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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장공의 삶] 7장 : 개혁의 불을 들다(1960-1973) - 5ㆍ16 군사반란이 일어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8-13 09:12
조회
1491

[장공의 삶] 7장 : 개혁의 불을 들다(1960-1973)

5ㆍ16 군사반란이 일어나다

1960년 4ㆍ19 혁명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3ㆍ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민들은 ‘학생 만세’하며 지지해 주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군대가 출동했다. 4월 25일 ‘대학교수단’이 시위에 합류했다.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를 행진했다. 수유리 깊은 산속에 있던 김재준은 뒤늦게야 이 소식을 듣고 대학교수단 시위 행 렬에 동참했다. 그는 시청 앞 광장에 앉아서 연좌 데모하는 학생들이 들고 있는 ‘민주국가 건설하라’ ‘매판자본 물러가라’ 등의 플래카드를 보았다. 학생들이 시민에 비하여 얼마나 ‘선각자’인가를 마음속 깊이 느꼈다. 그리고 머리를 숙였다. 선각자 역할을 기성세대가 아닌 저 어린 학생들이 하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에서였다.

4ㆍ19 혁명이 지나고 얼마 후 김재준은 이때의 마음을 전교생과 함께 드리는 예배시간에 눈물을 흘리며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우리 기성인들을 용서해 달라. 너희들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를 용서해라. 앞으로 너희가 길거리에 나서지 않게 하마. 너희가 나서기 전에 우리가 나서겠다. 너희는 이제 공부해 달라.”213)

학생들이 주도한 4ㆍ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났다. 선거가 실시되고 국민은 무조건 민주당에 투표했다.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고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었다.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여사는 김재준과 각별한 사이 였다. 공덕귀 여사는 일본 고베 여자신학교를 졸업한 후, 김천교회에서 송창근 목사와 함께 전도사로 동역했고, 한신대 여자부 사감 겸 강사로 일했다. 송창근과 김재준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날 무렵 윤보선과 결혼한 것이다.

공덕귀 여사와의 깊은 인연과 함께 윤보선 대통령 또한 피난 시절 한신대를 도와준 것을 생각해서 김재준은 경무대로 축하 방문을 갔다. 처음에는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용기를 내어 경무대를 방문한 것이다. 윤보선 대통령이 현관 앞에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응접실에서 단둘이 대좌했다.214)

윤보선 대통은 한 시간 동안 내내 ‘장면’에 대한 불평만을 늘어놓았다. 장면이 국사도 못하면서 자신과 의논 한마디 없다는 것이다. 김재준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장면은 4ㆍ19 혁명 기질과는 맞지 않았다. 배짱이 약하고, 단행력이 느렸다. 그리고 지나치게 신중하고 독선적이었다. 그의 불편한 마음은 현실로 나타났다.215)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이 장면 내각의 무능력과 사회 혼란을 이유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장면은 4ㆍ19 혁명으로 세운 정권을 송두리째 반란군에 내주어야 했다. 김재준은 학생들의 피로 세운 정부를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내어준 장면에게 분노했다.

“8ㆍ15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진짜 공정 선거를 거쳐 민의를 대표한 정부는 장면 정권이 처음이었으니만큼, 그것은 ‘국민’의 정부요 장면 자신의 정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반란 군인들이 아무리 협박한다 하더라도 장면으로서는 자기 맘대로 그 정권을 송두리째 반란자에게 내줄 권한이 없는 것이었다. ‘역적 반도야 물러가라! 나는 3천만 국민으로부터 위임 맡은 나라의 주권을 역적에게 내어줄 수 없다!’라고 한번 호통하고 죽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자유 한국 ‘제단’에 관제물처럼 부어 쏟은 청년학생들의 피를 보더라도 장면은 책임을 다했다 할 수 없는 것이다.”216)

김재준은 장면의 ‘무책임’을 질타하면서 국민의 정부를 군사 쿠테타로 잡은 박정희에 대해서도 “역적 반도야 물러가라! 나라의 주권을 역적에게 내어줄 수 없다!”며 분노했다.217)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혁명공약 5개조를 발표했다. 김재준은 박정희가 내세운 혁명공약 5개조 안에 숨겨진 저의를 한눈에 꿰뚫어보았다. 특히 혁명공약 제6항 “이상에 열거한 우리의 과업을 성취 하는 때, 참신하고 양심적인 인사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군인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정권 이양에 관한 공약은 사실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무제한적 장기집권 선언’이었다. “결국 ‘혁명공약’ 자체가 ‘장기집권공약’이 됐다고 보겠다. 다만 그것이 달콤한 옷을 입고 ‘데뷰’한 것뿐이다.”218)

5ㆍ16 군사 쿠데타 이후 김재준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쿠데타의 주역들이 ‘한신’만이 아니라, 모든 대학의 만 60세 이상 된 총학장은 사퇴하라는 지시였다. 4ㆍ19 학생혁명의 힘을 지켜봤던 저들은 교육법이나 학교의 정관 등을 모두 무시한 채 한국의 대학들을 장악하고자 했다. 김재준 역시 9월 26일로 만 60세가 되어 강제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신학교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20여 년을 같이 하면서 참교육을 실천 하려 했던 김재준은 타의에 의해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만 60세, 김재준에게는 환갑이 되는 해였다. 위로 딸들은 모두 출가를 했지만, 아들 셋은 장가도 들지 못했고, 모두 학생이었다. 환갑잔치를 치를 만한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가족끼리 조촐히 치르려 했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삶으로 살아내고 있던 졸업생들이 서둘러서 환갑잔치를 준비했다. 모두 자진협력 하여 재정을 마련했다. 환갑잔치는 경동교회에서 열렸다. 사흘 동안 저녁 마다 “장공 선생 회갑 기념 신학 강연회”를 가졌다. 매일 두 사람씩 모두 여섯 사람의 강연이 진행됐다. 이들은 김재준의 제자들로서 한국 신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들이었다. 마지막 날은 회갑 예배를 드렸다. 예배 마지막에 김재준이 답사를 했다.

“한 사람의 교수로서, 또 한 사람의 목사로서 회갑을 맞는 느낌은 마치 ‘만리장성 밑에 서 있는 노인’과 같은 기분입니다. 일단의 젊은이들을 만리장성 담 밑에 불러모아 놓고 ‘너희들은 이 성벽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가야 한다. 만리장성 성벽 너머에는 광활한 들판과 세계가 있느니라’ 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곧 교수요, 목사입니다. 그는 그렇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친히 성벽 밑에 허리를 구부리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기의 등을 밟고 성벽을 넘어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나는 오늘 회갑을 맞이하여 두 개의 상반된 감상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는 ‘아아, 참 힘든 일생이었구나’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아아, 참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생이었다’는 것입니다. 비단 교수나 목사의 일생뿐이겠습니까? 부모가 된다는 것도, 선배가 된다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삶일 것입니다.”219)

한경직 목사도 이날 축하해 주러 왔다. 옛 친구, 새 친구, 이제 같이 늙어가는 졸업생들과 그들의 뒤를 이어 자라는 재학생들 모두 반가운 만남을 가졌다. 김재준은 이런 기회를 가지는 것도 일생에 한 번쯤은 있어도 무방한 연석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환갑잔치란 수연(壽宴)이라고도 해서 오래 산 것이 경사스럽다는 잔치일 것인데 이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할 나로서는 닿는 데가 없다고 생각되어서 늘 반대 해 왔었다. 그러나 이렇게 즐거운 재회의 날이 되고 보니, 미상불 환갑도 할 만하다고 느껴진다.”220)

둘째아들 경용은 자식으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푸념했다. 그래도 조카인 의사 하용이 환갑 때 입을 한복을 장만해 주어 그 옷을 입고 환갑잔치에 오는 손님들의 절을 받았다. 마음에 흡족한 환갑이었고, 일생에 다시없을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신대학교를 퇴직하고 난 뒤 김재준은 조용하게 수유리 집에서 지냈다. 그렇다고 한가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여기저기서 매 주일 설교를 부탁해 왔다. 그를 존경하는 제자들이나 지인들이 그의 생활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환갑잔치며 목사 위임식 등 교회 행사에 초청받아 나가는 일이 잦았다. 약혼식, 결혼식 주례도 자주 부탁받았다. 신문사나 잡지사 등에서 원고 청탁을 요청하기도 했다. 김재준의 지나온 삶을 잘 아는 지인들은 이때가 기회라 여겨 김재준을 데리고 명산이며 바다며 여기저기 여행을 함께했다.221)

1961년 7월 30일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구성됐다. 언론인들이 박정희 정권의 통제를 완화하기 위해서 하나로 뭉쳐 조직한 자치기관이었다. 여기서 ‘세계신문윤리강령’에 준한 ‘한국신문윤리실천요강’이 채택되었다. 언론계 자체 내에서의 문제건, 신문에 의한 명예 훼손 소송, 기타 중요한 사건들을 다루었다. 일종의 언론재판소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다룬 것은 두세 건에 불과했다.222)

이듬해 1962년 어느 날, 황혼이 짙어 어두컴컴할 무렵 《대한일보》 김연준 사장이 수유리 집으로 찾아왔다.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 모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신문사로서의 생명인 사설이 시사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며 구차한 코멘트나 하는 현실에 못마땅해했다. 사회 각 분야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도의(道義)의 사설”을 김재준이 맡아서 해주었으면 했다. 꼭 논설위원직을 수락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갔다.223) 김재준은 평소에 언론이 자유와 정의의 사도라 생각했다. 그가 제2회 신문의 날에 부탁을 받아 강연한 내용이다.

“나는 한국의 신문은 주어진 재료의 보도만이 아니다. 소위 ‘경세의 목탁’이어야 한다고 했다. 언론이 자유와 정의를 위한 횃불이나 목탁이 될 수 없다면 한국민족은 암흑 속에 비참할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기자’는 ‘예언자’ 구실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224)

김재준은 김연준 사장의 부탁을 받아들여 날마다 논설위원 회의에 꾸준하게 참여했다. 《대한일보》가 정부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10년 동안 계속 논설위원직을 책임졌다. 또한 종교계를 대표해서 ‘한국신문윤리위원회’위원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기자들이 ‘특종기사’를 쓰지 못하도록 심하게 탄압을 하던 때였다. 기자들은 걸핏하면 끌려가 두들겨 맞기도 하고, 정치깡패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각 정부 부서의 출입기자들은 그 부서에서 발표하는 기사 외에는 쓰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쓴 글은 CIA 검열관에 의해 지워지기도 했다. 경찰에서는 광고주들을 협박해서 광고를 싣지 못하게 했다. 광고는 신문사의 경영의 생명줄인데 광고를 막는다는 것은 곧 신문의 폐간을 의미했다.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 ‘재건국민운동’이란 것을 만들었다. 의장으로 이관구가 선정되었고, 부의장과 중앙위원 자리가 아직 선정되지 않았을 때였다. 신문계 원로인 홍종인이 ‘재건국민운동 발기총회’에 함께 가자고 졸랐다. 김재준은 마지못해 따라나섰다가 일방적으로 부의장직을 맡게 되었다. 취임사를 한마디했다.

“지금 정부로부터 국민에게라는 상의하달(上意下達)은 거의 기계적으로 되지만, 국민으로부터 정부에의 하의상달(下意上達)은 거의 단절됐다. 일방통행은 민주적일 수가 없다. 이런 마당에서 이 국민운동이 국민의 의사와 소원을 정부에 전달시키는 하의상달의 구실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조건에서 취임을 승낙한다. 그것이 안 되면 언제든지 물러난다.”225)

그 후 모임이 잦았고 시국 강연도 했다. 국민의 소리를 정부에 전달해야 한다며 중앙위원들이 총동원하여 각 지방을 순회했다. 순회한 위원들의 보고를 정리하여 박정희에게 전달했다. 얼마 후 사무국장이 현역 장교로 교체되었다. 민의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박정희의 대답이었다. 새로 온 사무국장은 재건국민운동을 군대식으로 바꾸어 운영했다. 김재준은 더 이상 이 운동에 나가지 않았다.226)

이 무렵 김재준은 『성서해설』을 지문각에서 출판했다. 출판사 사장은 그동안 기독교 서적들이 전도용 일색이라 일반 시민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일반 대중을 위한 성서해설을 냈으면 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불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뜻과 성실함이 김재준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 달 안에 탈고하기로 하고 막내아들 관용의 손을 빌렸다. 관용은 지도 그리기와 연대표를 만들었다. 일종의 번역물인 이 책은 몇 달 안에 다 팔렸다. 지문각의 도산으로 재판을 하지 못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227)

1963년 8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교회협의회의 ‘교회와 사회’ 세계 대회에 백낙준 박사와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강원용 목사는 직권 상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제네바로 가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에 WCC내에 인도측 간부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입김이 셌다. 그들은 인도에서 제네바까지 가는 길에 반드시 인도항공을 타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제네바행 비행기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열흘 가까이 봄베이에 머물러 있다가 제네바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는 미국을 성토하는 자리였다.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젊은 대표들은 핏대를 세우며 미국을 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던 때였다. 회의 가 끝날 무렵에는 미국이 북폭을 개시했다. 그것 때문에 반미감정이 들끓었다. 제네바 회의의 모든 비용을 미국이 담당하면서도 ‘돈 내고 욕먹는’ 셈이었다. 그래도 미국 교회의 대표들은 한마디 변명이나 답변이 없었다. 미국을 두둔한 나라는 한국 대표뿐이었다. 김재준은 회의가 끝나고 혼자서 런던과 파리를 여행하고 내친김에 일본에 들러 여독을 풀고 귀국했다.228)

1965년 1월 정부는 한국군 2,000명을 월남전쟁에 파병했다. 월남 파병은 6ㆍ25 전쟁 때 월남 의용군이 한국을 위해 싸웠고, 그에 대한 보답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미국의 요청 때문이었다. 미국은 월남전쟁에서 자국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한국군을 끌어들였다. 아무런 명분이 없는 전쟁터에 박정희는 우리 젊은이들을 내보낸 것이다.229)

[각주]

[213] 김상근, 「인격으로 인격을 배웠다」, 『김재준 이야기』,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편,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352-353.
[214]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74.
[215] 위의 책, 174.
[216] “장면 정권의 終焉”, 『전집』 제14권, 22-23.
[217]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75.
[218] “혁명공약 5개조”, 『전집』 제14권, 31.
[219] 김호식, “너희들에게 득이 된다면 나를 이용해도 좋다”, 『장공이야기』, 322.
[220] “환갑이자 퇴임한 ‘한신’ 학장직”, 『전집』 제14권, 32-33.
[221]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79.
[222] 위의 책, 180.
[223]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79.
[224] “신문의 날”, 『전집』 제14권, 47.
[225] “재건국민운동”, 『전집』 제14권, 50.
[226] 천사무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81.
[227] 위의 책, 182.
[228] 위의 책, 182.
[229] 위의 책,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