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삶

[장공의 삶] 7장 : 개혁의 불을 들다(1960-1973) -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에 앞장서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8-1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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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장공의 삶] 7장 : 개혁의 불을 들다(1960~1973년)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에 앞장서다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추진하려고 여론을 부추겼다. 지식인들은 이 일에 대해서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언론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자, 1969년 여름 어느 날 김재준은 박형규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당시 박형규는 《기독교사상》의 주간이었다. 김재준의 방문에 박형규는 당황했다. 직접 사무실로 찾아오는 일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243)


“자네, 《기독교사상》이 뭐하는 잡진가?…… 자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나? 3선 개헌을 하는 판이야. 3선 개헌을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이런 때 《기독교사상》이 3선 개헌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예수께서도 ‘예’ 할 때는 ‘예’ 하고 ‘아니오’ 할 때는 ‘아니오’ 하라고 하지 않으셨나? 《기독교사상》마저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나?244) 박정희 가 아무래도 3선 개헌을 해서 영구집권을 도모하는 것 같다. 지금 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얼마나 오래 군부 독재하에서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나더러 잡지를 통해 개헌 반대를 하라는 것이었다.…… 네, 잘 알겠습니다. 힘 자라는 대로 해보겠습니다.”245)


김재준은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저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제자인 박형규를 찾았던 것이다. 스승의 요청에 즉각 응답한 박형규는 《기독교사상》을 ‘개헌론’ 특집으로 꾸며 개헌반대 여론을 벌여나갔다.246)


1969년 박정희는 헌법을 고치자고 발표했다. 집권 10년이 되어서도 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은 않고 영구집권을 꿈꾸고 있었다. 박정희는 총통에 안고 싶었던 것이다. 장공의 삶은 역사의 폭풍 중심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247) 헌법의 명시된 2선 이상은 대통령을 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고치려는 것이었다. 이에 반대하는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하루는 김상돈이 우격다짐으로 김재준을 태워 준비위원회장으로 데리고 갔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곳은 종로회관이었다. 규약이 통과되는 무렵이었다. 그 규약에 의해 장준하, 윤길중, 이철승, 송원영 등이 공천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들은 김재준을 의장으로 호명했다. 김재준은 정치에 정자도 모른다며 두세 번 거절했다. 그러나 한 달 뒤에 있을 정식 발기인 대회를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며 간청했다. 김재준은 한 달 준비기간만이라는 조건으로 승낙했다.248)


한 달 후에 발기인대회에서 김재준은 다시 위원장이 됐다. 박정희 앞에서 사퇴하는 것은 약점이라 생각되었다. 김재준은 정치를 모르는 자신이 위원장이 된 데에는 만약 정당 정치인이 뽑힐 경우 조직이 와해될 우려가 있고,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에 깊은 관심, 사회적인 명망과 영향력 등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정권에 대한 야심이 없는 김재준과 같은 사람이 그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249)


“결국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조직되고 내가 ‘위원장’이란 직책을 떠맡게 됐다. 내가 무슨 정치나 사회집단의 ‘감투’에 야망이 있었다면 몰라도 진정으로 싫다는 데 그렇게 됐다는 데는 일종의 ‘신의’가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불의에의 항거가 그대로 ‘정의’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아니오’ 할 것을 ‘아니오’ 할 용기가 없다거나 ‘아니오’ 할 것을 ‘예’로 번복하는 것은 가장 비윤리적인 ‘외식’이고 비굴이기 때문이다.”250)


김재준은 이후부터 ‘한국 민주화운동’을 본업같이 하게 되었다. 한국 민주화는 곧 인간화이며 인간화는 곧 하나님의 본래 창조의 목적이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을 안하면 스스로 괴로워 못 견뎌했다. 김재준이 위원장직을 맡게 되자 기관원의 감시가 심해졌다. 운신하기 힘들 터인데 오히려 기관원을 품에 안았다.


“그 어르신은 기관원을 따돌리려고 하지 않고 품에 안고 다니셨다. 버스를 타고 귀가하실 때 오히려 기관원에게 ‘고충이 많지?’ ‘지혜롭게 처신 해!’ 하셨다 한다. 귀가하신 것을 보고 돌아가려는 기관원에게 ‘들어와 차 마시고 가라’ 하시며 사모님에게 차를 끓여 오도록 하셨다. 때로는 신문사에 보낼 원고의 교정을 부탁하여 결과적으로는 그 말단 기관원이 보고할 자료를 얻게 해주시기도 하셨다.”251)


청와대는 《대한일보》 김연준 사장에게 압력을 넣었다. “당신 신문사 논설위원이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 위원회 위원장이라는데 사장으로서 무슨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252)는 것이었다. 김연준은 김재준이 신문사와 관계없다 하면 끝날 일이지만 계속 논설위원으로 있기를 원했다. 때마침 런던에서 YMCA 세계대회가 열리자 김은우 논설위원과 함께 여비를 주어 보냈다.


김재준은 투쟁위원회에 이를 알리고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 현시학 영사와 강원용 목사를 만나고 열흘 후에 캐나다 토론토에 갔다. 자녀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토론토에 도착하자 강원용에게서 급히 귀국하라는 전보가 왔다. 투쟁위원회에서도 연락이 왔다. 신민당이 공화당을 탈당한 국회의원들을 포섭하기 위해 새로 창당한다는 것이었다. 김재준은 이튿날 귀국했다. 귀국하자 이철승이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했다. 몇 주일 후에 있을 국회투표를 앞두고 투쟁위원회는 효창공원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6만여 명이 모인 그 자리에서 장준하가 사회를 보고 김재준이 개회사를 했다. 많은 야당 정치인들이 연설했고, 그중에 김대중의 연설이 6만 청 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투표 전일에는 국회의사당을 향해 대규모 시가행진을 했다.253)


3선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더라도 통과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국회의 원들이 밤낮으로 의사당 앞에서 농성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토요일 밤 12시 농성하는 국회의원들에게 내일 일요일이니 의사일정이 없다면서 집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몰래 의사당 길 건너에 있는 제3별관 뒷문을 뜯고 들어가 촛불을 켜고 3선 개헌안 통과라고 속삭인 뒤 방망이를 두들겼다. 그리고 각 신문사에 통고했다.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것이다. 박정희는 새벽 3시에 개헌안에 서명하고 기자들에게 발표했다. 김재준은 투쟁위원회 실행부를 모으고 국민투표 절차가 끝날 때까지 투쟁해 보자고 했다. 그러나 국민투표도 엄청난 부정과 조작으로 끝났다. 박정희의 의도대로 ‘3선 개헌안’이 통과 되어 투쟁목표가 사라지게 되자, 자연히 ‘3선 개헌 반대투쟁위원회’도 자연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 김재준은 투쟁위원회 해체식에서 간단히 인사하고 물러났다.254)


“이제부터 장기적인 국민민주화 계몽운동에 각자 있는 고장에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교회의 사회화와 국민의 민주화에 미력이나마 장기 봉사할 작정입니다.”255)


김재준이 3선 개헌 반대에 나섰을 때 보수적인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그의 정치 참여를 못마땅해했다.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김재준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하룬들 살 수 있느냐?” “정부에서 하는 대로 하는 친여적인 형태는 정치가 아니고 정부의 잘못을 충고하는 것만이 정치 관여냐?”라고 항변했다. “김 목사가 정치인들과 관계없이 교회지도자로서 호소했다면 우리도 따라나섰을 것이다.”라는 사람도 있었다. ‘투쟁’이라는 단어도 맘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김재준은 “의를 위한 ‘투쟁’을 회피했다면 예수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도 세상에 싸움을 일으키러 왔노라 하지 않았는가?”라고 항변했다.256)


김재준은 3선 개헌 1년쯤 후에 《제3일》이라는 월간지를 내기로 했다. 교회의 사회화와 국민의 민주화를 위한 계몽운동에 그 목적이 있었다. 박형규, 현영학, 서광선, 이문영, 홍동근 등이 잡지의 동인으로 함께하기로 했다. 월간지의 이름을 《제3일》로 하자고 했다. 다만 한글로 하고 삼이라는 숫자를 아라비아로 쓸 것을 조건으로 붙였다. 김재준이 한문을 사용하는 까닭이다. 박형규가 문공부에 가서 등록을 했다. 그래서 1970년 9월에 창간호를 냈다. 김재준은 ‘제3일!’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한 그날! 그날의 희망이 우리 민족에게 피어나기를 원했다.257)


“오늘도 내일도 나는 내 길을 간다! 이것이 예수의 삶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대로 가지 않는다고 그를 잡았다. 그래서 첫날에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다음 날에는 무덤 속에 가두고 인봉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기 악의 한계점에서 ‘됐다’ 하고 개가를 부를 때, 하나님은 ‘아니다!’ 하고 무덤을 헤친다. 예수에게는 이 ‘제3일’이 있었다. 그의 생명은 다시 살아 무덤을 헤치고 영원에 작열(灼熱)한다. ‘제3일’ 그것은 오늘의 역사에서 의인이 가진 특권, 역사의 희망은 이 ‘제3일’에서 동튼다. 이날이 없이 기독교는 없다. 이날이 없이 새 역사도 없다.”258)


《제3일》 출판에 관한 에피소드다. 어느 날 제자인 윤반웅, 전학석, 노신영 등이 김재준의 집을 찾아와 “‘우리도 《제3일》’을 후원하겠노라고 하며 함석헌도 하는데 천 명 가까운 제자를 두신 선생님이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후원회를 조직하겠다고 했다. 함석헌은 김재준보다 3개월 앞서 《씨ᄋᆞᆯ의 소리》란 월간지를 냈다. ‘제3일 간행후원회’라는 이름으로 윤반웅, 전학석, 문익환, 문동환, 노신영이 김재준의 집으로 가서 후원회를 발족시켰다. 후원회장으로 문익환 목사, 서기 겸 회계로 이우정이 맡아서 수고했다. 김재준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장기전이 될 것을 전망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교회의 사회화’를 위해서 일하겠노라 다짐했다. 《제3일》이란 동인지는 그가 생각한 ‘장기적 국민 민주화 계몽운동’에 장기적으로 봉사하기 위한 것이었다.259) 김재준은 《제3일》 창간에 뜻을 모아준 동지들의 마음을 모아 ‘창간하는 마음들’에 담았다.


“이 무서운 침묵 속에서, 작은 소리라도 듣고 싶어 하고 외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아주 소수파에 속하는 ‘증언자’들이다. ‘신에게 정직’하기보다는 ‘자기에게 정직’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교권자들이 예수에게 ‘좀 침묵을 지켜 달라’고 했을 때, 예수는 ‘내가 잠잠하면 이 길가에 있는 돌들이 부르짖고 나설 것이다’ 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증언자의 소리를 막아낼 사람은 없다. 그것은 화산 분화 같이 치밀어오르는 ‘신의 대신’으로 되기 때문이다.”260)


1971년 4월 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는 공고가 나왔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이었다. 이를 앞두고 1971년 4월 19일 서울 종로 YMCA 회관에서 ‘민주수호 국민협의회’가 결성됐다. 대표위원으로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함석헌, 지학순 주교가 선정됐다. 결의문 초안을 천관우가 쓰고 이병린과 김재준이 검토했다.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민주적 기본절서가 파괴된 현실을 직시하고 그 회복에 국민의 총궐기를 촉구한다. (2) 이번 선거는 민주헌정의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것이므로 이 선거에서 부정 불법을 감행하는 자는 역사의 범죄자로 민족 적 규탄을 받아야 한다. (3) 국민은 집권층의 탄압과 유혹을 일축하고 신성한 주권을 행사하라. (4) 학생의 평화적 양심적인 데모에 잔학한 탄압을 가하는 정부당국의 행위에 강력히 항의한다. 등등261)


개표 날 박정희는 94만 여표 차로 겨우 이겼다. 그동안 온갖 금권, 관권 등을 동원해서 치른 부정선거인데도 100만 표도 되지 않았다. 사실상 박정희의 패배를 의미했다.262)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이 치열할 무렵, 기독 학생들이 시국대책을 토의한다고 김재준에게 강연을 부탁했다. 강연 날 김재준은 학생들에게 신학적으로 일관된 신앙과 이론을 바탕으로 투쟁 하여야만 장기전을 치를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의 방향을 찾으라고 권고했다.


박정희는 1971년 10월 15일 서울 일대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학원을 점령하고 데모하는 학생들을 체포했다. 12월 6일에는 국제정세의 급변, 북한의 남침 준비 등을 구실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김재준은 그날로 자택에서 연금됐다. 글로 비판하고 설교나 강연에서 인간 존엄과 사회 정의, 해방 신학 등을 말했다. 또한 1972년 3월 28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초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5월부터 정치범의 석방을 위해 탄원엽서 보내기 운동을 주최하기도 했으며, 월보 《앰네스티》를 발행했다. 양심수 석방, 고문 종식, 사형제도 폐지 등을 위한 국제적 인권 연대운동을 펼쳤다.263) 박정희는 이듬해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 정당정치 활동 금지, 집회 금지, 언론출판 보도의 사전 검열, 대학 휴교, 군법회의 설치 등을 강행했다. 1972년 10월 27일, 박정희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유신헌법’을 의결했다. 영구집권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이때 전주 남문교회 은명기 목사가 반대 변론도 못하게 하고서 무슨 투표냐며 공개적으로 항거하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수감됐다. 김재준도 자택연금을 당했다.264)


학생들이 국민의 생존권을 위한 궐기대회를 열며 데모에 나섰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11월 9일 고려대, 그리고 같은 날 한국신학대학생들이 반정부 선언을 발표했다. 1973년 11월 17일 한국신학대학생들이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이 무렵 한신대에서는 학생과 교수, 그리고 학장이 일체가 되어 다같이 삭발했다. 이 모습에 감격한 함석헌도 함께 삭발하고 수염도 깎았다.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을 단속할 학생궐기대회는 매일 계속 됐다. 12월에는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이 반정부 투쟁에 합류했다. 전국적으로 반정부 투쟁이 벌어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김종필 국무총리는 1973 년 12월 4일 종교계, 학계, 언론계와의 ‘대화의 광장’을 제안했다. 1973년 12월 19일 김재준을 포함하여 백낙준, 함석헌, 유진오, 이인, 천관우, 지학순, 김수환, 한경직 등 기독교계와 사회 각층 재야 원로 15인의 이름으로 민주 개헌 건의와 박정희와의 직접 면담 요청을 했으나 박정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무렵 장준하는 민주 개헌 100만인 서명운동을 발기했다. 한 달 안에 100만 명을 돌파할 기세였다. 박정희는 이 일로 장준하를 구속했다.265)


1974년 1월 8일 긴급 조치령을 발동했다. 김 재준은 이번에도 자택 연금을 당했다. 집안에 서는 관할 경찰서 형사가, 밖에서는 기관원들이 감시했다. 네 번째 감금이었다. 몇 달 후에 김 대중이 찾아왔다. 김대중이 와서 자신의 신념과 미래의 청사진을 밝혔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몇 번이고 기적적으로 살려주셨으니, 장차 무슨 심부름을 시키시려는 경륜이 있으신가 싶어 그 심부름에 충실하려고 밤낮 청사진을 그려보고 있습니다. 정부 조직부터 말단 동장, 반장에 이르기까지 조직망을 만들어 봅니다. 진짜 민주국가를 세워 보렵니다. 단계적인 남북통일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을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된다면 그것도 하나님 뜻이고 하나님의 더 높고 깊은 경륜이라 믿고 아무 미련 없이 순종하렵니다.”266)


김재준은 김대중에게 “당신 몸이 민족의 몸이고 나라의 몸이니 부디 자중하라.”267)고 격려해 주었다. 이 무렵 김재준의 자택은 온통 군경이 에워싸고 있었다. 자유 한국을 염원했던 김재준은 이렇게 자택연금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해외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각주]


[243] 신홍범 정리,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 박형규 회고록』, 창비, 2010, 157.
[244] 박형규, “장공과의 만남과 억지 제자의 변”, 『장공이야기』, 333.
[245]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91.
[246] 손규태, 『장공 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 63.
[247]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86.
[248] 위의 책, 186.
[249] “한국 민주화운동의 연속선”, 『전집』 제14권, 168.
[250] 서도섭, “가운이 필요치 않은 분”, 『장공이야기』, 132.
[251] “잠시 영국 런던 YMCA 세계대회에”, 『전집』 제14권, 73.
[252]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88.
[253] 위의 책, 189.
[254] “삼선개혁 투쟁위 해체”, 『전집』 제14권, 83.
[255] “박형규와 그 그룹”, 『전집』 제14권, 83-84.
[256]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92.
[257] “제3일”, 『전집』 제9권, 289.
[258] 손규태, 『장공 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 64-65.
[259] “제3일”, 『전집』 제9권, 290.
[260] “3선 개헌된 헌법에 의한 선거”, 『전집』 제14권, 107.
[261]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93.
[262] 위의 책, 194.
[263] 위의 책, 194.
[264] “공백 속 회리바람”, 『전집』 제14권, 440.
[265] 위의 글, 441.
[266] 김상근, “인격으로 인격을 배웠다”, 『장공이야기』, 263.
[267] 위의 글,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