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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1] 어린시절 : 창꼴마을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09:47
조회
1199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24-30쪽.


[1] 어린시절 - 창꼴마을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은 1901년 음력 9월 26일(양력 11월 6일)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읍 창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901년은 20세기 한국 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다른 세 지도자들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즉, 한국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했던 함석헌, 성서조선을 외쳤던 김교신, 한국적 기독교 신비주의자였던 이용도 등이 1901년에 출생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902년에는 민족의 복음화를 부르짖었던 목회자이자 프린스턴신학교 시절부터 김재준의 친구였던 한경직이 태어났다. 또한, 3년 전인 1898년에는 기독교 사회윤리를 한국 땅에서 실천하려 했던 신학자요 목회자였으며, 김재준의 신학공부의 길잡이였던 송창근이 출생했다. 함석헌과 한경직은 평안도에서, 송창근과 김재준, 김교신은 함경도에서, 이용도는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니, 이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지금의 북한 땅에서 출생한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동학혁명(1894년), 러일전쟁(1904년) 등으로 인하여 한반도 정세가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대였고,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통치가 준비되고 있던 시기였다. 한반도가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절망적이던 시절에 김재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반도에서 실천하려 했던 다른 지도자들과 같은 시기에 태어난 것이다.

김재준의 고향인 창동은 창꼴이라고도 불렸다. 창꼴은 ‘창고가 있는 마을’이란 뜻인데, 조선시대에 비축미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창고는 김재준의 집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집을 창꼴 집이라 불렀다. 김재준은 자랄 때에 그 창고를 본 일이 없지만, 그 터가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다.

창꼴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하여 있었고, 뒷산에는 옛 성터가, 가까이에는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만강을 건너면 북간도, 연해주 등지로 갈 수 있었다. 때문에 창꼴은 러일전쟁 때 러시아 병사들이 지나가는 길목이기도 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두만강을 건너 만주 등지로 오가는 사람들이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즉, 나라의 변방이자 국경지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김재준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의 창꼴 집.
창꼴은 조선시대에 비축미 창고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시대에 아오지 탄광이 개발되면서 탄광촌으로 바뀌었다.

창꼴은 국경지역으로 두만강을 건너면 중국과 러시아로 연결되었지만, 신문화인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곳은 아니었기에 근대식 학교로 없었고 기독교 교회도 없었다.

김재준의 부친인 김호병도 근대식 학교교육이나 기독교 교회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한학에 조예가 깊고 유교전통을 중시하는 선비였다. 과거시험에 낙방했지만, 글을 알았기 때문에 고을 원님의 비서 일이었던 ‘책실’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큰아들이 몸이 아파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더 이상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은채 집안일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사랑방에 초학서당을 차려놓고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매관매직이 판치던 당시 자기 실력만으로 관직에 진출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김호병도 국운이 기울고 기강이 무너진 시대에 출세하는 것이 도리어 욕이라고 생각하여 고향에 남아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던 것이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에게 사례금을 주었는데, 김호병의 경우 그 사례금이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액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집안의 농사일도 거들어야 했다.

김재준도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가 가르치는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 그는 당시 교육방식에 따라 『천자문』, 『백수문』, 『통감』, 『동몽선습』 등 기초 과정의 책뿐만 아니라,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유교경전을 암송하는 데 열중했으며, 이와 같은 암송교육은 10살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나이가 어려 동양 고전의 깊은 뜻을 알지는 못했지만, 신학자가 된 후에도 그가 사서삼경 등 한문책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풀이하면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유교식 교육 덕분이었다.

유교식 교육을 철저히 받던 소년 김재준에게 있어 기독교란 공맹(孔孟)의 전통을 해치는 이단이었다. 어린 시절 이와 같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는 부친의 영향 때문이었다. 소년 김재준과 그의 부친 김호병이 기독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8)

8) 김재준, 『인간이기에』, 서울: 향린사, 1968, 207-209쪽

김재준이 일곱 살쯤 되었을 때, 성경을 팔러 다니는 매서 인겸 전도인이 저녁때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김재준의 부친 김호병에게 자신이 전도인이라고 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천지창조부터 시작하여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를 두 시간가량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했다. 김호병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가끔 “나는 공맹지도(孔孟之道)를 믿는 사람이오”하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인은 공자님이 믿는 하늘(天)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늘에 순종하면 흥하고 거스르면 망한다는 둥,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둥의 그 도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에 순종하면 천당길이 열린다면서 설득했다. 전도인의 계속되는 설득을 듣다 못한 김호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리를 떴다.

“나같이 공맹의 정도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예수교에 공맹의 말씀과 비슷한 것이 있다 셈 치더라도 ‘이단’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으니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도 닦는 데 손해 볼 것 뿐일 것 같소. 이제 그만 해두시오. 말을 많이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니, 원로에 피곤도 하실 거고 진지나 잡수시고 편히 쉬어 가시지요.”

김재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전도인은 다음 날 아침에 또다시 김호병을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그렇지만 그는 국한문 신약성경 한 권을 주고 가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인장께서는 안 믿어도 후에 자손들 중에서 믿는 사람이 생길지 모르니 이 성경을 잘 간직해 두시오.”

김호병은 전도인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고, 유교전통을 떠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김호병의 이와 같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유교식 교육을 철저히 받고 있던 소년 김재준에게 그대로 영향을 주어, 그 또한 말을 많이 하는 전도인을 경멸하면서, 자신은 결코 예수쟁이가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회심한 후 김재준은 바로 이 전도인이 주었던 신약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김재준의 형이 이를 잘 보관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전도인들이 주고 간 ‘쪽 복음’(신약성경의 복음서를 한 권씩 엮은 책) 등은 뜯어서 담배를 말아 피우거나 없애 버렸지만, 이것은 큼직한 책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궤짝 속에 깊이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김재준의 19살 모습. 그는 18살에 부모의 요청에 의해 생면부지의 여인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