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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5] 조선신학원 교수 : 시련의 시작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5:10
조회
1150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102-126쪽.


[5] 조선신학원 교수 : 시련의 시작

신학원을 시작하고 한 학기가 지나자 시련이 닥쳐왔다. 설립자인 김대현 장로가 9월에 세상을 떠났고, 2대 원장이 된 윤인구가 신령회 사건으로 검속(檢束)되었던 것이다. 서울의 목사들도 모두 구속되었다. 그러나 이때 김재준은 구속되지 않았으며, 자신이 구속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만주의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함북노회원으로 이명한 상태였는데 아마도 그가 서울노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속을 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신령회 사건으로 인해 가르치는 사람은 김재준과 약초교회(현 초동교회)를 목회하며 신학원에 강사로 나오는 야마구치(山口重太郞) 목사 둘뿐이었다. 김재준은 위기일수록 더욱 분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시간표를 새로 짜고 합반하면서 열심히 강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 한 명이 찾아와 강의중인 김재준을 불러내어 종로경찰서 취조실로 데리고 갔다.

“신령회란 것을 아는가?”
“모른다.”
“신학교 교수가 그걸 모를 리 있는가?”
“알면 안다고 하지 왜 모른다고 하겠는가?”
“목사들이 왜 다 잡혀갔는지 아는가?”
“그걸 당신이나 알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러한 취조가 계속되고 난 뒤, 김재준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풀려났다.

“당신도 으레 넣어야 할 건데 당신까지 없으면 학생들이 동요되고, 그 학생들이 시골에 흩어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퍼뜨리면 민심이 불안해지기에 도로 나가게 하는 거요. 나가서 아무 얘기 말고 가르치기만 해요. 그리고 모른다던 것을 금후에라도 알게 되면 알리시오.”

윤인구 학장이 40일 만에 풀려나고 수업은 유지되었지만, 조선신학원의 앞날은 풍전등화처럼 예측 불허였다. 먼저 총회와의 관계가 난제였다. 1940년 9월에 열린 장로교 총회 “‘조선신학원 경과보고’ 중 ‘장로회 목사 양성’을 ‘장로회 교역자양성’으로 개정해서 채용, 가결된 사실이 보고되었다. 이것은 조선신학원 출신에 대한 목사 자격 부여의 거부”39)를 의미했다.

39)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448쪽.

당국의 재(再) 인가도 문제였다. 1년이 지나 인가가 만료되어 재신청을 했으나, 평양신학교 측과 평남도지사의 항의로 도청은 난처함 입장에 처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서야 ‘이번만’이라는 조건부로 인가를 내주었다. 다시 1년이 지나고 인가 신청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가가 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마음이 초조했지만, 그래도 수업은 계속 했다. 그러던 중 학교령에 의해 경영하는 성결교회의 경성신학교와 통합하고 이에 감리교신학교 측의 갑작스런 거부로, 1942년 12월 29일부터 감리교신학교와 조선신학교만 통합되어 감리교신학교 교사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1943년 초 새로운 위기가 닥쳤다. 혁신교단사건이었다. 총독부가 주도하여 장로교와 감리교를 합하여 혁신교단을 만들고, 조선신학원과 감리교신학교는 합동하여 혁신교단신학교로 발족시켰다. 조선신학원의 전필순 이사장과 윤인구 원장은 이에 적극 가담했다. 그리하여 전필순은 초대 통리로 추대되고 윤인구는 교학국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재준은 혁신교단의 설립을 반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나는 조선신학원 설립자와 이사장의 초빙으로 교수직에 있었는데 이제 조선신학원이 없어졌으니 내 직책도 없어졌기에 사임서를 보낸다.”

김재준은 설립자에게 사직서를 내고 뚝섬 집에 머물렀다. 일종의 농성이었다. 그동안 가족들은 용정에서 창꼴 집으로가 있다가 서울 전농동 집에 와 합류한 뒤, 1년쯤 살고 다시 뚝섬으로 이사한 상태였다. 전농동 집의 잔금 낼 형편이 안되어 집값이 더 싼 뚝섬으로 이사했던 것이다. 뚝섬의 집은 좀더 크고 방수도 괜찮았지만, 땔감과 먹을 것이 부족하여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어려운 살림에 3남 3녀의 자식을 둔 가장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사표를 내버린 것은 무모한 행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대책 없는 사표 제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숭실 숭인상업학교에 대책 없는 사표를 제출한 적이 있었다.

뚝섬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3남 3녀를 둔 가장이었지만 박봉과 일제말 최악의 경제 사정으로 극심한 가난에시달렸다.

김재준이 사임했다는 소문이 평양신학교에 전해졌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은 채필근 목사였는데 그는 조선신학교 설립을 추진하면서 교장자리까지 약속받았지만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가버렸었다. 평양신학교는 교무이자 청산학원 후배인 김덕준을 통해 이 학교 교수로 김재준을 초빙한다는 공문서와 생활비를 보냈다. 봉급도 조선신학원의 배나 되는 액수였다.

그러나 그는 정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신학을 상품으로 매매하는 신학 장사치가 아니요. 내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이 주실 것이니 그런 걱정은 말고 이 돈 봉투들은 도로 가지고 가시오!”

어려운 살림에 더 좋은 조건의 일자리는 유혹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들과 함께할 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조선신학교의 설립에 반대했던 평양신학교 관계자들이나 조선신학교의 설립자인 고 김대현 장로,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신학교육에 대한 이상, 지금까지 조선신학원에 쏟았던 노력 등을 생각할 때 거절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원칙에 맡는 것이었다.

김덕준을 돌려보낸 어느 날 밤 졸업반 학생이 찾아 왔다.

“우리는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왔고 선생님도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오신 것 아닙니까? 교회 정치꾼들이 ‘조선신학원’이란 간판을 갖고 가든 말든 그게 무슨 큰일입니까? 나와서 가르쳐만 주십시오.”

“학원의 법적 책임자는 설립자이니 설립자에게 말해 보시오.”

당시 설립자는 김대현 장로의 아들 김영철 장로였고 이사장은 함태영 목사였다. 얼마 후 이들은 조선신학원을 재건하자고 김재준에게 말했다. 이를 위하여 그를 학원장으로 선정하고, 이사로 보선된 무라기시 목사가 시무하는 정동의 일본인 교회 예배당에서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40) 조선신학원 이사회록을 혁신교단으로 가지고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전필순과 윤인구에게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40) 광화문 조선일보사 사옥 뒤편에 있던 이 교회건물은 해방 후 덕수교회에서 사용하다가 1984년에 이 교회가 성북동으로 인전할 때 조선일보사에 팔렸다.

“우리는 조선신학원을 다시 시작한다. 당신들에 대한 우리의 문은 열려 있다. 돌아와 같이 일하자. 그러나 이 달 00날까지 아무 회신이 없을 경우에는 우리와 당신들과의 관계는 단절된 것으로 알겠다…….”

이들에게서 회신이 올 리 없었다.

학원장직을 수락한 김재준은 이 일을 송창근에게도 알렸다. 그러나 김재준을 사랑하는 송창근의 회답은 꾸지람과 한탄이었다.

“설립자는 누구고 이사장은 구구고 원장은 누구였더냐? 모두 서울 교계의 중진이 아니었더냐? 신학원을 혁신 교단에 끌고 간 것은 누구고 동조자는 누구였더냐? 모두 서울노회원이 아니냐? 그런데 이때까지 한마디 말없이 내버려뒀다가 이제다 죽은 송장을 장공더러 건사하란 말이냐? 신학원은 벌써 총독부 뱃속에 들어갔지 않으냐? 장공이 그걸 맡는다면 호박 쓰고 돼지 굴에 들어가는 것이다…….”

송창근의 충고에 김재준은 “이미 맡아 버렸으니 이제 와서 번의할 수도 없고, 어려울 때 하나님이 도우실 것으로 믿는다……”는 내용의 회답을 보냈다.

1943년 초여름 조선신학원은 재개되었으나 인가가 없어 도경에서는 불법집단이라고 위협했다. 구약은 유대 민족의 세계 정복을 위한 야심에서 씌어진 책이니, 총독부가 만든 『구약교본』대로 가르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형사가 아침부터 퇴근할 때까지 사무실에 와 있었고, 헌병대는 강의에 참석하여 감시했다. 그러나 김재준은 유치하게 씌어진 『구약교본』을 무시하면서 구약을 더 열심히 가르쳤다.

재정적인 위기도 닥쳤다. 일제가 설립자인 김영철 장로에게 돈을 내지 말 것을 위협하자 돈줄이 끊긴 것이다. 김재준은 졸업생들에게 편지를 보내 담임하는 교회에서 헌금해 줄 것을 호소했고 총회에도 보조를 요청했다. 다행히 총회 보조 3천 원과 각 교회의 헌금으로 겨우 꾸려나갈 수 있었다.

일제말이 되면서 신학원은 더욱 어려워졌다. 신입생 모집을 못한 상태에서 재학생들에게 징용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동이나 면서기 등으로 취직하면 징용을 면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기 시작했다. 징용장을 받고 도망가는 학생들도 있었고, 독립운동에 가담하다 감옥에서 죽은 학생도 있었다. 징용에 대한 대책이 없으면 신학원 유지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논의 끝에 40여 명 학생 전원이 근로봉사에 참여하기로 하고 평양의 공장으로 갔다. 학생들은 낮에는 우산공장과 선반공장 두 곳에서 나누어 일했고 밤에는 공부 했다. 그는 신학원을 지키며 몰래 입학시킨 7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다른 신학교들은 모두 문을 닫았지만, 조선신학원의 명맥만은 유지되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일제로부터 한민족이 해방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그는 도농(현재 남양주시 지금동) 집에서 해방을 맞았다. 뚝섬에서 살던 중 식량이 부족하여 어려울 때에, 조선신학원 졸업생인 이춘우가 뚝섬 집을 팔아 도농에 집과 땅을 사서 감자 농사를 지으면 식량이 될 것이라고 권하여 이사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곳의 초가집에 살면서 밭에 감자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하고 이춘우 집에서 쌀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식구가 하루에 두 끼 먹기도 힘들어 김재준은 도시락을 싸는 것도 그만두어야 했다. 이런 어려운 살림에서도 그동안 맏딸은 정신여고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여 만주로 갔다. 취직하거나 결혼하지 않으면 정신대로 끌려가기 때문에 결혼을 서둘렀는데, 큰조카의 중매로 은진중학교 시절 제자였다가 할빈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신영희를 사위로 맞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