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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9]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 마지막 불꽃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7:08
조회
929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199-205쪽.


[9]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 마지막 불꽃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 한국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전두환이 그해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으며, 1980년 5월 16일에는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났다가 처절하게 막을 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의 민주화 세력은 김재준이 귀국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1979년에는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세 사람이 연서로 귀국을 요청했다. “고난 받는 후배들이 목사님이 옆에 계시기를 원합니다”라는 호소도 들려왔다. 그러나 그의 귀국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맡아온 해외에서의 활동도 중요했으며, 섣불리 귀국했다가는 독재정권에 항복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주변에서는 귀국하는 것보다 지금처럼 해외활동을 하는 것이 아직은 더 유익하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김재준은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캐나다에서 계속 지낸다는 것은 “너무 편한 팔자인 것 같아서 하느님께 죄송해”지기 때문에 귀국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68) 여기에는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후배들과 동지들의 고난에 직접 동참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배어 있었다. 다른 한편 그가 귀국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10년 동안 떠나 있었던 조국에 대한 그리움도 작용했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 한 뒤 고국의 산천을 두루 여행하기도 했다.

68) 김상근, 「인격으로 인격을 배웠다」, 『장공이야기』, 265쪽

그는 1983년 9월에 귀국했다. 1983년은 자신의 신학적 문제와 조선신학교로 인하여 생겨난 기장 총회가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했다. 수유리 집에 머물면서 고국의 산천을 여행하기도 하고, 지병인 당뇨병과 간 경화증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후에는 집 근처의 산책길을 즐기기도 했다.

귀국 후 따뜻한 봄날 부인 장분여 여사와 함께.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한국의 자연을 찾아 국토를 순례하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강연과 설교를 계속했다.

또한 시국문제로 재야 원로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국가의 장래와 민주화를 위하여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특히 1987년 1월에 대학생이던 박종철 군이 고문을 살해당하자 ‘고 박종철 국민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이 해 1월 19일에는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설교나 강연을 부탁받으면 사양하지 않고 원고를 준비하여 행했다. 삶의 마지막 순가에는 한양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제자들과 지인들의 문병도 받았지만, 그의 자세나 언어는 흐트러지지 않고 분명했다. 1987년 1월 27일 오후 8시 51분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민주화 운동으로 인하여 청주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김재준의 제자 문익환 목사는 그를 추모하면서 「큰 스승이시여 장공 김재준 목사님 영전에」라는 시를 썼다.69)

69)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편, 『장공이야기』, 388-398쪽

스승이시여 큰 스승이시여 하늘 같은 땅 같은 스승이시여
당신이 가실 날이 이렇게 오고야 말았군요.
구만리 장공 훨훨 나는 마음으로
이 강산 굽이굽이 안 가는데 없이 불어예는 슬픈 바람으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

아마 1975년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자리를 비우신 이 나라는
마치 기수를 잃은 군대처럼 갈팡질팡이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돌아오시라고 띄운 이 못난 제자의 편지에 당신의 회답은 불호령이었습니다.
“너희 젊은 것들은 뭐냐?
다 늙은 내가 나가야 한다면
싸움은 이미 진 싸움이 아니냐??

스승이시여 만년 청정하게 우리와 함께 서 계실 스승이시여
낙락장송은 정몽주의 것만은 아닙니다.
당신도 낭랑장송입니다
1987년 이 준열한 역사의 절벽에 온몸으로 버티고 서서 역사를 증언하는 낙락장송이십니다. 정몽주가 옛 질서를 지키려다가 죽어간
고풍창연한 솔이라면
스승이시여 당신은 불어오는 바람과 맞서서
내일의 꿈을 휘날리는 낙락장송이십니다. ……

아 – 당신은 저 두꺼운 역사의 벽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어렵잖이 무너뜨리시고
백지장 세 번 어렵잖이 무너뜨리시고 백지장 뒤집듯 역사의 새장을 여셨습니다. ……
갓 풀려난 죄수들의 울분이 가슴에 살아 있고
갓 면천한 천민들의 뚝심만 있다면
당신이 지난 날 해낸 일
우리도 내일 또 모레 해보일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고마운 스승이시여
길이 우리와 함께 계시소서.

영정.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하면서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서
예언자적 양심으로 살다간 김재준은
87세의 일기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1월 31일 장례를 끝마치고 유품을 정리하던 박형규 목사는 거실에서 자그마한 액자에 붓으로 적은 ‘나의 좌우명’을 발견했다. 김재준은 젊은 시절부터 이러한 삶의 원칙을 정하여 지키려고 노력했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는 내용이기도 했다.

나의 좌우명 : 바로 살려는 노력 ①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② 대인 관계에서 의리(義理)와 약속(約束)을 지킨다.
③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④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⑤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⑥ 평생 학도(學徒)로서 지낸다.
⑦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中斷)하지 않는다.
⑧ 사건 처리에는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⑨ 산하(山河)와 모든 생명(生命)을 존중(尊重)하여 다룬다.
⑩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김재준은 오늘날도 찬송가를 통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가깝게 다가가 있다. 찬송가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의 1, 2절은 그가 지은 것이며, 3절은 그의 제자인 문익환 목사가 지은 것이다.70)

70) 이 찬송시에는 종교적 언어가 사용되지 않았지만, 수직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수평적인 인간사랑, 민족 사랑등이 잘 나타나 있다. (문성호, 「장공 김재준의 찬송시에 대한 신학적 이해」, 『장공사상 연구논문집』 2, 506-523 참조).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어 질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 탑 놓아간다.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맑은 샘 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을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어두움의 역사가 깊어가는 이 땅에 기독교가 하늘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고 호소했던 김재준의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