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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김재준 - [7] 전쟁의 와중에서 : 전쟁 속에서도 계속된 교육 / 천사무엘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30 15:51
조회
921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서울:(주)살림출판사, 2003, 148-152쪽.


[7] 전쟁의 와중에서 : 전쟁 속에서도 계속된 교육

6ㆍ25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유엔을 통하여 참전하 세계 젊은이들의 희망과 미래를 절망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기도 했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조국의 재건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한반도는 열강의 군사력과 이념, 사상 등이 뒤엉켜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땅이 되고 만 것이다. 김재준은 이 전쟁이 시작될 무렵 동자동에서 살고 있었지만, 공산군들이 서울을 점령한 뒤,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집과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가족과 함께 추방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전에 살던 서울 근처 도농의 이춘우 집 문간방으로 피신하여 가족과 함께 지냈다. 이 무렵 그의 학형이자 동료 교수인 송창근은 공산군에 의해 강제 납북되어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9ㆍ28수복이 있은 후 폐허로 변한 경동교회에서 20여 명이 주일 예배를 드렸다. 교인 주에 죽은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침울했다. 목회기도 시간에 김재준은 설교대 위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전쟁중에 드리는 기도였다.

“아버지 하나님, 북에서 온 젊은이나 남쪽의 젊은이들이나 다 똑같이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나라를 사랑하는 길인 줄 알고 저들의 고귀한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긍휼히 보시사 저들을 용서하시고 그 영혼을 거두어 주십소서. 그리고 저들의 나라사랑의 소원을 들어 주십소서…….”51)

51) 조형균, 「큰 하늘, 큰 보자기 같은 민족의 스승」, 『장공이야기』, 167쪽.

1ㆍ4후퇴가 되자 가족과 함께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부산 피난살이는 어렵고 힘들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상황에서도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신 하나님의 손길을 김재준은 경험했다. 평양 숭실학교에 사표를 내고 나올 때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그는 이미 경험했었다. 그는 부산 피난지에서 옛 후배이자 상당한 재력가인 김의정을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다. 김재준은 서울 유학 시절 김의적의 중앙고보 편입시험을 대신 봐주어 2학년으로 들어가게 해준 적이 있었다. 김의정은 근황을 물으면서 전세 집을 얻어주고 여섯 달치 집세를 선불로 치러 주었다. 벽장 다락이 딸린 방 한 칸에 부엌도 없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다리 뻗고 잘 수는 있었다. 그 집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에는 청산학원 후배인 권남서 목사가 목사 사택에 살게 해주었다.

조선신학교의 부산 개강도 하나님의 손길로 이루어졌다. 어느 날 선교부 회계인 킹슬러 선교사가 만나자고 했다. 그는 프린스턴신학교에 있을 때 졸업반 학생으로 한국 선교사 후보였기에 매우 가깝게 지냈지만, 전투적 근본주의 신앙(ultra-fundamentalism)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프린스턴신학교 학생회에서 한국의 신학생들에게 보내는 구호금을 전달했는데, 이 돈이 조선신학교를 부산에서 개강하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1951년 9월 군산 동부교회에서 신학강좌 후 교우들과 함께.

김재준이 전쟁중에 피난지에서 신학교의 개강을 서두른 이유는 선생이자 목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들어 온 학생들이 전쟁의 와중에서 딴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신학교육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전쟁이 소강상태이고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다. 전쟁중에 학생들이 모두 정신 못 차리고 살기에 급급했지만 이제 여러 가지 죄를 범할 기회가 많아졌다. 이들이 다 목사가 될 사람인데 탈선한다면 큰일 아닌가? 이 학생들을 모두 거두어 모아 보호하고 가르쳐야 한다.”52)

52) 이춘우, 「나는 오늘도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고 산다」, 『장공이야기』, 80쪽.

드디어 1951년 3월 부산 항서교회당에서 개강을 하고, 그해 4월에는 ‘한국신학대학’으로 학교 이름을 변경했다. 수업은 시작되었지만, 학생들이 숙식할 곳이 없었다. 마침 권남선 목사가 자신의 사택 부근에 일본인들이 떠나간 뒤 적산으로 남아있던 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시청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 땅은 그동안 무허가로 동네 사람들이 인분을 붓고 채소를 심어 왔었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인분이 뿌려진 밭을 흙으로 덮어 땅을 고르고 미군 부대에서 얻어온 천막을 쳤다. 그 뒤 미군들의 지원으로 교사와 기숙사를 지을 수 있었다.

부산 피난 시절, 일본에 피신했다가 돌아온 캐나다 선교사 스코트와 프레이저는 피난 온 옛 친구들을 모아 놓고, 이제부터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요청할 사항이 무엇인지를 말해 달라고 했다. 그들이 김재준에게 꼬집어 물었을 때, 그는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 양성’이라고 대답하면서 캐나다 유학의 길을 넓게 열어줄 것을 요청했다. 전쟁의 와중에서 제일 필요한 것이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아니라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양성이라는 것이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김재준은 장학회를 통해 두 명을 천거할 수 있었는데, 이우정과 강원룡이었다. 덕분에 이들은 캐나다 선교부의 장학 기금으로 캐나다에서 2년 동안 공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