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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4] 교육의 첫걸음 :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목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4:07
조회
1311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78-98쪽.


[4] 교육의 첫걸음 :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목

1932년 여름,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하와이를 거쳐 요코하마에 내린 김재준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청산학원 친구들과 미국 유학 재정 보증을 서주었던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 등을 만난 뒤, 기차를 타고 창꼴 집으로 가서 4년 만에 가족들과 상봉했다. 미국 유학을 떠날 즈음 잉태되었던 둘째 딸이 태어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리운 가족들이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그동안 부친은 막내아들 그리운 정에 교회에 가서 부흥집회도 참석해 보았지만,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진리와 도를 말한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조폭하고 철없이 떠들기만 하는지 모르겠더라.”

부친의 부흥집회 참석 소감은 여전히 전통 한학자 모습 그대로였다.

하루는 부친이 이런 제안까지 했다.

“이제부터는 ‘교’(종교를 말함)에 대해서는 서로 말하지 않기로 하자. 부자유친(父子有親)만으로도 ‘친’(親)할 수는 있을게 아니냐?”

김재준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기독교로 귀의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싸움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어디 그렇게 힘써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어디 그렇게 힘써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더 좋은 것이 제일 좋은 것의 원수’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한탄했으며, 완전한 것이 올 때 완전치 못한 것은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생각하면서 슬퍼했다. 그동안 유교가 부친의 삶을 인도하는 길잡이였다면 이제는 가장 완전하고 제일 좋은 삶의 길잡이인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안타깝고 괴로웠던 것이다. 김재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친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러한 생각을 계속 유지했다. 이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무거운 짐 중의 하나였다.

김재준에게 더 큰 괴로움은 일할 준비는 되었지만 일할 곳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누가 불러주지도 않았다. 함북노회모임에 참석하여 귀국인사라도 하려 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미국 유학을 떠날 때 홀대를 받았던 때나 마찬가지였다. 선교사 소개도 없이, 노회나 총회의 추천도 없이 제멋대로 나가서 신학공부를 하고 돌아온 사람을 이제 와서 우리가 알게 뭐냐는 것이었다. 평양신학교 출신 목사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노회에서 일본과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한 김재준은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는 아직 목사 안수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노회 뒷좌석에 앉아 얼마 동안 방청할 수는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편할 리 없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은혜도 평화도 증발된 사무절차 일색이었고, 노회원들은 평화가 상실된 채 목사의 탈을 쓴 자들에 불과했다. 이러한 광경을 통해 그는 좀 더 복음적인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정통주의는 그대로가 율법주의여서 거기에는 자유로운 인간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정통주의라고 자부하는 평양신학교에 대한 반발도 내포되어 있었다.

고향에 머물면서 느끼는 답답함과 이제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김재준의 발걸음을 평양으로 돌리게 했다. 그곳에는 자신의 신학수업의 길잡이인 학형 송창근과 프린스턴신학교 시절 사귀었던 친구 한경직이 있었다.

송창근은 조만식이 장로로 있는 산정현교회(당시 이름은 산정째교회) 강규찬 목사 후임으로 예정되어 그 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평양 숭실학교 성경강사로 나가는 중이었다. 한경직은 숭인상업학교 성경교사 겸 교목, 그리고 기림리교회 임시 목사로 있다가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 목사로 가게 되었다.24) 숭인상업학교는 선교사들이 설립한 평양 시내의 다른 미션 스쿨들과는 달리, 평양 시내 장로교회 당회원 연합회, 즉 조선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학교였다. 애초에는 숭인중학교로 시작하였지만, 취직이 잘 되는 상업학교로 개편하여 재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정현교회의 장로인 오윤선, 조만식, 김동원 등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었다.

24) 김재준은 그의 자서전에 당신 신의주 제이교회 출석교인을 2,0000명으로 기억했다. “그때 한경직은 숭인상업학교에서 성경교사 겸 교목, 그리고 기림리교회 임시 목사로 있다가 이천 명 출석 교인을 가진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 목사로 가게 되었다”(김재준, 『범용기』, 104쪽). 그러나 이 기억은 잘못된 것이다. 한경직이 부임할 당시 신의주 제이 교회는 300명 정도 되는 교인에 예배당도 없었다(조성기, 『한경직 평전』, 서울: 김영사, 2003, 80-81쪽 참조).

김재준은 한경직의 후임으로 숭인상업학교 성경교유, 즉 교사 겸 교목으로 청빙받았다. 앞서 숭실전문학교 메큔 교장이 앞으로 설립될 여자부 교수로 와 달라는 부탁을 했었지만 그 실현성이 희박하고 더군다나 총독부가 숭실학교를 폐교시키려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하여 메큔의 집요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고, 조만식 등 조선 사람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1933년 4월부터였다.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조카 둘을 데리고 두 칸짜리 집을 얻어 살림도 차렸다. 난생 처음 자녀들을 데리고 가정이란 보금자리를 차린 것이다. 김재준은 이곳에 근무하면서 매일 새벽마다 모란봉 꼭대기 솔밭 속 바위 밑에서 기도했다. 눈 쌓인 겨울에도 예외없이 올라 기도했으며, 오가는 길에도 걸으면서 기도했다.

얼마 후 김재준은 송창근의 권유로 평양노회에서 강도사 시험을 치렀다. 강도사란 설교를 할 수 있는 자격자(licensed preacher)를 의미했다. 웨스턴신학교를 졸업한 무렵 미국 피츠버그노회에서 이미 이 자격을 획득했지만, 조선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다시 시험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석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시험은 논문 한 편과 구두시험뿐이었다. 그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개념」이란 논문을 써서 제출하고 구두시험에 응시했다. 원로급 목사 다섯 명이 위원으로 있었다.

“천국이 지상에도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나 김재준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천국이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니 하나님이 하늘과 땅 모든 공간과 시간을 주장하시는 분이라면 하늘이고 땅 아래고 간에 천국이 존재할 수 없는 데가 없겠지요.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도 임하게 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염원이었고 ‘너희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았다면 거기에 벌써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천당만이 하늘나라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그들은 근본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듯이 죽음 뒤에 영혼이 들어가게 되는 천당이 곧 하늘나라라는 대답을 듣기 원했지만, 김재준은 이 땅의 하나님 나라까지 말한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리하여 1933년 8월 강도사로 임직되었다. 산정현교회 집사에서 노회가 인허한 강도사가 된 것이다.

1933년 여름, 프린스턴신학교 선배이자 평양신학교 신약학 교수였던 남궁혁이 『신학지남』이란 잡지의 편집 책임자이자 주필로 있었는데, 김재준을 편집실무 겸 동인으로 일하게 했다. 한 달에 20원의 사례금도 준다고 했다. 1918년 평양신학교 기관지로 창간된 이 잡지는 당시 장로교 신학을 대변하는 잡지였다. 남궁혁은 김재준뿐만 아니라 채필근, 송창근, 한경직 등도 동인으로 참여하게 했다. 김재준은 이 잡지에 주로 구약성경에 관한 글들을 발표했다.

1933년 5월호에 게재한 첫 학술 논문 「욥기에 현한 영혼불멸」에서는 「욥기」 19장 25-26절(“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을 주석하고 이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욥은 사후의 영혼불멸에 대해서 똑똑하게 끊어 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전통적 신앙인의 음산한 스올을 그는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욥기에는 헬라 철학적인 영혼불멸 개념, 즉 사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념은 없고, 구약성경의 전통이자 히브리인들의 전통적인 죽음 개념은 음부(=히브리어로 ‘스올’이라고 함)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욥기」에는 죽어서 천당 간다는 개념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욥기」에 영혼불멸 개념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은 오늘날 구약학계의 정설(定設)로 되어 있다.

같은 해 9월호에 게재한 글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생활」에서 김재준은 민족의 타락과 다가오는 멸망을 바라보며 아파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주요 메시지를 그의 생애와 연결했다. 그리고 예언자의 신앙적인 고뇌와 결단, 그의 하나님 말씀 선포 등을 논했다.

“(예레미야)는 다시 한번 일어나 싸움할 때가 왔다. 그는 성전 문 어귀에 서서 의식주의와 성전 광신자들을 향하여 가장 날카로운 선언을 내렸다. …… 이 용감한 도전은 물론 탐심이 가득한 왕과 제사(祭司)들이며 미로에 든 광신배들의 격노를 샀을 것이다. …… 이렇게 하여 당시의 지도계급과 정면충돌한 그는 받은 것이 오직 능욕과 모독이었다. 동양인의 연한 감정을 가진 그는 또다시 의혹과 고민에 잠기게 되었다.”

그는 이글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으면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예레이먀처럼 현실을 바라보고 고뇌와 결단을 내리기를 촉구했다.

“이리하여 불순한 의식적ㆍ국가적 종교를 도덕적ㆍ영적ㆍ개인적 종교로 정화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다. 우리는 이제 신의 위대한 경륜을 찬탄함과 동시에 불세출의 대 예언자 예레미야의 일생을 앙모하며 마지않는다.”

같은 해 11월호에 게재한 글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에서는 주전 8세기 예언자 아모스를 불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용기 있게 선포하다 죽은 자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아모스 예언자의 의를 이루었다고 결론지었다.

“‘공도는 물같이 흐르고 정의는 찌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하라’(5:24)는 것이 아모스의 갈망하는 바였다. …… 그는 온 세상의 정치, 경제, 종교, 교육 등의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의 위에 세워지고 운행하여지기를 바라고 그를 위하여 싸우다가 그를 위하여 죽은 자이다. 이제 우리는 이 불의로 가득 찬 세대에 있어서 이 의의 예언자의 용기를 부러워함과 동시에 이 예언자의 의를 이루어주신 그리스도의 의만을 선포하며 그를 위하여 분투하며 또 생명을 버림이 마땅할 것 아닌가 한다.”

그는 다음 해에 「실재의 탐구 – 전도서를 읽고」(1934/11)도 게재했는데, 비도덕적이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찾기 어렵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다시금 창조주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자로 「전도서」 저자의 모습을 그렸다.

“(전도자)는 이 모든 철칙의 배후에는 신의 예정이 계심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 주재자이신 신은 오직 차디찬 집권자이어서 인정에 끌리며 인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는 이는 아니었다. 이렇게 숙명적이요 필연적인 우주와 인생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것이 도덕적 필연이라면 거기에는 새로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각일각으로 닥쳐오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를 응시한 전도자는 모든 이론, 모든 지혜를 다 내어놓고 오직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한마디 말밖에 부탁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을 떠나 인생은 있지 못한다. …… 그렇다. 하나님 안에 쉴 때까지는 우리에게 안심이 없을 것이다. …… 현대인은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모여 속죄의 은총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욥, 예레미야, 아모스, 전도자 등의 인간적인 고민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다룬 김재준의 글들은 역사비평학을 수용했던 당시 구미 성경학계 주류의 연구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읽기에는 별 문제가 없는 내용들이다. 그는 여기에서 성경본문의 내용을 역사적ㆍ사회적인 상황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그의 말씀을 축자적이고 기계적으로 받아 적은 것이라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즉, 그는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을 파괴하는 고등비평과 자유주의적 해석방법”을 수용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 김재준의 이러한 예언자들에 관한 논문은 당시 부패하고 혼탁한 한국 사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지 못한 한국 교회에 외치고 싶은 내용이었다.

당시 많은 교회의 부흥회는 본래의 목적인 신앙의 강화와 전도를 목적으로 시행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이름으로 교인들을 흥분시켜 헌금을 강요했다. 마치 부패한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백성들에게 성전제의를 강조하면서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한 것처럼 말이다. 김재준은 이를 암시하면서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김재준이 『신학지남』에 기고한 글 중 근본주의자들이 교리적으로 가장 문제시했던 것은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1934/1)였다. 이 논문은 구약성경 「이사야」 7장 14절의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내용을 주석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동정녀’라는 단어가 ‘방년의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엘마’를 번역한 것으로, 반드시 동정녀라고 번역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또한 ‘잉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히라’는 히브리어 상태 동사 ‘하라’의 분사형태이므로 ‘엘마’(젊은 여자)의 형용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잉태한 방년의 젊은 여자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재준의 주석은 히브리어 문법상 맞는 것으로 당시 역사비평학을 수용하는 구미 구약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내용이었다. 또한, 70인 역이나 신약성경에서 인용하고 있는 본문과 비교, 연구해 보면 왜 초대 교회에서 본문을 동정녀 탄생으로 읽었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또한 김재준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다는 오해를 낳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무렵, 성경의 역사비평이 장로교 총회를 통해 근본주의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공격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소위 ‘아빙돈 주석사건’이다. 감리교에서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 아빙돈(Abingdon) 출판사에서 발행한 『아빙돈 성경 주석 Abingdon Bible Commentary』을 감리교의 유형기 박사가 편수하고 1934년에 번역하여 출판했다. 이것은 역사비평학을 수용한 주석이었다. 장로교에서는 채필근,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이 참여했다. 유형기는 김재준에게 「요나」는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자신이 직접 쓸 것이며, 「요나」를 제외한 소선지서의 주석을 부탁했다. 김재준은 보수적인 학자들의 책을 참고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주석을 써보냈다. 거기에는 이단이라고 단정할 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감리교에서는 이 책이 문제시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장로교에서 이 책에 대해 이단 시비가 붙은 것이다.

길선주 목사는 이 주석의 집필자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자이고 그 내용도 자유주의적이므로 이 사상이 장로교회에 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25)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있던 박형룡도 이 주석이 고등비평의 원칙으로 성경을 파괴적으로 해석하며 계시의 역사를 종교적 진화의 편견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단정했다.26)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근본주의 신학을 고수하고자 했던 선교사들도 같은 입장에 서 있었다.

25)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 십년사』,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6, 177쪽. 26)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414쪽.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메첸으로부터 근본주의 신학을 전수받았던 박형룡은 김재준이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1926년에 이미 졸업하고,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매우 보수적인 남침례교회 신학교에서 1년간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근본주의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던 선교사들과 함께 메첸의 근본주의를 한국에 심는 데 앞장섰다.

드디어 근본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장로교회는 1935년 9월에 열린 총회에서 이 주석을 구매금지 조치했다. 장로교의 교리에 위배되는 점이 많기 때문에 이제부터 이 책을 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집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공개사과를 받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의에 반발하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았다. 남궁혁의 반발, 평양노회 소장 목사들의 격론, 구매 금지령이 내린 지 수주일 만에 이 비싼 책이 다 팔린 것 등은 이를 반증했다.

집필자들에게 공개 사과하라는 결의에 대해서 김재준을 포함한 네 사람은 어떻게든 반응해야 했다. 먼저, 채필근이 “잘못했고, 다시는 집필하지 않을 것이며 재판이 발행될 때에는 자기 글을 뺄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은 몇 달을 버티었다. 내용 면에서 잘못이 없었고 사과할 경우 자신들의 집필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므로 함부로 사과성명을 내기도 거북했다. 그러나 『신학지남』의 편집 책임자인 남궁혁에게 이 세 사람을 집필진에서 제거하라는 압력이 거세어졌다. 난처하게 된 그는 성명서를 내라고 이들에게 권했다. 결국 이들은 공동명의로 성명서를 써서 『신학지남』에 보냈다.

1)우리는 단권 성경 주석 전체로서의 편집에 관여한 바 없다.
2) 우리가 쓴 글에는 문제 될 것이 없다.
3) 그러나 우리 글 때문에 교회가 소란하다는 데 대하여는 유감으로 생각한다.

성명자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자신들이 쓴 주석에는 문제 되는 것이 없지만, 이 때문에 교회가 소란해진 데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김재준은 『신학지남』의 편집실무일이나 기고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두 사람도 『신학지남』을 떠났다.

성명서가 나가자 뒷말도 많았다. 내나 마나 한 성명서라는 둥, 어느 쪽이 유감인지 모르겠다는 둥 입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이들을 정죄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은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더 따져봐야 소장파 목사들의 공격이 격화되어 노장파 목사들에게는 오히려 불리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출판된 주석서 번역 한 권을 가지고 총회 석상에서까지 이단 시비를 벌인 아빙돈 주석사건은 오늘날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일부 선교사들과 목사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던 당시 장로교회 총회의 현실이 그러했다. 이에 더 나아가 아빙돈 주석과 관련된 사람들 외에, 자신의 성경관을 공개적으로 밝힌 다른 인사들도 곤혹을 치렀다. 예를 들자면, 당시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는 「창세기」를 모세가 쓰지 않았다고 교회에서 가르쳤는데 이에 대해서도 총회는 그를 “오경 전부 내지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도모하는 사람”, “오경의 증거와 구약 다른 여러 책의 증거와 예수 그리드소의 증거와 신약 여러 책의 증거를 거짓말로 인정하야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며 릉욕하는 사람”이라는 무서운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을 맡은 연구위원자는 나부열 선교사였고 박형룡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성진중앙교회 김춘배 목사는 「장로교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글을 『기독신보』에 썼는데, 여기에 언급되었던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천 년 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에서 고린도교회의 여자들에게 권면한 내용이 오늘날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고 역사적ㆍ문화적 상황에서 재고되어야 한다는 주장, 즉 여성 목사 안수 허용을 포함한 여권(女權)문제를 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총회는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을 우리 교회 교역계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판결하여, 그를 성경 파괴자, 목사의 자격이 없는 자라며 정죄해 버렸다. 이러한 영향으로 한국 장로교회는 여성의 목사, 장로 안수문제의 논의를 오랫동안 터부(taboo)시해 왔다. 그리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에서는 20세기 후반에야 이를 허용했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과 고신 등 보수교단에서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이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근본주의적 성경관은 장로교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존 칼빈(John Calvin)의 성경관에도 맞지 않고,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다. 칼빈은 성경문자주의를 비판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책이며, 이 계시는 문화적ㆍ인류학적 조건하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를 들자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고대 사회의 청중들의 문화적 상황에 맞는 언어와 상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고에 맞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을 통해 당시 유럽 개신교 과학자들은 신앙적 갈등 없이 계속적으로 연구에 임할 수 있게 되었고, 서구 과학의 발전을 가져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칼빈의 성경관은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는 그의 방대한 성경 주석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칼빈이 비판한 성경문자주의로 다시 회귀했으며, 이러한 성경문자주의가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미국 장로교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김재준과 그의 동료 송창근, 한경직 등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이 무렵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란 일본의 신들을 모시는 신사(神社)에 절을 하면서 경의를 표하고 복이나 소원을 비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신들이란 샤머니즘 등에서 숭배하는 전통적인 신들뿐만 아니라 일본의 옛날 천황이나 무사(武士) 등 이미 죽은 자들의 영들을 의미 죽은 자들의 영들을 의미했다. 죽은 자들의 영을 신으로 모시는 관습이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재에도 일본의 수많은 신도(神道)사원에는 800만 이상의 신들이 모셔져 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규정하고 이를 통해서 군국주의의 정신적 단결을 도모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한국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시키고 한국 교회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와해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곧 우상숭배라는 관점에서 이를 거부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일부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가 하나의 국민의례로서 정치적 의미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배해도 무방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감리교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또한 로마 교황청은 일본의 천주교인들에게 신사참배는 애국심과 충성의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참배를 허용하는 입장이었다.

신사참배 강요와 더불어, 일제는 공립과 사립학교를 모두 관청의 통제 아래 두었다. 교장과 교사의 임면이 허가제가 되었고 교과목 배정도 관청이 정한 대로 해야 했다. 기독교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는 “교장 인솔하에 교직원 학생 모두 신사에 참배하라”고 강요했다. 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27) 1934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표 영흥중학교가 폐쇄되었다. 1935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 메큔 박사와 평양 숭의여고 교장 스누크 여사가 면직되고 미국으로 출국당했다.

27) 감리교 계통의 학교는 신사참배에 순응했기 때문에 강제 폐쇄되거나 자진 폐쇄하지 않았다.

김재준의 학형인 송창근도 신사참배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설교에서 이를 언급했기 때문에 형사 두세 명이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산정현교회 목회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생각은 깊어졌다. 목회에 대한 그의 진취적이고 불타는 젊은 열정이 조만식, 김동원, 오윤선 장로 등으로 구성된 당회원들과 맞지 않았고 일부 교인들도 이를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진보와 보수의 신학적 갈등이 목회 현장에 그대로 드러난 실례이기도 했다.28) 일본과 미국의 명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회현장에 뛰어들었던 젊은 목사를 보수적인 한국 교회가 수용하기에는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으로 떠났다.29) 이미 한반도의 북서쪽 끝 신의주로 떠난 한경직과 이제 한반도의 남동쪽 끝 부산으로 떠난 송창근이 없는 평양은 김재준에게는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들이 있어 평양에 왔었고 이들과 아빙돈 주석사건을 함께 겪었기 때문에 그 쓸쓸함은 더욱 컸다.

28)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411~412쪽. 당시 평양 지역은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평양신학교의 영향으로 보수주의가 특히 강했다. 그리하여 일본이나 미국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한 목사들이 세계 신학의 경향을 자유롭게 소개하거나 목회에 활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일 등 일부 선교사들도 평양신학교와 교회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태도에 반발했다. 29) 신사참배반대 때문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가 송창근 목사의 후임을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다.

숭인상업학교에도 신사참배 강요 물결이 밀려왔다. 김항복 교장은 교장실에서 김재준을 만나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지 말아 달라는 것’과 ‘신사참배 때 행동을 같이 해달라는 것’을 부탁했다. 학교를 유지하지 위해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김재준은 “잘 알았소이다”하고 나와서 곧바로 사표를 제출했다. 1936년 4월 초, 입학시험이 막 끝난 때였다. 당시 그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고, 가족들의 생계에 대한 대책도 없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었지만 그저 믿음으로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유(교목 겸 성경교사) 이임.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사표를 냈다.

집 주인인 김은석은 그에게 집세를 내지 말고 그냥 지내라며 배려해 주었다. 또한 구차하다고 생각되어 아무에게도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낸 일이 없었는데도, 한국에 돌아올 때 여비 마련을 위해 도움을 주었던 미국 피츠버그의 옛 친구 찰스 르 로이에게서 매달 20불씩(당시 돈 40원) 보내주겠다는 편지가 갑자기 왔다. 여섯 식구인 본인과 아내, 그리고 딸 셋(셋째 딸은 평양에서 출생)과 조카가 근근이 살아갈 만한 돈이었다. 김재준은 이때 우상(偶像)인 바알을 숭배하는 아합 왕에게 가뭄을 선포하고 요단강 동편에 그릿 시냇가로 숨은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던 하나님의 손길(왕상 17:1-6)을 기억했다.

할 일이 없어 집에 있게 된 김재준은 평양신학교 도서관에서 『성자 열전 Story of the Saints』 50권을 두세 권씩 빌려다 읽었다. 그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서 순교한 성자들을 골라 『순교자 열전』을 썼다. 원고지 살 돈도 부족한 형편이었지만, 1,000매가 넘는 분량을 썼다. 그가 순교자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초대 교회 시대에 로마의 황제 숭배 강요와 같은 것이라 생각했고, 이를 거부하고 순교한 초대 교회 신자들의 모습을 사모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