에 ‘토착화’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구상하고 싶다는 말이 되겠다. 동양신학, 한국신학, 생활신학 등등의 이름이 붙어도 좋겠다. 더 나아가서는 유대교가 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싶다는 것이겠다. 이것은 ‘국교화’하자는 말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을 민족적 사회화한 기독교로 남과 북과 해외이주 한인의 공통적인 종교로 우리 민족의 모든 생활의 활력소가 되게 하자는 생각이다.”293)


김재준은 서구의 기독교가 아닌 한국적으로 토착화된 기독교, 신앙생활이 아닌 생활신앙이 바탕이 된 생활신학을 통해서 한국 교회가 이 나라, 이 민족의 공통의 종교가 되어 한민족의 활력소가 되기를 바랐다.


김재준은 미국에서의 ‘민건’ 활동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74년 11월 서독 민주운동과의 공동전선을 펼치기 위해 ‘민건회(재독 민주건설협의회)’ 창립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이후 1979년 3월에는 당시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있던 손규태 목사의 초청을 받고 독일로 갔다.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 창립 10주년 행사에 초청받았고 주제강사로서 통일 문제를 놓고 강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 독일 방문은 1979년 11월 일본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거쳐 가는 정도였다. 네 번째 독일 방문은 1981년 4월 서독의 밧불(Bad Boll)에 서 이뤄졌다. 이 회의는 1975년 제네바 회의에서 다뤄졌던 내용의 연장선상인 “한국의 새 사태와 한국 교회의 자세”를 주제로 했다. 이 회의의 주요 강사로는 동경대의 사까모도, 그레고리 헨더슨, 지명관이었다. 이 회의가 끝난 후 바로 ‘한국 민주화 기독자동지회’ 모임이 개최되었다.


김재준의 해외활동 폭은 굉장히 넓었다. 국내, 일본, 캐나다, 서독, 스위스를 자기 안방 다니듯이 다녔다. 그의 사상의 폭 역시 넓었다. 좌우를 넘나들었다. 신앙인, 비신앙인, 성직자, 평신도 모두를 아우르는 넓은 가슴을 지녔다. 이 넓은 가슴은 오로지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목표만 향해 있었다.294)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에 김재준이 보여준 사회 참여 와 활동은 예언자적 행보였다. 해외에서 활동을 통해 김재준의 조국애와 민족애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다.295)


“지금 한국민은 강도당하고 피투성이 되어 길가에 쓰러진 죽어가는 형편에 있습니다. 너무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짐승이나 노예가 아니고 자유하는 ‘인간’이란 각도에서 본다면 반드시 ‘과장 표현’이랄 수도 없겠습니다. 독재자는 국민을 이웃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 재산이나 원수로 대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인간화하기 전에는 독재할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독재자에게는 이웃이 없습니다.”296)


위의 글은 김재준이 1976년 2월 20일 ‘토론토 일본교회 부인 수양회’에서 강의한 내용 중 일부이다. 김재준은 한국민이 ‘자유하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길 바라면서 일했다.


또한 김재준은 북미주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민주화운동과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며 몸바쳐 일했다. 이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문재린, 이상철, 김상돈, 이승만, 차상달, 강영채, 홍동근, 선우학원, 지명관, 홍성국, 한승인, 김응창, 안병국, 강석원, 양준철, 이창식, 이근팔, 김운하, 홍성빈, 장성남, 구희영, 전규홍, 이성호, 이재현, 정상균, 나행렬, 홍근수, 노별수, 신현정, 박상증, 손규태, 오재식, 손명걸, 이삼열, 장성환, 박명철 등 수많은 민주화운동 동지들이 함께했다. 시노트 신부, 오걸 목사, 슈나이더 목사, 그레고리 헨더슨, 프레이저 의원 등도 함께했다.297)


1979년 말과 1980년대 초 한국의 정세는 불안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했고,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부를 장악했다. 김재준은 ‘김대중’을 대통령 단일후보로 하자는 친서를 서울에 보냈다. 1980년 5월 16일 학생들의 데모, 군부의 조기선거와 정권 이양 약속, 1980년 5월 17일 군부가 행정기관을 점령하고 김대중을 연행해 갔다. 각 대학은 휴교령을 내리고, 군인이 대학을 점령했다. 5월 18일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전두환은 군대를 광주로 보내 죄 없는 시민들을 총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인간관계에 냉기가 서린다. 왜 그렇게 됐을까? 독사가 물고 감고 뒤틀리고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독사는 광주에서 천명 단위의 인간을 개구리 삼키듯 잡아먹었다. 그리고서는 김대중이란 큼직한 사슴을 통째로 꿀꺽해버리려고 두 가닥 혀를 남실거린다.”298)


‘민건’ 초청으로 이우정이 토론토에 왔다. 정권에 의해 인권이 유린되는 한국의 실정을 보고하는 강연을 했다. 재미한인기독학자회는 제14회 연차대회를 마치고 전두환 쿠데타 사건과 미국 정부와의 관련한 항의 데모를 열었다. 김재준은 이재현, 동원모, 이상철, 김병서와 함께 국무성에 찾아가서 전두환의 광주 시민 학살사건과 미국 정부의 태도에 대해 밝혀줄 것을 요구했으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피하고 없었다. 토론토 한인교회에서는 5・18 광주 민중항쟁으로 희생당한 시민들을 추도 하는 예배가 열렸다.


“슬픈 민족의 슬픈 역사다. 우리 민족은 슬픔을 마시고 그것을 영탄하는 것으로 발산한다.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월왕 구천(越王句踐)의 영악스러움이 거의 없다. 슬픔에 깊이가 없달까. ‘일찌감치’ 잊어버린다. 오늘 모임에는 ‘Lest We Forget!’의 핵심이 돼야 한다. 슬픔의 심연에 잠겨들지 말자. 오늘의 ‘악귀’에게는 내일의 약속이 없다. 우리는 오늘의 비극을 내일의 소재(素材)로 역이용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299)


김대중은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재준은 민주 동지들과 함께 김대중 구명운동을 펼쳐나갔다. 10월 5일,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드리는 성찬주일을 맞았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성찬에 참여했다. 김재준은 성찬식을 통해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 위에서 지옥의 밑바닥까지 내리꽂힌 깊이다. 인간끼리의 사랑은 수평선을 타고 퍼진다. 그 넓이가 넓을수록 더 인간적이다. 그런데 무턱대고 넓어지지도 않는다. 산이 막히고 길이 험하고 어둠이 짙고 악령이 덤빈다. 그래도 사랑의 길을 걷노라면 내 맘이 트이고 내 길도 열린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걸으시기 때문이다. 내 삶의 광야에서도 예외는 없었다.”300)


김재준은 사무차 캐나다 연합교회 본부에 방문 온 기장총회 박재봉 총무를 맞이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상황을 전해 주었다. 교세가 확장되고 교인수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김정준 학장이 후배들에게 ‘기장성’을 잃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기장성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기로는 바울이 주장한 ‘복음의 자유’와 야곱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이다. 기장은 정통신학이라는 율법주의와 싸웠다. 복음의 자유가 그 군기(軍旗)였다. 그리고 신앙이란 가면 속에 숨은 무법주의와 싸웠다. 그것은 기독교 윤리, 즉 개인관계에서의 사랑과 사회관계에서의 정의를 사는 생활태, 다시 말한다면, 속빈 겨껍데기나 과실 없는 무화과나무가 아닌, 결과지로 살자는 구호였다.”301)


김재준은 박재봉 목사에게 기장총회의 방향과 일관성만 지킨다면 ‘기장’은 한국 역사의 소망이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기장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고 여호와의 날이 역사에 편만(遍滿)할 날을 갈망하며 촉진시켜 왔다. 총회에 보낸 편지 속에 김재준이 기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를 잘 알수 있다.


“(1) 그 수는 소수입니다만, 그 소수가 창조적인 소수임을 아낌없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참예한다는 ‘고난의 친교’가 생활 사실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3)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 갇힌 자, 포로된 자, 눌린 자, 병든 자의 친구가 되어 그들에게 ‘해방자’ 그리스도를 몸으로 증거하고 있다는 새로운 선교 사실 때문입니다. (4)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비역사적이고 타계적인 보수신학에서 탈출하여 ‘예수와 함께’ 예수 ‘이미지’로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뚜렷한 역사 의식에서 그들 자신이 역사 변혁의 제일선에 나섰다는 생활신앙의 일꾼임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5) 그리스도가 몸소 한국 에 오셔서 여러분과 함께 살고, 일하고, 고난받고, 소망으로 격려해 주신다는 심상을 여러분의 생활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302)


김재준은 비록 기장이 창조적 소수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하며, 역사를 변혁해 나가는 하나님의 참일꾼으로 보았다.


김대중이 석방됐다.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감형받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김재준은 83세의 몸으로 워싱턴 공항에 마중 나갔다. 자기 양심을 지켜 몇 번이나 죽음에서 살아난 ‘고난의 인간’이라는 존경에서였다. 그날 밤 늦게까지 ‘정치담’이 아닌 ‘고난의 종’으로서의 광야의 삶을 들었다. 김재준은 김대중을 예언자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가 정치인이기 때문에 정치적 예언자로 평가했다.303) 김재준은 그가 하루속히 귀국해서 ‘국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기를 원했다. 그리고 자신도 귀국을 결심했다. 캐나다에 있는 동안 북미주와 독일, 그리고 일본을 오가면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동분서주했던 김재준은 기장총회 총무를 맡고 있는 김상근 목사에게 “형편 닿는 대로 김재준은 귀국하렵니다. 여기서는 너무 편한 팔자인 것 같아서 하나님께 죄송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304)


“그가 귀국을 결심한 것은 ‘조국 땅에 와서 묻혀야 한다’는 논리 때문이라기보다는 ‘고난받는 후배들이, 목사님이 옆에 계시기를 원합니다’라는 호소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가서 함께 고난받자는 동지의식이 더 많이 작용했다고 나는 알고 있다.305)


김재준은 고난받는 후배들과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생을 동지들과 함께 고난받자는 결심을 했다. 그가 살아온 세계는 각박한 현실의 연속이었다. 안으로는 선교사들의 보수주의 신앙으로 굳어버린 화석화된 한국 교회의 핍박이 있었고, 밖으로는 일제 식민지 치하, 군정, 독재 정권의 횡포, 비인간화 사회의 거센 풍랑에 맞서야 했다. 김재준은 역사 참여가 살아 있는 신학을 외치고 세속화된 교회의 개혁과 국민의 민주화를 위해 비폭력의 투쟁을 해왔다. 이것이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사상적 골격을 형성했다. 귀국과 더불어 그는 설교와 강연을 통하여 전 우주적 사랑공동체로의 연대와 협력의 길을 제시했다.306)


[각주]


[284] “토론토에서 舊友 한경직을 만나서”, 위의 책, 313.
[285] 위의 글, 314.
[286] “익환의 단식투쟁”, 『전집』 제14권, 322.
[287] “첫 머리에”, 위의 책, 338-339.
[288] 손규태, “장공의 이데올로기 이해”(장공 사상 연구 목요 강좌, 2003/10/30), 7.
[289] “민족주의의 인간화”, 『전집』 제16권, 263.
[290] “첫 머리에”, 『전집』 제14권, 391.
[291] 또 한번 귀국 얘기“, 『전집』 제15권, 203.
[292] 박명철, “장공의 해외활동과 그 성격”, 『장공 사상 연구 논문집』,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회(오산 :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427-428.
[293] 위의 책, 428.
[294]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준다면”, 『전집』 제16권, 190.
[295] 김경재, 『김재준 평전』, 171.
[296] “뱀과 두가닥 혀”, 『전집』 제15권, 72.
[297] “봄 안 오는 한국역사”, 위의 책, 231.
[298] “세계 교회의 성찬의 날”, 『전집』 제15권, 263.
[299] “東家食西家宿”, 위의 책, 266.
[300]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여러분에게 드리는 편지”, 『전집』 제11권, 334.
[301] “권력자와 야인”, 『전집』 제15권, 379.
[302] 김상근, “인격으로 인격을 배웠다”, 『장공이야기』, 265
[303] 이상철, “온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사신 분”, 『장공이야기』, 53.
[304]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252.
[305] “새벽 날개 타고”, 『전집』 제17권, 49-50.
[306] “생명 운동”, 『전집』 제17권,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