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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4] 교육의 첫걸음 :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 교목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4:12
조회
1213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98-101쪽.


[4] 교육의 첫걸음 :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 교목

숭인상업학교를 그만둔 지 몇 달 후, 숭실전문학교 교장 마우리 박사가 집으로 찾아 왔다. 그는 한국 선교사 중 유일한 웨스턴신학교 출신이었는데,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 교유, 즉 교목 겸 성경교사로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용정으로 가는 길에 김재준은 서울에 들러 오랜만에 송창근을 만나 회포도 풀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도 했다. 창꼴 집에 들러서는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가족들을 잠시 쉬게도 했다. 이 때 만삭이 되어 평양을 떠난 아내는 고향에서 첫아들을 출산했다.

그는 혼자 기차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먼저 용정으로 갔다. 가족들은 자리를 잡은 뒤 한 달쯤 있다가 데려갔다. 그러나 가족들을 데려와 짐을 풀자마자 집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 위독 속내 형”이었다. 어머니가 위독하니 빨리 오라고 형이 보낸 것이었다. 혼자 서둘러 창꼴 집에 도착했지만, 어머니는 이미 운명하신 뒤였다. 1936년 8월 10월에 향년 75세로 별세하신 것이었다. 아들 식구들을 용정으로 보내놓고 허전하여 집에 들어오자마자 졸도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재롱을 부리던 셋째 딸 혜원을 업고 멀리까지 따라 오다 아내에게 내주고 언덕 위에서 오래오래 서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너무 슬프고 허전하여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통곡도 나올 수 없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소설에 나오는 아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지 아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음 날에야 눈물을 흘리며 소리없이 울었다.

캐나다에서 온 평신도 선교사 부루스 교장이 이끄는 은진학교에는 강원룡, 김영규, 전은진, 안병무, 김기주, 신영희 등의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농촌 계몽운동으로 잃은 나라를 다시 찾자”는 이상을 가지고 농촌에 야학교, 주일학교, 교회 등을 세웠는데 김재준은 이곳을 돌아다니며 예배를 드렸다. 은진학교에서 그의 별명은 ‘천지(天地)’, 곧 ‘하늘과 땅’이었다. 수업시간에 준비해 온 노트와 교실 천장만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강의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농담도 하지 않고 과묵한 그에게서 학생들은 어떤 권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어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른 시간에는 커닝을 많이 하던 학생들도 김재준이 시험감독을 하게 되면 신문만 보고 있어도 커닝을 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동료 교사들도 그의 인품과 인격을 높이 샀고 존경을 표했다.

김재준은 은진학교에 근무하던 시절 만주의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7년 3월이었다. 학생들을 인솔하여 수행여행도 다녔는데, 온종일 기차로 달려도 끝이 없는 드넓은 만주벌판을 바라보며 이 기름진 벌판을 내어놓고 삼천 리 반도 산골로 들어가 버린 옛 조상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만경 곡식바다 하늘가에 물결치니 물려주신 선영기업 훌륭도 하옵건만
어쩌다 다 팔아 먹고 반도 산골 기어든고.

용정에는 신사참배가 강요되지 않아, 평양에서 쓴 『순교자열전』을 책으로 출판하려고 일본 영사관을 찾아갔다. 그들은 원고를 보더니 출판을 거부했고 심지어는 원고를 압수하기까지 했다. 책을 내고 싶었던 김재준은 정기간행물인 『십자군』을 발행했다. 1937년 5월이었다. 당시에 그곳에는 정기간행물에 대한 검열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제가 만주지역에서의 정기간행물 규정을 까다롭게 바꾸자 1938년 2월 이후로 발생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송창근은 부산에서 『성빈』(聖貧)이란 잡지를, 그리고 전영택은 서울에서 『새 사람』이란 월간지를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