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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2] 유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 서울생활과 개종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1:35
조회
1155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39-54쪽.


[2] 유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 서울생활과 개종

당시 서울은 인구 15만의 작은 도시였으며, 크기도 사대문안으로 국한되어 있었다. 사대문 밖은 대부분 초가집으로 구성된 농사를 짓는 시공 동네였다. 김재준은 서울에서 학교 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그동안 받은 교육으로는 원하는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20살은 중학교에 들어가기에 너무 많은 나이였다.

김재준은 일반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한 학기에 한 학년씩 속성으로 가르치는 중동학교 고등과에 등록하여 공부했다. 그곳은 의학전문학교나 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마무리 공부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도 의전이나 법전에 들어가는 목표를 세울 수도 있었으나 경제적인 뒷받침이 안 되었고 자신의 소질에도 맞지 않는 것 같아 포기했다.

한 학기를 공부하고 여름방학이 되자 김재준은 고향을 방문하는 백부를 따라 창꼴 집으로 갔다. 이때 그는 어릴 적 ‘매서인’이 주고 간 신약성경을 형의 궤짝 속에서 찾아 읽었다. 그가 기독교에 관심이 생겨 그랬던 게 아니라, 백부가 발행하는 『학생계』라는 잡지 때문이었다. 당시 이 잡지는 학생들이 방학 동안에 읽어야 할 양서를 앙케이트 형식으로 소개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몇 권씩 추천한 책 가운데 신약성경이 거의 예외 없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본 김재준은 신약성경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집에 가면 형의 궤짝 속에 숨겨진 신약성경을 읽어보리라 생각했다.

신약성경을 어느 정도 읽어보았지만 김재준은 별다른 감동이나 느낌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책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할 양서로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약성경을 서울로 가져가기 위해 집속에 넣어 두었다.10)

10) 김재준, 『인간이기에』, 서울:향린사, 1968, 213쪽.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서울에는 콜레라가 창궐했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전염병이 도는 서울로 돌아가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하여 개학한 후 두 달 정도를 집에서 보내야 했다. 콜레라가 수그러진 뒤 서울로 돌아온 김재준은 속성과 수업에 다시 참여했지만, 그동안 학습 진도가 너무 많이 나갔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게다가 학비를 낼 돈도 모자랐다.

그 무렵, 서울 시내 장로교회 연합 사경회가 승동교회에서 열렸다. 강사는 깡패였다가 회심하여 부흥회를 인도하러 다니던 김익두 목사였다. 그가 서울에서 인도하는 집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웅기에서 김재준의 서울 유학에 불을 지폈던 남대문교회 전도사 송창근은 이 부흥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었다.

사람들도 많이 참석하여 예배당 안이 차고 넘쳐 바깥뜰과 담 위, 그리고 옆집 지붕 위에까지 올라앉았다. 기도로 병이 낫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두 주일가량 계속된 이 부흥회에 김재준은 구경 삼아 호기심을 가지고 참석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모여 웬일인가 하고 가보았던 것이다. 서민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부흥사 김익두 목사는 부흥회 마지막 날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본문으로 설교했다.

“‘닭이 달걀에서 나오고 달걀이 닭에서 나오고’ 이렇게 암만 따져도 해결은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이것은 사람의 이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포다.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누가 만들어서 하나님이라면 그건 물건 중의 하나요, 창조주 하나님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믿음으로 아는 것이고 사람의 이치를 따짐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 여러분 믿으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당신 하나님으로 당신 생명 속에 말씀하실 것이오! 그때부터 여러분은 ‘새 사람’으로 ‘새 세계’, ‘새 빛’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오!”

승동교회 예배당 2층 바깥 현관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어 새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라고 외치는 김익두의 설교는 김재준을 사로잡았다. 배우려는 의지와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싶은 의욕은 있었지만, 낮선 땅 서울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가난한 시골 청년의 마음에 김익두의 설교가 감동을 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정적 감동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교훈과 계율을 강조하는 유교에 대한 반발,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 사랑과 용서와 영생을 가르치는 기독교에 대한 매력 등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는 훗날 이것을 자신의 내면에 있는 낭만정신, 즉 빡빡한 현실주의와 대비되는 낭만정신의 작용이라고 묘사했다.

“내가 유교 가정에서 혼자 기독교로 개종한 것도 어느 면에서는 이런 낭만정신이 적용한 까닭이 아니었던가 싶어진다. 유교의 그 빡빡한 교훈과 계율을 초월한 ‘자유하는 영’의 사람으로서의 ‘낭만’ 말이다. 타락자, 인생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찌꺼기 인간’들에 대한은 문책(問責) 없는 사랑의 너그러움, 죽음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생명을 노래하며 영원을 모험하는 모습, 무덤을 헤치고 부활한다는 불퇴전(不退轉)의 삶의 의욕 등등이 ‘젊음’의 생명에 낭만을 불어넣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11)

11) 김재준, 『인간이기에』, 서울:향린사, 1968, 217쪽.

계율을 강조하는 율법종교로서의 당시 유교에 대한 반발과 이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기독교의 개종은 김재준뿐만 아니라,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던 종교 체험이었다. 그것은 또한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도바울이나, 행위를 강조하는 중세교회에 반발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의 종교 체험과도 유사한 것이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던 김재준은 그리하여 “옳다! 나도(예수를) 믿겠다.”라고 결단했다. “교실에서 탈락한 자연인이 교회에서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 되는 순간, 구원을 맛보는 순간,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순간, 창조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간,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믿고 따르게 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 김재준의 젊은 가슴을 뜨거워지면서 환희와 희열로 가득찼다. 종교적 결단이나 회심을 할 때에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기독교에서 성령 체험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또한 믿음과 열정이 타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집에서 가져온 성경책을 열심히 읽었다. 밥은 배불리 먹지 못했지만 성경은 밥 먹듯이 읽었다. 그 말씀은 꿀 송이처럼 달았다. 그리스도인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으로 그가 읽은 성경은 이상한 책이었다.

“문학을 읽는 것같이 상상의 세계도 아니었으며, 철학을 읽는 것같이 사색의 세계도 아니었으며, 역사를 읽는 것같이 사실만의 세계도 아니었으며, 과학을 읽는 것같이 실험과 분석의 기록도 아니었고 동양 종교에서와 같이 음침하고 신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가려졌던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책이었고, 기쁨을 주는 책이었으며, 위대한 미래를 눈앞에 전개시켜 주는 책이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신비한 책이었다.”12)

12) 김재준, 「순례의 길(2)」, 『십자군』 6, 1952/2, 21-22쪽.

그는 없는 돈에 찬송가를 사서 불렀다. 기도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는 훗날 당시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갖고 온 예의 성경은 있었지만 찬송가는 없었다. 찬송가까지 사서 손에 든 때에 내 가슴속에는 무언가 뜨거움이 타올랐다. 기도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장소를 보면 기도할 의욕부터 생긴다. 성경을 밤새가며 읽었다. 감격해서 뻘겅 연필로 줄을 무턱대고 그으면서 탐독했다. 전도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 듯 일어났다.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그 의미도 달라졌다. 그 전 생활은 ‘분토’같이 여겨졌다. 나는 ‘새 사람’이 됐다고 느꼈다. 10년 전 아버님 ‘서당방’에 들렸던 ‘방랑 전도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씨를 심을 때에 나지 아니할까 ……’ 하는 찬송가를 부르며 그 전도자를 기억했다. ……일본말로 된 기독교 서적들을 탐독했다. 분간 없이 다 좋았다. 가가와고 우찌무라고 모두가 옳고 훌륭한 것 같았다. ‘예수’를 중심한 것,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무어든 고맙고 감격스러웠다.”13)

13) 김재준, 『인간이기에』, 214-215쪽.

신앙의 열정에 휩싸인 젊은 김재준은 아버지를 전도하기 위하여 거의 매 주일마다 장문의 편지를 써보내기도 했다. 자기에게 유교의 계율과 교훈을 가르치며 이를 철저히 지킬 것을 당부했던 유학자 아버지, 그리고 어린 시절 기독교를 배척하도록 영향을 준 아버지가 자신처럼 기독교 신앙인으로 개종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답장은 그가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네가 부모 형제까지도 파리변사(巴璃邊事)로 여기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묵적(=墨子)의 도를 따르니 마음이 아프다. 아마도 네가 ‘환장’한 것 같다.”14)

14) 김재준, 『인간이기에』, 215쪽.

아버지의 부정적인 응답에도 불구하고, 김재준은 자신의 종교 체험의 감격을 억누르거나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러한 체험이 병아리가 달걀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영의 사람”이 ‘자연인’의 껍질을 깨고 다시 탄생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거듭남은 ‘환장’ 정도가 아니라고 독백(獨白)했다.

회심을 경험한 김재준은 종로에 있는 YMCA회관에서 거의 매일 지냈다. 당시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등이 이끌던 YMCA는 젊은이들과 민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민족문화를 발굴하였으며,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실현했다. 김재준은 매 주일 오후 두 시에 열리는 교양강좌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명사들의 강연을 들으며 종교와 민족의 문제들에 대해서 배우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일에는 잡지실에 들러 『개조』, 『중앙공론』 등과 같은 잡지를 읽으며 지적인 욕구도 충족했다.

무일푼이어서 마땅히 갈 곳이 없던 그에게 YMCA회관은 좋은 쉼터요 신문화를 접할 수 있는 장소였다. 또한, 그는 YMCA 영어 전수과 3학년에 들어가 1년 정도 다니기도 했다. 이때 정경옥(1903-1945)도 같은 반에 있었는데, 그는 훗날 미국에서 유학한 뒤 감리교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김재준은 영어 전수과를 졸업하기 위해 졸업시험도 치렀다. 그러나 그는 졸업장을 받을 수 없었다. 성적은 첫째였지만 1년 내내 수업료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로 회심한 뒤 정신적·종교적 갈증을 어느 정도 적신 김재준에게 자신의 내면과 현실에 불만스럽게 누적되어 온 결혼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숙제가 주어졌다. 당시 중학생들 대부분은 유교적인 조혼의 희생자여서 연애결혼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이혼을 무리하게 강행하느냐, 아니면 억지로 화해하여 계속 사느냐 사이에서 속병을 앓고 있었다.

김재준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조혼의 희생자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겸, 결혼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할 겸, 이에 대한 글을 써서 『학생계』의 학생 현상 문예란에 투고했다. 글의 제목은 「이혼하려는 젊은이들에게」였다. 이 글에서 그는 남편의 일방적인 이혼은 한 여인의 존엄성, 자유, 평등을 침해하는 비극이기 때문에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인간으로서의 아내의 인생을 고려해서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 그 가문에서 버림 받는 순간 그녀의 삶은 무(無)가 된다 이혼이라는 관문의 빗장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젊은이의 처지는 비극이다. 그러나 ‘이혼당한 아내’란 여인의 경우는 더 큰 비극이다. ……위대한 미래를 꿈꾸는 학생으로서 자기를 하늘같이 믿고 목숨같이 아끼는 한 인간을 짓밟고 내쫓고서 민족이나 국가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건 진짜 철면피가 아닐 수 없다. 이혼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서 민족과 나라를 말하지 말라.”15)

15) 김재준, 『범용기 : 장공 김재준 자서전』, 서울:풀빗, 1983, 46쪽.

자신의 행복을 위한 이혼 때문에 한 인간의 삶을 비극으로 만들고 어떻게 민족과 나라를 논할 수 있겠는가 라는 호소는 곧 자신에 대한 고발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책임, 남녀평등에 대한 청년 김재준의 시각이 잘 반영된 것이었다. 그의 글은 2등으로 당선되어 『학생계』에 실렸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글이 공개적인 잡지에 실린 것이다. “글을 써낸다는 것은 쓴 사람이 그만큼 스스로의 삶에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그의 생각처럼, 김재준은 부모가 맺어 준 아내와 일생을 함께했다.

김재준의 서울생활은 가난했다. 경제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던 백부의 출판사업도 경영난에 허덕였고, 장도빈 선생이 창간한 『조선지광』이라는 잡지의 출판을 돕기도 했지만 급여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하숙비가 밀려 추운 겨울에 쫓겨난 김재준은 함박눈을 맞으며 밤새 서울 거리를 방황했다. 혜화동 언덕을 넘어 돈암동 벌판으로 가기도 하고, 한 걸인을 뒤따르며 그가 예수님이 화신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으며, 시구문 밖 공동묘지에 가서 천주교 순교자들의 묘를 보며 자신도 이런 순교자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16)

16) 김재준, 『인간이기에』, 220쪽.

김재준은 돈과 가난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는 돈에 대해서 비굴해지기보다는 “애당초부터 돈을 멸시하고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청빈(淸貧)”의 삶을 살자고 결심했다. 많이 소유하여 편하게 사는 것보다 소유욕에 도전하여 고생하며 사는 것이 더 정신적이고 영의 자유를 누리는 인간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17) 그는 또한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예수의 삶과 일치시키고 싶었다. 그리하여 “돈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기 못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예수의 말을 기억했다. ‘영의 자유’를 십이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이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소유’에 자기의 삶을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바울의 말을 빌려, “돈아, 네 권세가 어디 있느냐?”고 호통을 치고 싶었다.

17) 김재준, 『인간이기에』, 218쪽.

김재준의 이러한 돈에 대한 생각과 청빈에 대한 사고는 그 무렵 그가 읽었던 몇몇 책에서 영향받은 바가 컸다. 그는 당시 『톨스토이 십이경』이란 책과 성 프랜시스 전기,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의 고오베 빈민촉생활에 관한 책 등을 읽었는데 모두 가난과 청빈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인인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St. Francis of Assisi, 1182?~1226)는 김재준이 평생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자 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김재준이 이해한 성 프랜시스는 일본의 작가 미야자끼가 쓴 『아씨시의 성 프렌체스코』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김재준은 아씨시의 성자의 삶을 낭만적으로 이해했는데 그 줄거리는 이러하다.

“‘프렌체스코’는 부잣집 맏아들로서, 무사, 환락가의 인기 청년으로서 화려한 일생을 약속받은 터이었지만, 한때 병석에서 인생의 하염없음을 느끼고서는 병이 회복되자 삶의 방향이 온전히 변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어느 이른 봄, 움부리아의 허물어진 성터에 돋아나는 앳된 싹을 만지며 무일푼의 설교자 그리스도를 사모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둘러쌌던 부와 향락과 인기와 호사 등등 마술의 쇠사슬을 끊고 자유인이 되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초라한 성당 제단 앞에서 혼자 맹세한 ‘고독자’는 혼자됨을 축복으로 여겼다. 그리고서 거지 때에 섞여 그들과 옷을 바꿔 입고 집에 돌아온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고 족보에서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늙어 죽을 순간까지 ‘무소유의 방랑 성자’로 지냈다. 평생을 누덕 옷에 새끼 띠를 띠고 무일푼의 탁발승으로 이 집 저 집 다니며 마당을 쓸고 변소를 닦으며 쥐어 주는 찬밥 한 줌에 감격을 느끼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해’는 형제요 ‘달’은 자매였다. 사나운 이리도 그의 앞에서는 순한 강아지처럼 머리를 숙였다. 한다. 마감에 찾아온 ‘죽음’도 그에게는 사랑하는 친구였다. ‘내 사랑하는 형제 죽음이여!’하고 그는 사랑으로 죽음을 껴안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것은 그가 소유욕을 전적으로 포기했기 때문에 얻어진 ‘자유’였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무아해탈(無我解脫)의 자비행이라고 보았다.”18)

18) 김재준, 『인간이기에』, 218-219쪽.

김재준은 훗날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글에서 세 사람을 드는데, 이때에도 월남 이상재, 송창근과 함께 성 프랜시스를 꼽았다.19) 그는 성 프랜시스에 대해서 논하기를, “내가 정신적으로 ‘만났다고’ 할까, 어쨌든 내 젊은 시절에 결정적으로 감화를 남긴 분은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였다. 그 꾸밈없는 사랑의 생활, 그 ‘청빈’이라는 아가씨와 결혼, 그 어린애 같이 단순화하면서 무사같이 용감한 ‘무일푼’의 행각생활이 몹시 ‘동양적’인 데 맘이 흐뭇했었다. 동양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난다면, 서양에서와 같은 교리체계보다도 이런 단순 철저한 사랑의 생활을 내세울 것이 아닐까하고 ‘낭만’을 찬양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는 천주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것은 그가 모든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9) 김재준, 『인간이기에』, 82-85쪽.

성 프랜시스는 김재준의 학형이자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 중의 하나인 송창근도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었고, 그의 친구 한경직 또한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장로교 목사였던 이들이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빈(John Calvin)보다 아씨시의 성자를 더 존경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젊은 시절 교리나 신학보다도 실제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서 더욱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민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재준은 성 프랜시스와 같은 청빈의 삶을 동경했기 때문에 하숙비를 내지 못하는 처지에도 거리에서 떨고 있는 거지에게 집에서 보내온 솜바지 저고리를 몽땅 주기도 하고, 하숙집에서 쫓겨나 눈 오는 밤거리를 혼자 걷는 자신의 모습을 비참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도리어 ‘무소유의 낭만’이라며 스스로 노래하기를 원했다.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자유와 낭만의 모습으로 해소하고 승화시키려는 가난한 청년의 노력이었다.

하숙집 문제는 한 방에서 같이 유숙했던 친구 김영구가 겨울방학을 고향에서 보내고 돌아오자 해결되었다. 김재준보다 한두 살 아래였던 김영구는 함북 경흥읍교회 장학생으로 서울 유학중에 있었는데, 김재준의 사정을 다 듣자 자신의 학비를 몽땅 털어 밀린 하숙비를 내주고 이부자리를 찾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숙집을 옮겨 함께 유숙했다. 그러나 김재준은 이렇게 진 신세를 갚지도 못한 채 그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얼마 후 김영구가 장질부사에 걸려 죽은 것이다. 그가 20살이 되는 설날이었다. 이것은 김재준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내세, 죽음, 인생의 허무함 등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타계적인 신앙 즉 죽음 저편에 약속된 영원한 천상 세계에 대한 믿음을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친구 김영구가 죽은 지 며칠 안 되어 김재준은 승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영구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김영구란 친구 때문에 동명이인인 김영구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예수를 믿은 지 3년이 지난 때였다. 그가 이렇게 늦게 세례를 받은 것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경험이 있는데다 물세례는 형식에 불과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도한, 세례를 받았다는 그리스도인들이나 심지어 교회 제직들에게서까지도 인간의 거듭남에 대한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친구 김영구의 장례식을 인도하여 준 목사님의 설득은 강경했다. 결혼식처럼 세례식도 예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교회에 공적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김재준은 이에 순종하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훗날 김영구 목사의 이러한 신앙 지도를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후, 친형이 하숙집으로 찾아왔다. 그를 집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였다. 김재준은 이때 만성 대장염, 이질, 기침 등이 겹치면서 몸이 많이 상한 상태였다. 그리고 돈도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기회만 있으면 일본으로 건너갈 궁리만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백부는 김재준을 염려하여 고향집에 연락해 그를 데려가게 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심정으로 집으로 향했고, 형은 동생이 혹시 도망갈까봐 기차역으로 가는 동안 손목을 놓지 않았다. 3년 동안의 서울생활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