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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2] 유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 고향에 돌아가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1:42
조회
912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54-59쪽.


[2] 유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 고향에 돌아가

창꼴 집에 돌아온 김재준은 거의 반년 동안 몸을 추스르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자 아픈 곳도 나았고 몸도 건강하게 회복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몹시 불편했다. 예수쟁이가 된 자신과, 여전히 유교전통을 고수하는 부친의 생강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부친은 공맹지도(孔孟之道)를 정도(定道)로 지킨다고 하면서도 풍수설 같은 이단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김재준의 불만은 더욱 컸다. 따라서 부친이 풍수설을 이야기할 때면, 풍수설을 모르는 서양인이나 일본인보다 우리 민족이 더 나은 게 무어냐고 묻기도 했다. 또한, 부친을 지지하고 있던 형에게는 조상의 유골에서 덕을 보라는 심사가 비겁하다며 대들기도 했다.

김재준의 부친이 기독교를 거부하는 데에도 이유는 있었는데, 그것은 음양론(陰陽論) 때문이었다. 그에 의하면 동양은 음이고 서양은 양에 해당한다. 양기가 복받쳐서 고요할 줄 모르고 살벌과 정복에 날뛰는데 이러한 그들의 양기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예수의 절제와 희생, 십자가의 도가 필요하지만, 동양인은 음이나 원래 온유하고 평화로우며 살벌함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의 희생정신까지 덮어씌운다면 더욱 무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예수를 성인으로 부르는 것도 거부했다. 왜냐하면 성인이라면 언행에 과불급(過不及)이 없어야 하는데 예수는 과격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성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족들과 종교문제로 부딪치자 김재준의 심정은 갈수록 더욱 괴로웠으며, 마치 귀양살이와도 같았다. 이때 그는, “나는 평화가 아니라 분쟁을 주러 왔다.”는 예수의 말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처지도 예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좌절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실하게 잡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집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두만강 하류 강변에 있는 용현학교에서 그를 교사로 초빙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톨스토이의 책 등을 읽으면서 두만강의 자연을 즐겼다. 학교에 부임한 지 반년 정도 지나 어느 정도 학생들과 정도 붙고 주민들과도 가까워져서 보람을 느낄 무렵이었다. 창꼴 집에서 10리쯤 떨어진 귀낙동의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김재준에게 가르칠 것을 부탁하는 연락이 왔다. 기와집 한 채로 이루어진 이 학교는 개화운동이 한창일 무렵 세워졌다가 3년 만에 폐교되는 바람에 아이들은 새로 생겨난 서당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김재준은 고향 사람들을 생각하여 용현학교를 그만두고, 귀낙동학교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김재준은 오촌 조카 희용과 다른 젊은이와 교사생활을 함께했다. 셋은 초ㆍ중ㆍ고, 세 반을 각각 맡아 가르쳤는데, 학생들은 110여 명쯤 되었다. 그가 맡은 고등반은 스물 두세 살 된 어른들도 있었다. 학교를 시작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유교가 뿌리 깊은 지역이라 조심스러웠지만,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청년들을 모아 예배도 드렸다. 이 때 믿게 된 학생들 가운데 장기형, 안세민, 김내명 등이 후일에 목사가 되었다.

창꼴 집에서 10여 리를 통근하던 김재준은 평일에는 학교일과 주일에는 교회일로 바빠지자, 귀낙동학교 옆에 있는 김기련의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김기련은 웅기에 있을 때 친구였는데 당시에는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의 가죽으로는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귀낙동학교 고등과 3학년에 다니는 외동딸이 있었다. 그가 이 집에서 하숙하며 지내자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남편이 없는 젊은 부인 집에서 학교 선생이 유숙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김재준보다 두세 살 위이고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춰 말상대도 될 수 있었던 김기련의 아내는 세 끼 밥상을 챙겨주고, 학교에서 맘늦게 돌아오면 새 이부자리를 깔아놓을 정도로 잘 대해주었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해였다. 그는 그 여인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부친이 찾아와 오해받지 말고 빨리 김기련의 집에서 나오라고 강권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창꼴 집에서 10리 길을 통근하며 다녔다.

김기련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을 때, 동네 청년들이 예수쟁이 교사를 쫓아낸다고 몽둥이를 들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일부 학부모들도 자녀들을 학교나 주일학교에 가지 못하게 하여 학생들이 줄어들기도 했다. 유교전통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주일학교, 교회, 신학문 등에 대한 자연스런 반발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김재준은 학교교실에 앉아 열심히 기도하며 이겨냈고, 주일학교와 예배도 중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 송창근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만큼 촌에서 일했으니 이제부터는 네 공부를 해야하지 않느냐 다들 고학하는데 넌들 못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여비만 마련되면 덮어놓고 일본으로 건너와 공부를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김재준은 일본으로 갈 여비가 필요했다. 귀낙동학교에서의 수입으로는 부족했다. 그리하여 그는 학부형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창꼴 집에서 30리쯤 떨어진 신아산소학교로 옮겼다. 이 학교는 정식 인가된 4년제 소학교인데 학생들은 100명쯤 되었고 교사는 셋이었으며 월급도 제대로 주었다. 학교 부근에는 경찰서, 헌병대, 한 소대의 군인들도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재한 일본인들의 조선어 학습 붐 덕분에 이곳의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적잖은 사례금도 받았다. 부친은 김재준의 아내를 이곳으로 보내 아내와 처음으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신아산학교에서 6개월쯤 지내자 일본 동경까지 갈 여비가 마련되었다. 웅기에서 알던 친구 김예근이 겨울방학동안 집에 돌아왔다가 히로시마중학교로 복귀하면서 함께 일본으로 가자고 찾아왔다. 이제는 정말 일본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그는 학교에 사표를 내었다. 창꼴 집에는 들르지 않기로 했다. 거추장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6년 전 서울에 유학 갈 때에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만삭이 된 아내였다. 그는 아내를 설득하기 위하여 이광수의 「무정」, 「유정」 등의 소설을 인용하면서 달콤한 말로 장시간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친정 회암과 항구가 있는 웅기로 가는 갈림길에서 둘을 서로 뒤돌아보지 않기로 하고 헤어졌다. 만삭이 된 아내는 뚱뚱해진 배에 무거운 살림 짐을 머리에 이고 울상이 되어 친정으로 향했다. 김재준도 웅기를 향해 걸었다. 무정한 자식, 비정한 남편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