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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10] 김재준의 사상과 그 평가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7:37
조회
1127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206-233쪽.


[10] 김재준의 사상과 그 평가

김재준은 전집이 18권이 될 만큼 많은 종류의 글을 남겼다. 그가 다룬 분야도 신학 거의 전 분야에서부터 일반 학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책이나 논문, 수필이나 수상문, 설교문이나 강연록 등에 담겨져 있는 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다 정리한다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따라서 본 책에서는 그의 사상적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몇 가지 주제를 묶어 정리하려 한다. 우리는 이미 생애 부분에서 그의 사상과 관련된 내용들을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애와 사상이 어떻게 연관되면서 진행되어 왔는지에 대한 보완 내지는 보충적 차원에서 그의 사상을 기술하고 평가하고자 한다. 이러한 기술과 평가는 그가 생전에 원했던 것처럼 독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후학들이 그의 사상을 넘어 설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성경

김재준의 신학은 신정통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71) 따라서 그의 성경관 역시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72) 그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구속주의 출현과 구속함 받고 영생 얻는 길을 계시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는 역사와 방법, 하나님이 보낸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영생을 얻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71) 신정통주의에 관해서는 김재준, 「신정통주의의 역사적고찰」, 『십자군』, 1960/4을 보라. 72) 김재준의 성경관에 대해서는 김재준,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 『십자군』, 1950/3; 「성서비판의 의의와 그 결과」, 『십자군』, 1950/5 등을 참조하라.

“성경의 목적은 무엇인가?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그 속에 영생이 있는 줄 아는 것이니 이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요 5:39) 하였으니 성경의 목적인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요 영생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말씀을 선포했다. 즉, “하나님은 우선 그 사람 자신을 영으로 감동시킨 후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임을 깨달아 그 사람의 인격과 개성을 통하여 그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감동시킨 사람은 이 세상에서 숨을 쉬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개인적인 특성과 그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사람을 통해서 선포된 말씀에는 히브리어라는 언어와 이스라엘 사회의 문화, 그리고 그의 언어 습관 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 하나님은 고대인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현대 천문학이나 물리학 등의 지식을 사용하지 않고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와 그의 지식의 한계 내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기를 계시하실 때에는 그 받을 사람에게 영감으로 임하시되 결코 그의 인격을 억압하거나 무의식의 상태로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더욱 양양하고 순결케 하여 어디까지나 자기로서의 인격적 반응이 철저하게 하시는 것이다. 모든 선지자들이 다 자기로서의 똑똑한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똑똑한 정신으로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영감을 통하여 사람에게 계시되는 중요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이다. 즉,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자한 분이며, 그분은 죄인을 구속하려는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문자의 형식이나 문화가 어떻든 간에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이 전달하려고 하는 본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의 내용이 문자적으로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얼마나 정확한가를 따지거나, 모든 면에서 절대로 정확무호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에서 역사나 과학이나 연대표 등에 절대무오를 기하지 않으셨다. 그런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지식 정도에 맡겨두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경의 문자적 무오를 기하지도 않으셨다. 그것은 다소의 문자적 오류나 역사, 과학 등 지식 부문의 불완전 때문에 구속의 경륜이 좌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성경 절대무오설, 즉 성경에는 현재의 과학이나 역사적 지식에 비추어 볼 때 틀린 내용이 절대로 없다는 주장이나, 성경의 축자적무오설, 즉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에 틀린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나, 성경의 기계적영감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말씀을 계시하실 때 사람을 기계처럼 작동하게 하셔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받아쓰게 하셨다는 주장이나, 성경의 축자영감설, 즉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 토씨 하나하나에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이 부여되어 있어서 틀린 것이 아나도 없다는 주장 등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김재준에 의하면, 성경 본문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절대시하는 근본주의적 성경관은 “신앙의 중심이 살아 계시고 인격이신 하나님과 그 독생자 그리스도에게서 떠나서 기록된 문서로서의 인격 아닌 성경으로 옮겨졌으며, 그 때문에 영의 종교가 책의 종교로, 인격의 종교가 물상의 숭배로, 자유하는 복음의 종교가 노예화하는 율법의 종교로 전락”하게 한다고 비판했다.73) 근본주의적 성경관은 기독교를 정체시키고 율법화하며 비인격화한다는 것이다.

73) 김재준, 「대한기독교장로회의 역사적 의의」, 1956.

김재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된 성경은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서 씌어졌기 때문에 비평(criticism)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비평이란 비난이나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진리의 탐구를 위한 것이다. 성경은 비평을 통해서 “그 진가가 상실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종래의 불순한 진애가 일소되고 그 본질적인 것이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성경의 진리는 비평을 하면 할수록 더욱 빛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소위 저등비평(lower criticism)인 본문비평과 언어비평뿐만 아니라 고등비평(high criticism)인 문학적 비평과 역사적 비평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는 원본이 없고 다양한 사본들만 있는 상황에서 더 좋은 본문, 더 나은 본문을 찾기 위한 노력인 본문비평이 있어야 하고,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등이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연구하는 언어비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문자로 씌어진 문서이기 때문에 문학적 분석인 문학비평이 있어야 되고,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씌어졌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이 역사적 상황과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연구하는 역사비평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책이 많아 항상 비좁기만 한 서재에서.

김재준에 의하면, 이러한 성경에 대한 비평은 “신학자들이 자기가 추상해 낸 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편한 대로 성경을 왜곡, 사용하는 일”을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소위 우의적 해석이니 교리적 해석이니 하는 것 때문에 성경 기자의 본의가 무시를 당하는 일”도 막을 수 있다. 즉, 성경 자체의 실존을 인간이 세운 교리체계에 그대로 맞추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교리보다 더 우위에 놓기 위해서라도 성경에 대한 문학적·역사적 비평을 포함하는 비평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성경관은 종교개혁자들이 교리와 성경의 권위를 동일시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반박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교리보다 우위에 놓았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칼빈도 성경은 씌어질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문화를 배경으로 계시되고 집필되었기 때문에 읽는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적 배경에서 성경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김재준은 칼빈적이며 신정통주의적인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김재준의 성경관은 자신의 독창적인 창작이 아니라 당시 유럽이나 북미주 등지에 있는 대부분의 주류 신학교에서 가르쳐지던 내용이었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면서 성경에 관한 이러한 지식을 습득했다. 또한 이와 같은 성경관은 구미나 일본 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학도들이나 선교사들에 의해 이미 한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재준은 근본주의적 성경관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역사비평적 성경관에 입각하여 성경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근본주의 신학의 성경관을 정면으로 반박했을 뿐만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신학교에서 계속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했고 교회정치에서 힘을 가진 그들로부터 목사직을 제명당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김재준은 세계 성경학계의 주류적 경향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고 이의 타당성을 논증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헌했다. 또한 이러한 그의 성경관은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기독교의 정치참여신학, 그리고 민중신학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역사비평적 성경관은 역사비평을 포함하는 통시적(diachronic) 성경해석방법 자체가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점 또한 동반하고 있다. 즉, 당시 세계 성경학계에서처럼 역사비평을 절대시하면서 저자 중심의 성경해석에만 몰두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본문의 문학적인 면이나 신학적인 면, 그리고 현대 독자의 관점에서의 이해 등을 소홀히 취급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비평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이 김재준의 성경관에 대한 비판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비평이 절대시되었던 20세기 중반까지의 성경해석은 오늘날 공시적(synchronic) 해석방법에 의하여 보완, 보충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

김재준은 교회를, ‘전 우주적 생명의 공동체’,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창조적 사랑의 공동체’,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등으로 표현했다. 더 구체적으로,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주(主)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인간끼리 친애하고, 어려운 이를 도우며, 슬픈 일을 당한 분을 위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대변하며, 폭력에 비폭력으로 항거하고, 모든 불의한 세력에 맞서 예언적 권위로 직언하는 하나님이 사자로서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인간의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원에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신앙 공동체임을 의미한다.

부활주일예배에서 축도하는 모습. 김재준은 지식인과 젊은이들을 위하여 경동교회를 세우고 목회했다.

김재준은 교회의 역할 중에서도 특히 교회가 세상과 역사를 평화적으로 변화시킬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가 제시하는 일곱 가지 이상적인 교회상에는 이러한 사고가 잘 반영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74)

① 교회는 어떤 세상 정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② 교회는 그 지역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역사로 변화시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 세상 권력에 동질화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질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③ 교회는 전쟁 도발에 항거하여 평화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④ 교회는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떤 특권층의 소수 인간들로 구성된 기관에 충성하는 것보다도 대다수 민중의 친구가 되고 그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정치적 독재나 경제적 독과점 재벌의 불의, 무법 또는 횡포를 견제하고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⑤ 교회는 정의에 불타는 학생들, 탐욕자에 희생되는 절대 다수의 밑바닥 노무자, 실직자들의 친구가 되고 적어도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웃 사랑이고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길이다.
⑥ 교회는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함께하시기 때문에 좌절 없는 희망의 등대여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망해서는 안된다.
⑦ 교회는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이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지체들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와 역사와 자연이 하나 되는 사랑의 대조화(大調和)로 인류의 역사는 그 완성의 종말에 삼켜진다.

74) 김재준, 「교회의 뿌리」, 『고토를 걷다』, 1985, 104~105쪽.

이러한 김재준의 교회관은 개인의 영혼구원만을 부르짖고 사회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던 한국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즉, 독재정권이나 경제재벌들의 독과점으로 권력과 부가 일부 특권층에게만 쏠리고 대다수 민중들은 가난과 억압에 시달려야 하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한국 교회가 그동안 예언자적 목소리를 올바르게 외치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화’를 강조한 것이었다. 따라서 김재준은 한국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교회개혁을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했다.75)

75) 김재준, 「개혁교회의 개혁」, 『제3일』, 1970/10.

① 신학하는 태도를 개혁해야 한다. 옛 것에 사로잡히는 ‘정통’이나 ‘보수’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학에 자기를 개방하여 진지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이를 대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정통주의자라는 사람들은 자기를 진리 탐구자의 입장에서 심판자의 입장으로 옮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신에 대한 학문을 한다는 의미에서 자기가 신이 되고 자기가 주장하는 신학이 직접 신이 발표한 학문인 줄로 착각해서 그것으로 남을 심판한다. 어이없는 우상화며 그걸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우상숭배자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어떤 신학 내용을 채택하든지 간에 우선 신학 자체에 대한 개방적이고 상대적인 태도부터 수련해야 할 것이다.”

② 교회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교회나 교회 기관 안에서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권력구조를 다지려는 데 분주한 악동들은 사라져야 하고, 직분이나 직책을 권력으로 생각하는 의식이 사라져야 한다.

“교권은 봉사를 위한 종합적인 경륜을 세우고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것을 수호, 신장하는 권력인 경우에만 진정한 교권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교회 간의 협력인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힘써야 한다. 연합기관에 참여하면서 자기 교파에만 충성하고 정치적인 경쟁을 하는 경우는 없어져야 한다. 김재준은 이러한 교권주의나 연합운동 등에서 나타나는 폐단을 극단의 정통주의 신학의 부산물로 보았다.76)

76) 그러나 오늘날 교권주의, 교파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저해하는 비연합주의 현상은 극단의 정통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개인이나 집단만이 저지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소위 진보신학이나 개방적인 신학을 한다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집단도 이러한 일을 자행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③ 교회는 대 사회관계에 눈을 뜨면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에 대한 무관심 또는 무책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으로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김재준은 교회가 사회에서 바람직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나라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정치에 참여야하고 역사변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경우나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경우에는 신앙적으로 이를 거부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것은 사탄에게 절을 하고 천하를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자적 역할에 참여하면서 “미래 역사를 더 좋은 역사로 창조하는 자는 현재에 만족 또는 굴종하는 ‘다수’가 아니라, 현재에 불만을 품고 높은 가치를 위해 고난받는 ‘소수’”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런 소수자를 핵심으로 하는 교회와 세상은 서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 나라에의 진전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이다.77)

77) 김재준, 「교회와 세상」, 1976. 김재준의 ‘소수’ 개념에 관한 구약 성경적 배경에 대해서는 「구약성서에서 남은 자의 사상」(1972)을 보라.

김재준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공헌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78)

“자유와 인간 존엄을 지키려는 신념, 폭력보다도 설득, 법보다도 교화, 전쟁보다도 평화, 전 국민에게 균점(均霑)된 복지를 위한 노력, 부정부패에의 도전, 지배욕보다도 봉사와 창조의욕의 조장 등등 언제나 불멸의 ‘비전’으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크리스챤의 정치참여에서 특이한 공헌일 것이다.”

78) 김재준,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기독교사상』, 1967.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비전을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에 참여하기 때문에 평화와 정의, 자유와 인간 존엄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에 대한 태도가 정치발전에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김재준은 정치활동을 위하여 교회가 하나의 정당행위를 해서는 안 되며, 정당이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의 한 부분인 것 같이 결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만약 교회가 하나의 정당행위를 하거나 기독교 정당이 결성될 경우 그 정당이 청렴결백하게 운영된다는 것은 정치 현실상 불가능하므로 기독교와 교회의 위신을 타락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에 참여한다면서 조직 교회를 떠나서도 안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서도 안 된다고 경고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고 인간성을 갱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재준의 교회관은 교회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일깨우는데 공헌했다. 또한 그의 교회관은 1970년대부터 구체화되었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민주화 운동참여를 위한 신학적 틀을 제공했고, 이를 통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를 부르짖었던 민중신학의 형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김재준의 교회관은 교회의 사회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파생되는 다른 기능들의 상대적 약화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교회의 제사장적 기능, 목회적 돌봄과 치유, 복음을 통한 개인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성장과 선교 등이다. 이러한 기능들은 당시 기성교회가 일반적으로 강조하고 있던 사안들이었기 때문에 김재준은 당시 거의 무관심했던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그 필요성에 의하여 강조한 것이지만, 교회의 균형 잡힌 역할을 위하여 이러한 기능들도 함께 제시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주장한 ‘교회의 사회화’를 보완하고 교회의 기능을 균형 있게 만들 수 있는 ‘교회의 교회화’ 신학이 다른 한편에서 요청된다는 것이다. 물론 김재준은 ‘교회의 교회화’를 제시했지만, 위에서 예를 든 교회의 기능들에 대한 강조가 여전히 약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

김재준은 역사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 역사란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무대이다. 이 무대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 안에서 부단히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역사란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 세속세계다.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그 속에서 일하시는 무대다.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활동을 내포한 세속활동이다. 역사는 동시대적인 그리스도(contemporary Christ)가 일하는(operate) 영역이다.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동적(dynamic) 행동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의복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자의적이면서 신실하다. 다이내믹하면서 그리스도론적이다.”79)

79) 김재준, 「역사참여의 신학」, 1971.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지금 하나님이 역사 현실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며 무엇을 지향하고 계신가 하는 것을 분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그 지향하는 역사 과정에서 이를 위하여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그 역사에 참여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구속사적 입장에서 이 현실의 역사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이 역사로 하여금 구원의 목표를 지향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과 지향에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80)

80) 김재준, 「역사참여의 문제와 우리의 실존」, 『기독교사상』, 1958/3.

김재준은 한국의 역사도 하나님과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했다. 예를 들자면, 그는 일제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된 것을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것과 유사하다고 평가하면서 8.15해방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 1945년 8월 15일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방을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값없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국제정치의 세력 균형과 일본 군벌에 대한 응징 등을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합니다만 우리는 그 배우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봅니다(단 5:24-28).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보다도 위로를 선포하셨습니다. ……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경위와 우리 민족이 일제의 합방에서 풀려난 것과는 그 과정과 성질과 상황이 비슷합니다.81)

81) 김재준, 「한국교회 윤리생활의 재검토」, 1962.

그렇기 때문에 해방과 더불어 주어지는 건국의 기회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조국이 해방된 것이 하나님의 연민으로 말미암은 은혜임을 절감하여 무엇으로 감사의 제물을 드릴지 마음에 넘쳐 말이 없음을 깨닫는다. 다만 이 나라 자체가 성별된 하나님의 성소가 되며 백성은 하나님의 뭇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길이길이 이 땅에 머물러 천하민국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바라보고 감히 천과로 범치 못하는 에덴이 되기까지 빌고 또 일하며 이를 위하여 살고 또 죽는 것이 만일의 보은임을 다시 생각하는 바이다.”82)

82)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이념」, 1945.

다른 한편, 그는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했다.83) 이 심판은 교회와 일반 국민이 자유의 선풍에 휘둘리고 부수어져 혼란과 분열의 시대를 이룬 것에 대한 심판이었다. 하나님이 은혜로 해방을 주셨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되는 건국의 기회로 삼지 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83) 김재준, 「한국신학대학 25년 회고」, 『신학연구』, 1965.

그는 정치적, 경제적 불의가 자행되고 있는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의 상황도 하나님의 구속사적 입장에서 이해했다. 그리하여 역사를 바르고 정의롭게 하려는 노력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부정, 부패가 나라 전체에 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그러나 부패한 집권층의 구에 거슬리면 신변이 위험하다 해서 불의를 불의라고도 못하고 잠잠하기만 한다면 결국 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 활동에서 외면하는 불신앙자가 된다. 노동 대중이 기업주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고 경제성장이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가져왔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뜻일 수가 없다.”84)

84) 김재준, 「역사참여의 신학」, 1971.

김재준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약성경의 구속사적 이해는 신정통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국 성경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이에 의하면,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님의 활동무대로 표현하면서 인간을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여긴다.

김재준은 구속사적 역사 이해를 한국 역사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면서 실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구속사적 성경 해석을 해석 그 자체로만 끝내지 아니하고 이를 한국 역사에 적용하여 한국사를 성경의 구속사적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공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이해와 실천은 독재정권의 핍박과 박해속에 있는 역사 참여자들에게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참여를 신앙적 책임감과 소명감으로 이해하게 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역사관에는 역사와 역사 참여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낙관론, 역사를 구속사라는 틀 속에서 도식화한 것, 역사 속의 인간이나 체제 등을 선과 악으로 예리하게 나누는 이분법 등이 내재한다는 점이 그 한계로 지적될 수 있겠다.

자유

김재준은 기독교가 인간을 자유케 하는 종교라고 보았다.85)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인간의 자유를 증언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종교적 노예상태로 지내다가 자유를 얻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정왕국을 건설하게 하려는 것이다. 즉, “어떤 인간이 정권을 가지고 다른 모든 인간을 압박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하느님이 주장하시는 나라, 자유와 정의와 자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인간 해방의 기록”이었다. 그 주동은 하나님 자신이었고 그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인물은 ‘모세’라는 지도자였다. 출애굽 이후, 고대 이스라엘에서 자유와 해방에 대한 기대는 장차 올 메시아 왕국에 대한 기다림으로 이어졌다.

85) 이에 대해서는 김재준, 「기독교와 인간 자유」(1973)를 참조하라

그는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인간의 자유를 선언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갖 육체적, 정신적 질병으로부터의 자유와 행동을 속박하는 율법주의로부터 자유를 선언하면서 인간 해방을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자유란 인간의 내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외교·문화·종교 등을 포함한 외적인 자유도 포괄하는 것이었다. 또한 바울 역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얽매는 율법·규칙·제도·정치·경제·윤리 등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선포했다고 보았다.

김재준에 의하면, 오늘날 인간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성령의 증언으로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은 물질적 탐욕, 또는 어떤 사상에 종이 될 만큼 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과 자각을 통하여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자유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피로 증거해 주신 자유, 인간에 대한 최후의 속박인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유 함을 얻었다는 것으로 인간 자유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자유의 값이 정해진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데서 값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번 돈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그 돈과 그 돈 번 사람과의 값이 결정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신문을 보며 세상 읽기. 5.16 군사정권에 의해 신학교수직에서 물러난 김재준은
[대한일보] 논설위원직을 10년간 맡기도 했다.

김재준은 자유를 얻은 인간이 이웃을 위해서 사랑을 실천 하는 것이 그 자유를 가장 값있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적 자유를 가진 자만이 빈곤이나 시련이나 유혹이나 죽음의 모든 것을 이기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건설적인 자유봉사를 즐겨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86)

86) 김재준, 「기독교의 기본 문제」, 1955.

“우리가 진정 우리의 자유를 높은 차원에까지 올리려면 ‘자유로운 봉사’, ‘나는 아무에게도 종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하는 탁 트인 인간성으로서의 ‘자유’까지 가져야 할 것이다. 자유로우면서 봉사하는 기쁨을 가진 자유인만이 참 자유인이라 생각된다.”87)

87) 김재준, 『인간이기에』, 137쪽, “나는 아무에게도 …… 종이 된다”는 루터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김재준이 제시한 자유란 한마디로 죄의식이나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인 내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외교 등 외적 자유도 포함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체험한 인간은 그리스도에 대한 보답으로서 이 땅에서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 자유에 대한 김재준의 이러한 사고는 그로 하여금 가난과 물질을 초월한 청빈의 삶, 불의에 맞서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는 삶,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삶, 두려움 없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등의 삶을 살게 했다. 또한 그의 자유에 대한 사고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자유가 ‘보수 신앙인’들이 주장하는 내적인 것뿐만 아니라 외적인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반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계몽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인간이 외적 자유에 대한 강조는 정치적·경제적 억압에 항거하는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기반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유관은 인간의 내적 자유보다 외적 자유를 훨씬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균형을 잃고 있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그의 사고가 당시 사회의 필요성에 너무 의존하고 형성되고 제시되었다는 데 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교육

김재준의 신학교육에 대한 입장은 한국의 신학교육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시작한다.88) 그에 의하면, 한국 개신교 초기 반세기가 넘게 신학교육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왔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는 이들이 수입, 소개하는 신학이 기독교의 유일한 신학이요 사상인 줄 알면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전수하는 데 충실햇다. 선교사들이 가르친 신학이란 소위 근본주의 신학 혹은 정통주의 신학이라는 철저하게 교파적인 내용이어서 자기 교파 이외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전수방법은 주입식이어서 비판이나 사유의 자유, 인격적 결단 없이 진행되었다.

88) 그의 신학교육에 대한 입장은 김재준, 「신학사상과 신학교육」, 『기독교사상』(1965/4)을 참조하라.

김재준은 이와 같은 내용의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이르는 교회나 사회의 봉사자가 되지 못하고 교권자로서 교회르 지배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교회는 그들의 직장으로 변해버렸고, 교회 기관들은 그들의 교권 각축장이 되어 버렸으며, 교파의 분열이 조장되었다고 지적했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의 문제는 선교사들의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일방적이고 고정주의적인 교육이 빚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김재준은 선교사들이 도입한 경직된 신학교육을 극복하기 위하여 탈식민주의 시대(Post- Colonial Era)에 맞는 새로운 방식의 신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신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신학교육의 목표는 그리스도상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원숙한 인간 조성에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상이란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분의 뜻에만 순종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으 섬기는 종의 모습이다. 즉, 하나님과 세상과 교회를 끝까지 섬기는 ‘수난의 종’이 바로 신학교육이 목표는 조직 교회 안에서 직장을 확보하기 위한 직업학교로서의 ‘미니스트리(ministry)’ 훈련과는 다른 것이며, 더욱이 어떤 특권적인 성직자 계급을 만들어내는 교육과도 다른 것이다. 따라서 신학교육은 소수의 성직자 양성에 국한시키지 말고 교회 전체를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하여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위탁받은 사명인 ‘그리스도의 미니스트리(ministry)’, 즉 “성자안에 있는 성부가 성령을 통하여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ministry”를 수행할 수 있다.

김재준은 이러한 미니스트리를 위한 신학교육에 있어서 학문적인 성실성(integrity)과 우수성(excellence)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신학교육은 그리스도의 미니스트리를 위한 질 높은 교육을 위하여 학문적인 우수성도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세계 교회의 신학에 동정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는 에큐메니칼적인 신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고와 결단을 통하여 결론지어지는 우리의 신학이 계발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세계 신학을 자유롭게 호흡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상황에 맞는 신학의 연구와 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재준이 제시한 신학교육은 교회를 향한 신학교육에서 세상을 향한 신학교육으로 그 방향이 옮겨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상을 향하여 나팔이나 부는 목회자를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들어가 그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들을 섬기며 종 노릇하는 봉사자의 양성이 신학교육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한 교회를 담임할 교직자 산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평신도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훈련하여 동원하는 것에도 신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신학교육이 이루어질 때 탈식민주의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국가재건(Nation Building)에 이바지할 수 있으며, 기독교를 우리 문화 속에 토착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김재준의 신학교육관은 8.15해방과 6.25전쟁, 4.19학생의거, 5.16군사쿠데타 등을 경험한 한민족의 국가재건에 신학교육이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가 라는 관점에서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교육에 대한 입장은 그가 제시한 ‘교회의 사회화’를 위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신학교육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위탁받은 세상에서 사랑의 봉사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낼 수 있게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그의 신학교육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교파를 초월한 신학교육, 학문적 우수성을 유지하는 신학교육, 세계 신학의 호흡과 한국적 신학의 계발 등도 되새겨야 할 내용이다.

김재준의 신학교육관이 한국 신학교육계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들 중에 교권주의자들의 출현의 원인을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신학교육에로 돌리는 것이나 신학교육이 교회 공동체 자체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관심의 부족 등은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근본주의 신학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교권주의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이나 교회 공동체의 온전한 자립과 안정이 없이는 교회의 사회화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주장들을 재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