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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장공의 삶] 4장 : 배움의 길에 서다(1927-1932) - 근본주의의 실체를 꿰뚫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7 09:35
조회
983

[장공의 삶] 4장 : 배움의 길에 서다(1927-1932)

근본주의의 실체를 꿰뚫다

김재준은 일본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때 송창근은 먼저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떠나 있었다. 송창근은 김재준에게 프린스턴 대학의 입학허가증과 1년 치의 장학금 200달러를 보내주었다.

송창근은 김재준의 길잡이 노릇을 해주었다. 함경도 웅기에서 살아가던 김재준을 서울로 이끌어주었고, 서울에서 일본 청산학원으로, 이제는 다시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안내했다. 프린스턴으로 이끌 때는 “장학금 허락서와 입학증명서 등을 보내어 여권수속을 가능하게” 해주었다.78) 송창근은 김재준을 더 큰 세계로, 더 큰 무대로 이끌어주었다. 배움의 꿈을 심어준 장본인이었고 선배였다.79)

김재준은 미국으로 떠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해야만 했다. 미국까지 가기 위해서는 거금의 뱃삯이 필요했다. 김재준의 형은 자신의 밭을 담보로 50원을 대출받고 김재준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김재준은 윤치호를 찾아갔다. 당시 미국에 유학가는 과학도와 신학도에게 윤치호가 여비를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윤치호를 찾아간 김재준은 몇 마디의 대화 후 바로 미국에 갈 여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래는 윤치호와 김재준의 대화이다.

윤치호 : 무슨 공부할 건가? 김재준 : 신학입니다.
윤치호 : 어느 신학교?
김재준 : 프린스턴에 입학돼 있습니다.
윤치호 : 그럼 가서 공부 잘하게!
김재준 : 감사합니다. 무슨 일러주실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윤치호 : 미국 한인사회란 좀 복잡하고 갈래도 많은데 서로 자기편에 끌려고 할 걸세. 내 생각으로는 아무 그룹에도 들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으네!80)

위의 짧은 대화를 통해 김재준은 거금 1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동경을 거쳐 요코하마로 갔고, 그곳에 다시 배를 타고 열흘 만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드디어 프린스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의 신학 공부로 인해 바로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있어서 1928년 9월 가을학기에 등록했다. 과목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새로운 신학을 공부했다면 프린스턴에서는 보수적 신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메첸(J. Gresham. Machen) 등 정통주의 혹은 근본주의적 신학자들의 강의를 들었다.81)

“나는 ‘아오야마(청산학원)’에서 ‘신신학’ 일변도로 지냈기에 여기서는 ‘보수신학’ 계열을 주로 택했다. ‘메첸’의 저서는 다 읽었다. 그의 강의 ‘바울 종교의 기원’, ‘처녀 탄생’ 등도 들었다.”82)

당시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갈등이 매우 심한 상황이었다.83)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김재준은 한 학기 동안 프린스턴에서 보수신학을 열심히 공부했으나 어떤 특정한 교수 혹은 이론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프린스턴에서 만난 투쟁적 근본주의의 대부격인 메첸은 사랑이 투지에 눌린 인상의 인물이었는데,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박형룡이 그의 제자였다. 김재준은 메첸의 강의를 집중해서 수강하였지만 그에게서 이미 막을 내린 극단적 정통주의에서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고민을 발견할 뿐이었다.84) 결국 김재준은 극단적인 자유주의도 극단적인 근본주의도 모두 거부하게 되었다.85) 하지만 김재준은 프린스턴에서 한경직을 만나게 된다.

“한경직 씨는 숭실중학, 숭전, 미국의 엠포리아 대학을 정규로 마치고 프린스턴 신학에 들어와 1학년부터 졸업반에까지 올라온 정규로 공부한 학생이다. 머리 좋고, 영어도 자유롭고, 인품이 온유하고, 인간관계가 원만했다. 사상은 그 당시 프린스턴 분위기로는 리버럴한 편이었으며, 졸업하면 대학원에서 학업을 계속할 작정이었다.”86)

김재준과 송창근, 한경직은 원대한 꿈을 함께 꾸었다. “한국 교회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인물 양성이 필요하며, 이는 곧 자유로운 신학교육 수준의 향상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송창근은 목회신학, 한경직은 신약, 김재준은 구약을 전공하고 학업을 마친 뒤 함께 일하자.”87)는 꿈을 꾸었다. 김재준은 프린스턴에서 함께 꿈을 꾸는 사람을 얻었지만 신학에 있어서는 한계를 느꼈다. 청산학원에서 자유주의적 신학의 한계를 느꼈던 것처럼 프린스턴에서는 보수주의 신학의 한계를 느꼈다. 메첸의 모든 강의와 저서를 섭렵했지만 그의 결론은 웨스턴신학교로의 편입이었다.

[각주]

[78] “미국 유학시절”, 『전집』, 제17권, 392. [79] 연규홍, 『역사를 살다』, 282.
[80] “여비는?”, 『전집』, 제13권, 100.
[81] 손규태, 『장공 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 38.
[82] “프린스톤 초년”, 『전집』, 제13권, 105.
[83]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325.
[84]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72~73.
[85] 위의 책, 73.
[86] “프린스톤 초년”, 『전집』, 제13권, 105.
[87]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