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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3] 큰 마음 큰 뜻을 품고 : 일본 청산학원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3:12
조회
1580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60-68쪽.


[3] 큰 마음 큰 뜻을 품고 : 일본 청산학원

1926년 봄, 동경에 도착한 김재준은 청산(靑山, 일본어로 ‘아오야마’라고 함)학원 신학부 졸업반에서 공부하고 있던 송창근을 찾아갔다. 그의 수중에는 5원 50전밖에 없어 달리 갈 데도 없었다. 송창근은 김재준을 보고 당황했다.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손가방 하나도 없이 수중에 단돈 5원 50전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송창근은 동향의 후배를 기숙사 자기 방에 머물게 하고 식사도 기숙사 식당에서 자신의 손님으로 먹게 했다. 이것은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송창근의 방에서 몇 주일을 지낸 김재준은 그가 소개한 근우관이라는 고학생 합숙소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고학생들처럼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일본인들의 아침식사용인 낫도[納豆]-된장 비슷한 것으로 메주콩을 발효시킨 것-를 팔면서 끼니를 때웠다. 그러나 수줍은 성격에 목소리도 작아 얼마 팔지 못하여 굶기가 일수였고, 먹을 때에도 끊는 물에 밀가루 반죽을 뜯어 넣어 그걸 먹고 허기진 배를 달랬다. 잠잘 때가 제일 행복했는데,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설레는 것이 밥밖에 없는 상황에서 학교에 다닌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층건물 신축 공사장에 가서 리어카도 끌어 보았다. 그러나 배고픈 상황에서 힘이 부쳐 다른 사람들처럼 일할 수가 없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송창근이 귀국했다. 이때 김재준은 그의 방을 숙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후까미’라는 청산학원의 일본인 신학생의 소개로 이 학교 건물 신축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초면이었던 후까미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강도요 절도라고 부를 정도로 자유주의,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학생이었고 한국 학생과 친해지고 싶어 했다. 후까미는 공사감독에게 청산학원 학생 셋이서 일하고 싶은데 써달라고 부탁했다. 세 명의 학생이란 자신과 김재준, 그리고 다른 한국인 고학생이었다. 물론 김재준이 이 학교 학생이 아님은 분명했다. 공사 감독은 이들을 고용하고 별로 힘들지 않는 일을 시켰다. 김재준은 이렇게 넉 달 동안 일을 하였고, 방학이 끝날 무렵에는 제법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일본유학시절. 김재준은 일본 아오야마(청산)학원 신학부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접했지만, 비판적이었다.

이때에도 그는 아씨시의 성프랜시스의 삶을 동경했다. 그리하여 같은 해 7월 일본 동경에서 발행된 『사명』이란 잡지에 성프랜시스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 성자여 당신은 주의 십자가를 생각하시고 대로(大路)에서 통곡하셨으며 머리에 재를 뿌리시고 참회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 ‘오 주여’하는 첫 말에 감(感)이 극(極)하셔서 더 많은 말씀 못 하시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 당신은 가장 적은 이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걸인과 병자와 빈자와 죄인의 가장 살뜰한 형제이셨습니다. …… 당신의 마음속에서 거짓을 찾을 수 있아오리까. 당신의 행실에서 꾸밈을 볼 수 있아오리까. …… 당신은 종교개혁가나 예언자로서의 외식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오직 당신의 영을 응시하시고 당신의 몸을 편달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정숙 속에는 영원한 활동이 품겨 있었으며 당신의 여윈 몸에는 그윽한 후광이 둘리어 있었습니다.”

가을학기가 시작될 즈음 김재준은 교무과에 찾아가 입학이 가능한지를 타진했고, 입학시기가 아니라 입학은 불가하지만 청강은 가능하다는 답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청산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당신 청산학원의 학풍은 자유주의 일색이었다. 뉴욕 유니온신학교의 학풍과 거의 유사했다. 학생이든 교수든 개인의 자유, 학원의 자유, 학문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주의적인 좌경사상을 가진 신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영문과, 고등사범과 등의 학생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좌경이 아니라면 바보라고까지 했다. 이들 중에는 종교무용론, 종교아편론 등을 주장하는 학생들이 있기도 했다. 이들은 김재준에게도 입회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그것은 예수의 제자로서 신앙적ㆍ신학적 의무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순수한 마르크스ㆍ레닌주의에서부터 시작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신실한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청산학원에 다니는 동안 김재준은 자신의 인생 목표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왜 내가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지도 되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교육’이었다.

“…… 내 평생 사업은 무엇인가? 내 평생 사업이란 것도 나는 모른다. 신학에 들어온 것도 어쩔 수 없이 몰려서 그렇게 된 것이고 목사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교회에 충성할 용의도 없었다. 일제하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어냐? 그래도 교육밖에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게 비교적 자유로우면서도 후진들에게 뭔가 ‘혼’을 넣어 줄 접촉점이 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유치원부터 소·중·고·대학교까지의 교육 왕국을 세워 보리라고 맘먹었다.”20)

20) 김재준, 『범용기』, 70쪽.

교육을 통해서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기독교 정신이 담긴 학교를 세워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김재준은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학교의 식당일, 선교사들의 집 청소나 잔디 깎기, 주변 교회당의 청소 등의 일을 통해 돈을 벌어 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중 졸업반이 되었을 때, 캐나다 선교사로 조선에 와 있던 스쿨톤 양으로부터 매달 식비 16원씩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어학 선생겸 비서로 있다가 청산학원에 유학 온 학생 박원혁의 소개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3학년 여름방학에는 스쿨톤과 함께 조선을 방문하여 고향 지역 교회 등을 돌아다니며 순회강연을 다닐 수도 있었다.

스쿨톤과의 순회강연을 마치고 고향에 온 김재준은 부모, 형제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떠날 때 친정으로 보냈던 아내, 그리고 그때 아내의 뱃속에 있었던 딸을 만났다. 뱃속의 핏덩이가 벌써 3살 된 아이로 자라 있었다. 아버지로서 첫 아이를 처음 본 것이다.

고향 산천도 변해 있었다. 창꼴 지역은 석탄이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광산 개발이 한창이었고, 평화롭던 농촌은 황폐를 넘어 몰락의 도중에 있었다. 수천 명의 광부들이 아오지탄광에서 일을 하고 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술집, 여관, 하숙집 등등이 벌판을 메웠다. 울창하던 송림 숲은 민둥산으로 변해버렸다. 석탄을 캐낸 갱도 때문에 샘물이 마른 지역도 있었고, 토대가 가라앉아 찌그러진 집들도 많았다. 농사꾼들도 농기구를 버리고 탄광에 가서 일을 했다. 알코올 중독과 작부들의 홀림에 시골 사람들의 혼은 다 빠져버려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향 집을 방문한 뒤 김재준은 홀로 근처 여러 교회를 방문하면서 친구도 사귀고 함께 기도하며 격려했다. 경흥읍교회를 찾아가 강연도 하고 서울 유학 시절 함께 하숙하다 죽은 고 김영구 묘 앞에 낙엽송을 심기도 했다. 웅기교회에서는 내키지 않는 금주 금연 데모 강연도 했다. 그때 그는 금주 금연이 그리스도인의 말단 윤리라고 생각하면서 이에 관한 강연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또한, 웅기교회는 주일 예배 설교도 부탁했는데 이를 위하여 뒷산 송림 속에서 온종일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동경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돌아갈 차비가 없었다. 그때 청산학원 졸업생이었던 웅기교회 조승제 목사가 동창 선배로서 도와주고 싶어 했으며, 작은 배의 주방장으로 있던 고향 후배에게 고베까지 태워다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창피하고 구차한 여행이었다. 김재준은 무료 밀항자처럼 검문검색이 있을 때나 중간에 내릴 때에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숨거나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덕분에 무사히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유학을 마치고. 김재준은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송창근의 주선으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반 학생으로 김재준은 조직신학 분야에서 「바르트의 초월론」이라는 졸업논문을 제출했다. 1886년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칼 바르트(Karl Barth)는 1918년 『로마서 주석』을 출판하여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자유주의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김재준이 바르트의 신학으로 졸업논문을 쓴 것은 그가 자유주의 신학에 도전한 것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바르트신학이 별로 소개되지 않았다. 일본 신학자 다가구라가 소개한 초보적인 자료 정도였다. 논의 내용에 깊이가 있을 리 없었지만,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베리 교수는 그 논문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김재준은 졸업시험도 치렀다. 그러나 졸업장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청강생이었고 정규 학생으로 등록한 적도 없으며 처음 한 학기를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학비, 학우회비, 기숙사비 등을 한 푼도 낸 적이 없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졸업생 명단이 나붙었다. 그리고 거기에 김재준이라는 이름도 들어있었다. 청산학원은 그에게 졸업장을 준 것이다.

일본 아오야마학원 동창생과 함께(1934년). 뒷줄 왼쪽 첫 번째가 김재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