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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7] 전쟁의 와중에서 : 장로교의 분열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5:57
조회
1047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152-156쪽.


[7] 전쟁의 와중에서 : 장로교의 분열

신학교육의 보람이나 즐거움과는 반대로, 김재준의 신학적 입장과 한신대학에 대한 공격은 거세어졌다. 6ㆍ25 전쟁으로 인하여 휴회중이던 장로교 총회는 1951년 5월 24일 부산에서 속개되었다. 1950년 4월 21일 6ㆍ25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 열린 총회가 경남지방을 무대로 교회 재건을 추진하던 소위 ‘고려신학교파’(약칭 고신파) 문제와 서울의 조선신학교 문제로 경찰의 간섭을 받으며 난동 속에서 중단되었다가 이제 다시 속개된 것이다. 해방을 맞이하여 나라의 재건을 위해 힘을 합쳐 일해도 모자라는 총회가 폐회 선언도 제대로 못하고 산회하다가 전쟁중에 다시 모인 것이다. 이 총회에서 고려파는 정식으로 정죄당하고 쫓겨났다. 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감옥에 갔었던 성도들을 중심으로 ‘경남법통노회’를 조직하고 기성 교회를 배교자로 낙인찍었다. 이로써 일제 때 신사참배에 참여했느냐 저항했느냐를 놓고 일어난 싸움은 끝이 났다.

조선신학교 문제도 간단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남한 총회에서는 김재준의 신학노선을 지지했던 총대들의 숫자가 더 많았었다. 그리하여 조선신학교는 남한 총회인 남부 대회의 인준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작전 구역이나 여행 금지구역에 있던 총대들은 자유롭게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선교사들은 미군 군목의 역할을 하면서 자기네들의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차로 실어 날랐으며, 선교사들 자신도 상당수가 총회원이 되어 투표에 참여했다. 투표는 항상 다섯 표 차로 판가름 났다. 총회장, 부총회장, 서기, 부서기, 회계, 부회계, 회록서기 등등이 모두 다섯표 차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총회 마지막에는 한국신학대학의 총회 인허 취소, 김재준 목사 파면, 한국신학대학 졸업생의 교회 위임 거부, 이미 위임된 한신 출신 목사들에 대한 노회의 재심사 등등이 재안되고,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이 문제는 임원회에 맡기고 산회했다.

1952년 4월 대구 서문교회에서 모인 제37회 장로교 총회는 지난 해 부산 총회에서 임원회에 위임했던 안건을 그대로 상정하여 투표를 통해 결의했다. 그것은 김재준과 조선신학교의 문제를 극단적인 방식인 제명과 취소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김재준은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러면 이제 총회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셈이다. 한국신학대학은 죽었다. 가인에게 죽은 아벨과 같이 그는 형님에게 맞아 죽었다. 하회(下回)는 하나님이 심판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변호가 없었다면 승리는 영원히 가인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시다. 한국신학대학은 다시 살 것이다. 복음의 자유,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한국 교회의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허물어진 한국 산천의 재건을 위하여 그리고 전세계 크리스챤의 친교를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한국신학대학은 무덤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

총회의 결의가 세계 교회의 시각에서 볼 때에 부당하다는 것은 금방 밝혀졌다. 미국 남ㆍ북 장로교 선교사들이 절대 다수로 구성된 한국 선교사 협의회에서는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이자 김재준과 가깝게 지내던 스코트 박사를 성경문자 무오설을 부인한다는 이유로 징계 처분에 붙였다. 이에 대해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는 격분했다.

“스코트 박사는 캐나다 연합교회 정회원이므로 심사하든 징계하든 우리가 할 것이오. 선교사 협의회는 일종의 친선 그룹인데 어떻게 그런 행정적인 월권행위를 할 수 있소?”

결국 스코트 박사에 대한 협의회의 징계는 사과 비슷한 어색한 답변으로 넘겼다. 그리고 캐나다 연합교회는 스코트뿐만 아니라 김재준과 한국신학대학도 지지했다. 그들은 제37회 장로교 총회의 결정이 이단에 대한 정죄가 아니라 종교와 신앙의 탄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총회의 결정으로 조선신학교 출신 목사들의 수난과 교회 분쟁이 일어났다. 각 지방 노회에서는 총회 결의대로 조선신학교 출신 목사들을 재심사하면서 위임을 취소했다. 위임이 취소된 목사를 두고 교회는 두 편으로 갈라져 예배를 방해하는 등의 난장판이 벌어졌다. 어느 노회에서는 김재준과 절교(絶交)한다는 문서를 공개적으로 밝힐 경우 목사 위임이 허락된다면서 이를 강요하기도 했다. 이를 거부할 경우 설교권이 박탈되기도 했다. 김재준은 자신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조선신학교로 인한 교회의 분란과 제자들의 수난을 보면서 괴로워했다.

한국 장로교 총회는 김재준의 목사직 파면을 본인에게 통고할 것을 경기노회에 지시했다. 장로교회 법에 의하면 목사 안수와 파면의 권한은 노회에 있기 때문이었다. 노회장 전필순은 총회에 항의했다. “김재준은 우리 노회원인데 우리 노회에 문의도 없이 총회에서 직접 처단한 그 자체가 불법이다”고 반발했다. 그는 “우리 노회원을 총회에서 죽여 놓고 우리더러 송장 치우란 말이냐? 조사하든 처벌하든 그것은 우리 노회가 할 일이다. 총회에서는 우리가 총회에 제소하지 않는 한 재판할 권한이 없다”고 하면서 그 지시서한을 돌려보냈다. 총회의 결의가 장로교 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그 뒤 경기노회는 김재준 심사보고서를 통해 “김재준은 처벌 대상이 될 수 없다. 그의 신조는 장로교 신조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1953년 4월 대구 서문교회에서 모인 총회는 경기노회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목사 김재준은 제36회 총회 결의에 위반하였다. 즉, 성경유오설을 주장하였으므로 권징조례 제6장 42조에 의하여 예수의 이름과 그 직권으로 목사직을 파면하고 그 직분 행함을 금하노라”고 선포했다. 미국 장로교 총회에서는 근본주의자들이 제명되었지만, 한국 장로교 총회에서는 근본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고 그 반대자의 제명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