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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장공의 삶] 6장 : 교육의 꿈을 펴다(1939-1959) - 한국기독교장로회가 탄생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9 09:20
조회
1743

[장공의 삶] 6장 : 교육의 꿈을 펴다(1939-1959)

한국기독교장로회가 탄생하다

1945년 드디어 해방이 왔다. 그러나 해방이 오기까지 상처가 너무나 컸다. 해방과 함께 ‘졸업생 순교자 1호’인 김은도가 죽었다. 김은도는 조선신학원 출신으로 당시 3학년 학생이었다. 김은도가 왜 잡혀가서 죽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분명치 않았다. 징용을 비난했다는 이유, 쌀 공출을 반대했다는 이유를 일제는 갖다붙였다. 결국 갖은 고문과 추위, 배고픔으로 인해 죽었다. 박학수 학생 또한 조선신학원 출신으로 ‘순국’하였다. 박학수는 일제가 물러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그 후 공백 기간이 없도록 하기 위해 대체인물의 명단을 준비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일제는 박학수를 체포했고 죽기 직전까지 고문한 뒤 석방하였다. 김재준은 박학수를 ‘순국열사(殉國烈士)’라고 했다. 해방의 기쁨이 오기까지 많은 아픔이 있었다.162)

아픔을 이기고 민족의 해방과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해방과 신앙의 자유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김재준에게는 새로운 숙제가 생겨났다. 한국 장로교의 재건이라는 숙제였다. 김재준의 가슴과 머리는 조국의 건설과 한국 교회의 재건이라는 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국 교회 재건을 위해서 먼저 조선신학원을 재건하기로 하였다. 재건에 참여한 사람은 소위 프린스턴 3인방이라고 불리운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이었다. 송창근은 목회 신학, 김재준은 구약을, 한경직은 신약을 가르치기로 했다. 그들은 동자동에 있는 일본 천리교 본부와 지금의 영락교회가 있는 천리교 경성 제1교회 등을 임대해서 동자동에는 남자 신학교, 영락교회 자리에는 여자 신학교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이사장인 함태영 목사가 이사회를 소집하고 이를 승인했는데, 한경직은 여자 신학교로 쓰기로 했던 부지에 신의주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모아 교회당을 지었다.163) 이사장인 함태영 목사가 방문하여 교회 건축 중지를 요구했지만 묵살되었다. 한경직은 피난민들을 모아서 그들을 중심으로 한 ‘베다니교회(영락교회)’를 세웠다. 김재준은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은 의식적으로 나를 속인 것일까? 제직들의 압력에 못이겨서일까? 송창근은 한경직과 절교한다고 흥분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정도의 이해관계로 옛 친구를 끊어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프린스턴에서의 첫 친교로 그를 대한다. 그러나 그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지금도 내게 수수께끼로 남는다.”164)

김재준은 한경직에 대한 실망도 컸겠지만 조선신학교의 재건을 위해 더욱 열심히 일했다. 재건된 조선신학교는 비교적 순탄하게 운영되었다. 교수진도 훌륭했고 학생 수도 많았다. 많은 학생들이 김재준의 수업을 들었다. 이들 중에는 근본주의 신학을 옹호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진보적인 신학을 옹호하는 학생들도 섞여 있었다. 김재준은 조선신학원 재건뿐만 아니라 교회 개척에도 열을 올렸다. 1945년 12월 첫 주일, 송창근은 동자동 천리교 본부 회당에서 선교와 목회를 교회의 핵심 사안으로 한 ‘바울교회(서울성남교회)’를 세웠다. 김재준은 장충동 1가에서 지성인들과 학생들을 위한 특수교회를 세웠다. ‘야고보교회(경동교회)’였다. 야고보교회 라는 이름에는 김재준의 목회철학이 묻어난다.

“김재준은 지성인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한다. 그 설교는 설교라기보다는 강연이었다. 지성인은 비판적이다. 자기 이성에 납득이 가지 않는 한,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을 ‘생활’을 본다.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는 예수의 말씀을 그들은 옳게 여긴다. 신약성경 가운데서 이 점을 가장 강조한 것이 야고보였다. 생활로 나타내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말하자면 ‘신앙생활’이 아니라 ‘생활신앙’이다. 이런 것은 처음부터 김재준 자신의 주장이었기에 교회 이름도 ‘야고보교회’로 된 것이었다.”165)

그러나 이 야고보교회는 노회에 가입할 때 소재지의 이름에 따라 교회명을 바꿔야 한다는 규칙 때문에 ‘경동교회’로 개명하게 된다. 경동은 서울의 동쪽에 있다는 뜻이었다. 송창근이 세운 바울교회는 성남에 있다고 해서 성남교회, 베다니교회는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의 마음에 보금자리를 주었다고 해서 영락교회로 개명하게 된다.

김재준은 자신이 세운 야고보 교회의 강단을 지키기 위해 주일 아침, 저녁, 그리고 수요일 밤에 가족들을 데리고 동자동 사택에서 교회가 있는 장충동까지 걸으며 오갔다. 김재준의 설교는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한다거나 웅변가처럼 목청을 높여서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은진중학교에서 붙었던 ‘천지’라는 별명처럼 김재준은 원고와 청중을 번갈아 보며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 설교의 내용만큼은 철저했다. 원고는 언제나 논리적인 전개, 차분한 음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깨우치는 힘이 있었다. 언제나 지성에 목말라 있던 지성인들, 젊은이들은 김재준의 ‘천지’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왔다.

경동교회는 북한이나 만주 등지에서 자유를 찾아 서울로 온 젊은이들에게 숙식문제를 해결해 주었고, 이들은 김재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김재준의 제자 강원용은 ‘선린형제단’을 직접 만들어 북간도 용정 지역에서 온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주일학교를 처음 시작했다. 또한 김재준의 지도 아래 종교부 활동을 크게 발전시키기도 했다. 성탄절, 부활절 연극에 주연을 맡으며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166) 아래는 ‘선린형제단’의 행동강령이다.

우리는 자연과 역사에 공히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까닭에 우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포하며 심령의 중생을 제래 함으로써 새 건설의 기초로 세운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적 건설에 가장 긴중한 것은 민도의 향상에 있으므로 우리는 교육과 계몽 운동을 급속도로 전개시킨다.
대중의 경제생활 안정 문화의 향상과 건설을 위하여 기독애를 동기로 한 온갖 사회사업을 영위한다.
의식주, 기타 실생활 각 부분의 가장 과학적인 개량과 건설을 위하여 부단히 연구, 지도, 실천하기로 한다.
이 모든 것은 시종여일 자발적인 봉사에 의하여 그 실현을 가할 것이요, 폭력, 기타 여하한 수단으로든지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절대 용허하지 않는다.167)

선린형제단은 이러한 행동강령을 만들고 준수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생활규범을 제정했다.

첫째, 신자의 일원으로 주의 교회에 충성한다. 둘째, 순결, 신의, 복종, 무사로 단체 생활을 공고히 한다.
셋째, 사업을 위하여 소유의 최대한을 주의 제단에 봉헌한다.168)

선린형제단의 뿌리는 1935년 전후 북간도 용정 지역을 무대로 하는 젊은 기독 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한다. 강원용, 김영규, 전은진, 김명규, 원주희, 신영희, 남병헌, 최동엽 등을 중심으로 했다. 해방 직후에는 조향록, 노명식, 신양섭, 탁연택, 차봉덕 등 순수한 젊은 신앙인들이 모여 복음 전도, 신앙 훈련, 교육과 사회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굳건한 믿음의 공동체를 가꾼 것이다.169) 선린형제단이 주관한 작은 집회에서 김재준은 “기독교의 건국이념”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였다.

“기독교인의 최고 사상은 하나님 나라가 인간 사회에 여실히 건설되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초세간적, 내세적인 소위 천당이라는 말로써 그 전부를 의미한 것인 줄 알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 생활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의 전 부문을 지배하는 때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며, 이것이 전 사회에 삼투(滲透)되며 사선을 넘어 미래 세계에까지 상생발전하여 우주적 대극의 대낙원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전모(全貌)일 것이다.”170)

김재준과 선린형제단, 경동교회는 한국 진보적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 김재준에게 맡겨진 두 번째 과업은 신학교육의 갱신이었다. 선교사 신학의 무조건적 수용은 한국 교회가 근본주의적 신학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김재준은 이에 맞서 한국 교회의 보수성과 근본주의적 신학을 신학적 진보성과 자유로운 비판정신을 가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데 노력했다. 이것은 교권주의와 맞서는 것이었고, 주류 교역자들의 독단성에 대항하는 것이었다.171)

당시 교회 재건의 세력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는 북한 교회였다. 북한 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옥중생활을 했던 출옥 성도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발표하고, 교회 재건의 주체로 나섰다.172) 그러나 북한의 사회주의 정책에 막혀 좌절되고 말았다.173) 두 번째는 남한 교회였다. 남한 교회에는 일제 말에 신사참배를 반대한 뚜렷한 세력이 없었다. 따라서 교회 재건의 주체의 중심으로 1945년 8월 1일에 조직된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의 주요 인사들이 있었다. 교회 재건을 향한 남한 세력은 남부 총회를 개최 하고 조선신학교를 남한의 유일한 장로교 직영 신학교로 결의했다. 이것은 당시 가장 시급히 요청되었던 교회 재건을 위한 교역자 양성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앞으로 있을 통일을 대비한 남한만의 총회라는 부분 역시 모두가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양선이 이야기하듯, 재건을 위한 남한만의 세력은 일시적이었다.174) 왜냐하면 북한에서 장로교회 재건에 주체가 되었던 출옥 성도들과 많은 기독교인들은 소련 군정의 감시와 공산당의 탄압과 박해를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남한 사회로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교회 재건 세력이 남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에 두 세력이 함께 공존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신탁통치의 결과로 남한으로 미국 선교사들의 재입국이 허용되었다. 이들의 남한 합류로 인해 한국 교회 재건의 주체 문제는 쉽사리 해결될 듯 보이지 않았다. 남한으로 내려온 대부분의 평양신학교 목회자들은 보수주의적 근본주의 신학으로 중무장되어 있었다. 이들은 신학의 차이로 인해 1948년 총회신학교를 세우고 신학교육을 재개했다. 이것은 남부 총회 때 직영 신학교로 인정받은 조선신학교의 정통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즉 해방 이후 분단된 조국과 교회라는 시대적 배경 가운데서 진보와 보수가 맞부딪치게 된 상황이 벌어진 것이 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국 교회의 ‘주체적’ 재건이라는 과제가 김재준에게 시대적 소명으로 놓여졌다.

김재준에게 한국 교회의 주체적 재건이라는 숙제는 신학교육기관, 즉 신학교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보수주의적 근본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의 교권과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신학교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신학교가 당시 교회의 지도력을 양성하는 교권 세력 구성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1901년 선교사들은 평양에 장로교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한국 교회의 교역자 양성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38년 9월 30일 신사참배 반대 문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 이때 공교롭게도 1930년대부터 있어온 서울 중심의 신학교 건립 운동의 일환으로 1939년 3월 27일 조선신학교 기성회가 조직되고 개교를 추진했다. 이것을 평양신학교 지지론자들은 결코 묵과할 수 없었다.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직영 청원을 물리치고 1939년 가을 평양신학교 재개교를 허락받아 11월 평양 동덕학교에서 교육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안에 이와 같이 두 신학교육 전통이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은 남부 총회에서 조선신학교가 직영 신학교로 결 의된 시점부터이다. 당시는 해방은 됐지만 미・소에 의해서 분단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주도 세력인 서부 교권 세력 양성지로서의 평양신학교는 더 이상 조선신학교 직영 체제하에서 그 독점적 지위와 교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175)

한국 교회 재건 주체성을 누가 가지느냐라는 쟁점은 보수주의자들이 김재준을 ‘신신학자’, ‘자유주의자’로 맹비난하는 방법으로 이끌었다. 김재준의 신학을 대변하는 조선신학교를 교권주의자들은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이들의 목표는 남한 교회를 재건시키는 것이었고, 그 재건의 중심적 신학은 선교사 신학이 이식된 ‘평양신학교’를 재건하는 것이었다.176) 보수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은 김재준과 조선신학교의 재건을 막기 위해 김재준의 신학과 신앙을 검증한다고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선정한 심사위원들 앞에서 김재준은 말로써 또 글로써 자신의 소신을 밝혀야만 하였다. 이 부분을 김경재는 ‘현대판 종교재판’이었다고 비판한다. 또한 종교 개혁 당시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권에 소환당해 갖은 협박과 회유, 신앙 양심과 신학 지성을 포기하라고 강요받은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177)

이러한 구체적인 사건의 시작은 1947년 4월 18일 평양신학교로부터 조선신학교로 편입해 온 51명의 학생들이 제33회 총회 때 진정서를 제출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51명은 평양에서 배웠던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을 고수한다는 충성심으로 김재준의 성서 해석의 고등비평에 대한 교수법을 반대하며 진정서를 작성했다. 이 진정서를 직접 총회에 제출 했다.178)

진 정 서 김재준 교수는 웨스트민스터 신조 제1조를 범하고 있다.
조선신학교(김재준)가 문서설을 주장하고 성서에 오류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성서의 권위를 파괴한다.
성서의 고등비판 연구를 사용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척해야 한다.
정통주의 신학자들로서 교수진을 강화하고 장로교 전통에 입각한 신학 교육의 완수를 위해서 중앙에 완전한 장로교 정통 신학교를 세워줄 것.

이 진정서를 토대로 총회는 조선신학교 교수회와 이사회의 의견을 묻지도 않은 채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조선신학교에 파견했다.179) 김재준은 진정서에 대한 답변을 ‘성경관’, ‘교리문제’로 분명하게 제출했다. 또한 ‘편지에 대신하여’라는 글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밝혔다.180)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고전 10:7~11:21)를 생각하면 서 쓴 글이다.

“저가 믿음의 증거를 가졌느냐? 나도 그러하다. 주께서 의롭다 하시나니 누가 나를 송사하랴 하는 마음의 기쁨에 몰려 손에 쥐어진 하늘의 약속만을 가지고 바다로 육지로 50평생을 표랑하였으되 내가 부족함이 없도다. 저가 정통을 자랑하는가? 나도 그러하다. 그는 관념으로서의 정통을 안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자신의 심정에 부딪혀 들어가는 전 인격적 결론을 가지고 있다. 저가 칼빈 신학을 수호하는가? 나도 그러하다. 나는 칼빈이 주창하였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 여러 신학자의 순수한 학적 양심을 두드리다가 결국 칼빈의 문하에서 내 신앙의 지적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동기도 사실은 우리끼리의 변론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알면서 아웅하는 저들에 대한 우리 교회의 정당한 인식을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듣는 바에 의하면 선교사가 방금 다수 입국중이라 합니다. 조선 교회가 세계 장로교회 성도의 교제에서 끊어지지 않기를 빕니다.”181)

김재준은 신구약성서의 무오설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수행하신 역사적 계시’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하며 계시적 권위를 갖는 것이지,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를 절대불변의 신탁적 문서로 받아들이는 것은 도리어 성경의 신적 계시의 권위와 절대성을 훼손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근본주의 신학의 지도자였던 박형룡은 김재준의 진술서를 보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김재준의 ‘성경관’은 파괴적 고등비판의 성서관이며, ‘교리문제’ 역시 신신학의 교리관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박형룡의 신학적 근거는 근본주의 신학으로서 이 근본주의 신학은 성서의 절대성과 무오성을 강조하여 기록된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계화하여 교리를 형성한다. 그러나 성서 자체에 있는 내적 모순을 자유롭게 비판하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교리만을 강조하는 한계를 가졌다.182) 이러한 신학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을 통해 유입되었고 당시에도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며 성서를 액면 그대로 문자적 사실로 취급하는 근본주의 신학이 주류 한국의 신학이었다는 점이다.183) 하지만 김재준은 근본주의 신학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도 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지고 쓰여진 계시의 문자를 다시 읽고 당하는 온갖 사위를 재비판, 재인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되고 현재를 영도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크리스찬은 언제나 진보주의요 자유주의다. 그러나 쓰여지기 전 그리스도의 본심정, 성령의 본의에 소급하는 의미에서 크리스찬은 가장 철저한 보수주의자다. 그리스도의 심정! 그 무한대의 아가페. 이 심정 있으면 내 마음 하늘이다. 이 사랑 없으면 낙원도 황천이다. 이 심정 잃으면 교리도 신학도 발 뿌리에 널리는 ‘스텀블링 블록’이다.”184)

한국 장로교회의 앞날과 세계적인 교역자 양성을 위해서는 근본주의 신학에 철저히 맞서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논쟁 가운데 총회는 1947년 5월 12일부터 15일까지 김재준의 진술서와 학생들의 진정서를 살펴본 후 송창근과 김재준을 불러 문답을 실시했다. 문답과 김재준의 진술서를 토대로 무기명 투표를 진행하였고, 김재준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총회는 김재준의 신학적 문제를 일단락짓는 듯 보였다. 그러나 장로회 정통신학교를 재건하려는 목사들은 조선신학교 이사진과 교수진을 총퇴진시키려는 계획안을 가지고 1948년 4월 20일 제34회 총회를 열고 상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고 상정안은 부결되었다.185) 총회는 결국 1948년 5월 20일 장로회 정통신학교란 이름으로 박형룡을 교장으로 하는 또 하나의 신학 교를 남산에 세웠다.

1949년 4월 제35회 총회에서는 총회신학교의 직영을 가결하고 양 신학교의 합동안을 통과시켰다. 총회신학교의 직영으로 가결했다. 결국 총회는 두 신학교 합동론으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전환했던 것이다.

“양교를 무조건 합동하고 중요 과목은 선교사가 맡고 나머지는 한인 교수가 맡는다. 양 신학교의 기존 교수진은 백지로 돌리고 합동된 신학교의 교장과 교수는 합동이사회에서 선택한다.”

총회의 결정을 위임받은 합동이사회는 1948년 6월 28일 다음과 같은 「합동 7원칙」을 발표하였다.186)

1) 신학교육은 순복음주의에 기초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를 준수할 것. 2) 양 신학교 직원은 총 퇴진할 것.
3) 이사회는 총회에서 승인한 양교 이사로 조직하고, 회의 결정은 3/4의 가결로 할 것.
4) 교장과 교수는 북장로선교회에서 3인, 남장로선교회에서 2인, 캐나다와 호주선교회에서 각 1인씩 선출하여 중요한 과목은 그들에게 맡기고, 기타과목은 한인목사 중에서 적재를 택하여 맡길 것.
5) 교명과 교칙은 이사회에서 결정할 것.
6) 양교의 학생은 교칙에 의하여 재편성할 것.
7) 양교의 재산과 비품은 무조건 제공할 것.

이와 같이 신학교 「합동 7원칙」에 조선신학교측은 첫째, 양교 합동을 위한 기도이니만큼 양교 현 직원은 무조건 합동할 것. 둘째, 신교수 채용에 관해서는 선교사나 한인을 막론하고 적재를 이사회에서 선정 채용할 것. 셋째, 회의의 결정은 출석한 반 수 이상으로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반면 장로회신학교측은 첫째, 모세오경 저작 문제에 대한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오경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 사람은 교수로 채용하지 말 것. 둘째,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은 당연히 교수진에서 제외할 것. 셋째, 회의의 결정은 2/3의 가결로 할 것을 주장했다.

이상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합동 7원칙」에 제시되지 않았던 모세오경 저자 문제 제기, 모든 직원의 인사권의 내용, 선교사의 관여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말하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신학교육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좀 더 중요한 것은 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 재건과 그 주도권 장악이었던 것이다.

1950년 4월 21일, 제36회 총회가 열렸던 대구 제일교회에서는 안타까운 교회 역사의 한 장면이 기록되었다. 몸싸움까지 가세된 총회는 결국 경찰의 출동으로 사태를 수습해야만 했다. 결국 합동특별위원회는 이듬 해 피난지 부산에 모여 두 신학교의 직영을 모두 취소하고 새 신학교를 세우는 안건을 상정 53 대 3이란 다수결로 결정했다.187)

이 결의에 조선신학교 측은 강력히 반대했다. 왜냐하면 이 안건이 제36회 총회 결의대로 노회 수의를 거치지 않았고, 아무리 전쟁 상황이란 비상사태라 하더라도 전회의 결의를 번안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것, 또한 이것을 총회에서 직결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특별위원회의 안이었던 두 신학교를 취소하고 새 신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은 광고 보고로 받은 것뿐이었다. 정식 토의를 거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측의 항의는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장로회신학교의 학교 폐쇄, 1951년 9월 18일 대구에 설립한 총회신학교로 합동하였다.188) 조선신학교 측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조선신학교의 불응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7회 총회에서 이북 10개 노회의 총대 67명에게 행정권을 부여하였고, 이 세력을 기반으로 김재준을 파면시켰다.189) 미국 선교사들은 미군 군목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기편 대표들을 군용 지프차에 태워 왔다. 이들의 숫자가 정확히 5명 더 많았다. 김재준의 파면 역시 5표차로 파면당했다.190) 김재준의 파면으로 그치지 않았다. 5표 차이로 조선신학교 졸업생들에게는 일체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김재준과 조선신학교에 동조한 캐나다 선교사 윌리엄 스콧191)을 처단하는 것 역시 5표 차이로 결정되었다.192)

김재준은 이 사건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결국 총회의 결정이라는 것도, “신학적 이슈를 놓고, 신학에 눈뜨지 못한 많은 수의 시골 교역자와 장로들에게 거수로 결정하라는 겁니다. 지방색, 이해관계, 그냥 거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적 정죄의 명분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193)라고 말했다. 즉 당시의 신학적 갈등의 이면에는 교권을 누가 가져가느냐 지배권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김재준을 처단한 것이었다. 김재준은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러면 이제 총회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셈이다. 한국신학대학은 죽었다. 가인에게 죽은 아벨과 같이 그는 형님에게 맞아 죽었다. 하회는 하나님이 심판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변호가 없었다면 승리는 영원히 가인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시다. 한국신학대학은 다시 살 것이다. 복음의 자유,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한국 교회의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허물어진 한국 산천의 재건을 위하여 그리고 전 세계 크리스찬의 친교를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한국신학대학은 무덤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194)

김재준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조선신학교와 자신의 제자들이 수난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했다. 그러나 “새 술은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에 순종하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전진했다.195)

경기노회를 중심으로 한 전국노회의 조신 측 회원들은 총회의 불법 결의 시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1953년 4월 25일 제38회 총회는 제37회 결의를 재확인하고 분열된 충남・전북노회 등을 오히려 반(反) 총회 행위자로 규정하여 언권을 취소하기까지 이르렀다.

결국 조선신학교 측은 총회불법을 시정하고자 한 호헌에서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는 법통 총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법통 총회에 참여한 초기 참석노회는 전북, 군산, 김제, 경북, 경서, 충남, 목포, 충북 9개 노회였다. 여기에는 목사 26명, 장로 27명을 포함 모두 53명이 참석하였으며 임원으로는 회장 김세열, 부회장 박재석, 서기 이상귀, 부서기 정용철, 회록서기 정규태, 부회록서기 장하원, 회계 황희섭, 본회계 박정현으로 구성 되었다.196)

김재준을 필두로 한 호헌총회를 개최한 이유에 대해서 1953년 6월 10일,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단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1] 총회는 3년래 그 헌법과 통용 규칙을 유린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그 존립의 근거를 상실하였다. [2] 총회는 개혁교 본래의 대헌장인 신앙 양심의 자유를 유린함으로 말미암아 그 신앙적인 존재 이유를 상실하였다.
[3] 총회는 한 당파의 편협한 고집에 의하여 교회로서의 충성된 의사 반영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그 도의적인 존재 근거를 상실하였다.
[4] 총회는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생겨진 각 노회와 지교회의 혼란과 이탈을 목도하면서도 이를 수습할 아무런 성의도 능력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사실로 보아 그 행정 능력까지도 이미 상실한 것을 스스로 입증하게 되었다.197)

김재준은 호헌 총회가 교단의 분립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재건을 위해선 더더욱 그러했다. 재건을 넘어 새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선 ‘새 순’이 필요했다. 김재준은 필연적인 분립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심정을 토로했다.

“그래서 실질상 ‘기장’과 ‘예장’은 분리된 셈이다. 나는 그것을 ‘분열’이 아니라 ‘분지(分枝)’라고 설명했다. 나무가 자라려면 줄거리에서 ‘가지’가 새로 뻗어나가야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기장은 ‘분지’ 중에서도 ‘결과지(結果枝)’다. 밋밋하게 자라는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과수원 농부’는 끝을 베어내고 못 견디게 가새질한다. 그래야 열매가 맺기 때문이다. 기독교장로회는 결과지이다. 소망 없는 수난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십자가’다. 십자가는 부활의 서곡이다. 부활의 생명에는 숱한 열매가 맺혀질 것이다. 하고 나는 스스로 긍지를 느꼈다.”198)

김재준에게 맡겨진 사명은 한국 교회의 재건이었다. 이 한국 교회의 재건을 위해서는 진보적이며 세계적인 교역자를 길러낼 수 있는 신학교, 조선신학교가 재건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김재준의 원대한 꿈은 한국 교회의 재건과 운영에 관한 주도권을 잡는 데만 급급했던 보수적 근본주의자들로 인해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해방 정국하에 미완의 완성이라는 상황 속에서 진보와 보수, 교권과의 투쟁으로 인해 김재준은 많이 힘들어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기장의 탄생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의 발전이라 할 수도 있는 현상이었다.”199)라고 말한 유동식의 지적처럼, 김재준은 기독교장로회라는 ‘결과지’를 통해 세계 신 학의 흐름에 발맞춰 갈 수 있는 신학교육의 틀을 마련했다.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김재준은 서울 동자동 캠퍼스로 교수와 학생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동자동 건물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수리해서 사용했다. 그의 교육이념에 있어서 건물과 사업보다는 사람과 인물이 중요했다.

“백년지계(百年之計)는 재어수인(在於樹人)이라고 사업 중심보다도 인물 중심으로 건설하기 전에는 참된 건설을 기대할 수 없음은 우리 주님의 하신 일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200)

이러한 교육이념을 토대로 한국신학대학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동자동의 캠퍼스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새로운 신학교육의 캠퍼스 부지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이사장 김종대 목사는 수유리 화계사 입구의 언덕 주변 10만여 평을 새 캠퍼스의 적임지로 꼽았다. 지금의 서울 강북구 수유동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위치이다.201)

캐나다 연합교회는 수유리 캠퍼스 교사 건축비 일부에 충당하라고 당시 미화 1만 달러를 주었다.202) 캐나다 연합교회는 성숙한 세계 교회의 협력 모습을 보여주었다. 1957년 봄, 김재준은 학교 건물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여기서 고요히 배우고 깊이 기도하고 넓게 꿈꾸는 예언자의 무리가 나서 하늘의 사명을 띠고 산 아래로 내려가리라…… 영적인 깊이와 이웃 사랑의 넓이를 기대한다. 경건한 예배와 겸비한 봉사로 우리의 행위를 연마해야 한다.”203)

김재준은 신학교육의 이상과 목적을 예언자적인 사명, 경건과 학문의 조화, 이웃 사랑을 겸비한 봉사 정신을 실천하는 것에 두었다.204) 1958년 한국신학대학 캠퍼스가 수유리로 오면서 본격적인 한국신학대학의 전성기가 펼쳐진다.

1959년 9월 김재준은 학장에 취임했다. 사실 그동안 학장직을 맡지 않았다. 조선신학원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고 학교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기장의 지도 세력이었는데도 그는 전면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205) 김재준의 학장 취임은 썩었던 살을 도려내는 시기였다. 아픔의 시간이기도 했다. 경리 비리와 같은 돈과 관련된 문제들이 많이 드러났다. 신학교육의 자유와 교회의 개혁을 외치고 새롭게 출범한 기장과 한신이었지만 돈 앞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캐나다 교회가 보낸 헌금을 통해 이익을 챙겨보려고 했다가 오히려 사기를 당했던 일, ‘애자(전신주에 쓰는 물건) 사건’과 같은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206) 김재준은 학장으로 있으면서 돈과 관련된 비리, 돈과 관련된 사건 사고가 터지는 것을 바라보며 개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기장교회들의 조속한 건설과 발전과 자립을 위해 밤낮 염원을 올렸다. 돈만 있으면 문제없이 여름 초목처럼 무럭무럭 자라리라 믿었다. 돈과 함께 탐욕이 따라왔다. 교권욕이 풍선같이 부푼다. 돈을 얻고 친교를 잃었다. 욕심이 사랑을 먹었다.”207)

김재준은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그런 이유로 학교를 떠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신학생들이 찾아와 납치하다시피 해서 김재준을 택시에 태워 학교로 데리고 갔다. 김재준은 김정준, 조선출을 불러 자신의 잘못이 없음에도 용서를 구했다. 사과의 내용은 학교 행정의 책임자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진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스스로 사과한다.208) 김재준의 성숙한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을 볼 수 있다.

한국 교회 역사를 살펴볼 때 김재준이 세운 기장의 의의는 특별하다. 물량과 수, 양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의의가 있다. 기장의 의의는 역사 속에서 더욱 빛이 난다. 작은 교단으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이 땅의 정의와 진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서 소리 없이 녹아졌다. 자신을 녹여버리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어두운 저녁이 지나면 밝은 아침이 온다. 역사의 어두운 밤을 지내고 밝은 빛을 희망하며 인내하며 그 역할을 감당해 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역사의 어둠 속에서 민족과 교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추는 작은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기장의 이러한 예언자 적 사명의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지는 길 이었다.209)

십자가를 지는 길은 새 역사를 창조하는 길이다. 그것은 바로 한국 교회의 보수적, 교권적인 선교사를 의존하는 성격을 개혁하고 한국 교회의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성격을 계승하는 역사를 말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세계 교회와의 교류를 통해 선교 지평을 확대하고, ‘전적인 그리스도를 인간 생활의 전 부분에 증거하는’ 역사 참여를 통해 민족 현실 속에 선교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김재준은 1956년 ‘대한기독교장로회의 역사적 의의’라는 글에서 우리 교단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우리는 이제 이 한국을 우리의 소재로 받았다. 우리는 한국 역사 안에 그리스도의 속량 역사를 조성하며 한국 역사를 변질시키는 업무를 하나님께로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 역사 안에 성육신하셔서 이 역사의 구원을 위하여 그 피의 최후의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쏟아 땅에 묻힌 ‘한 알의 밀’이 되신 것같이 크리스찬도 역사 안에 보냄 받은 것은 역사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 안에 그 전 존재를 쏟아 속량 의지에 충실한 데에 그 소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어진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각 부분에 그리스도의 그 조형 이념이 되며 ‘혼(魂)’이 되게 하는 데 책임적으로 전력해야 한다.”210)

한국기독교장로회의 탄생에는 김재준의 산고가 있었다. 그 산고는 김재준의 소명이었으며 ‘혼’이었다. 김재준은 교단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애썼다. 구체적으로는 제도 혁신, 세계 교회들과의 실천적 선교 사업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김재준은 기장이 어떻게 하면 보수적이고 교권화 되어 있는 기존의 장로교회들과 차별성을 갖는 교단이 될 것인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진보적이고 민족적인 교회 제도와 기구들을 설치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했다. 이것이 김재준에게는 시급한 숙제였다. 김재준은 지교회가 선교를 맡고 노회는 교회 개척을 맡도록, 그리고 총회는 정책 수립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행정 체계에 있어서는 총회를 중심으로 중 앙 집권 형태로 나아가지만 선교 활동은 지교회와 노회를 중심으로 지방 분권 체제를 지향하게 하였다. 선교사들과 함께한 협동사업위원회는 교단의 정치구조를 지교회와 노회 중심의 지방분권 제도로 혁신하며 총회는 선교 중심적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211)

세계 교회와의 협력 관계에 있어서 김재준은 해외 교회로부터 지원받는 선교비 청구를 거부했다. 물론 교단 내 일부에서는 반대의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기장은 조선신학교를 세울 때 어떠한 선교부의 도움 없이도 민족 자본만으로도 자립적이며 주체적인 신학교육기관으로 세울 수 있었다. 또한 기장은 1953년 제38회 호헌 선언문에서 우리는 의존 사상을 배격하고 자조자립 정신을 함양하는 교단이 되기를 공포하지 않았는가? 과감하게 김재준은 캐나다 선교부와 동역자적인 관계를 상호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선교비 지원을 거부했다. 둘째, 세계 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였다. 1959년 10월 김재준은 기장을 한국기독교연합 회(KNCC)에 정식 가입시키는 데 애썼다. 한편으로는 세계개혁교회연맹 (WARC)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기장을 세계개혁교회 연맹 제18회 때부터 총회 대표로 참석시켰다. 이것은 기장이 개혁교회 전통을 물려받은 교단이라는 것을 확고히 한 것이었다. 김재준은 1960년 기장을 세계 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212)

[각주]

[162] “해방직전의 의(義)에 수한 우리 학생 두 사람”, 『전집』 제13권, 197-201. [163] 손규태, 『장공 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 52.
[164] 위의 책, 52-53에서 재인용.
[165]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34.
[166] 문동환, 『문동환 자서전』, 140.
[167] 『선린회 요람』, 7. ; 주재용, 『경동교회 40년사』, 경동교회40년사 집필위원회, (서울: 종로서적, 1985), 35에서 재인용.
[168] 위의 책, 35.
[169] 김경재, 『김재준 평전』(서울: 삼인, 2001), 87.
[170] “기독교의 건국이념”, 『전집』 제1권, 159-179.
[171] 김경재, 『김재준 평전』, 79.
[172] 연규홍, 『역사를 살다』(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12), 130.
[173]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452-456.
[174]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경성: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국, 1956), 146.
[175] 연규홍, 『역사를 살다』, 132.
[176] 손규태, 『장공 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 56.
[177] 김경재, 『김재준 평전』, 83.
[178] 연규홍, 『새역사 50년사』(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3), 70.
[179] 위의 책, 71.
[180] 김양선, “김재준 교수의 ‘편지에 대신하여’”, 위의 책, 231-245.
[181] “편지에 대신하여”, 『전집』 제11권, 192-197.
[182] 연규홍, 『한국 장로교회와 칼빈 신학 사상』(서울: 한빛, 1996), 189.
[183] 이영미, “한국 선교 초기 성경해석과 그 파급력”(성서학 학술세미나, 2007/5), 522.
[184] “자유와 보수”, 『전집』 제1권, 203-204.
[185]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71-73.
[186] 이영헌, 『한국기독교사』(서울: 컨콜디아사, 1983), 246.
[187] <제36회 회의록>, 134-135.
[188] 이영헌, 『한국기독교사』, 248.
[189] 연규홍, 『새역사 50년사』, 74.
[190] “장로교 총회 속개”, 『전집』 제13권, 311.
[191] 윌리엄 스콧(William Scott)는 한국명 서고도이다. 스콧 박사는 1886년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했다. 1914년 밴쿠버의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신학 훈련을 마치고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1922년 은진중학교 교장으로 시무했다. 세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일제의 탄압 속에서 6개월 동안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1943년에 캐나다로 강제 귀환을 당했다. 1945년 해방과 같이 다른 동료와 함께 다시 입국했다.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스콧 박사는 경남 거제도에 응급병원을 건축했다. 문재린, 김신묵,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175-178.
[192] 연규홍, 『새역사 50년사』, 74.
[193] 서정민 녹취 기록, “長空 金在俊 博士의 회고”, <韓國基督敎史硏究>, 제5호, 韓國基督敎史硏究會, 1985/12/5, 7-8.
[194] 김경재, 『김재준 평전』, 100, 재인용.
[195] 위의 책, 102.
[196] 연규홍, 『새역사 50년사』, 81.
[197] 위의 책, 102.
[198] “기장은 결과지(結果枝), 『전집』 제13권, 328.
[199]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146.
[200] “편지를 대신하여”, 『전집』 제11권, 192.
[201]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63.
[202] 위의 책, 163.
[203] 김재준, “우리는 자란다.”, 「목자」, 1957/3 ; 50년사 편찬위원회, 『한신대학 50년사』(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1990), 108에서 재인용.
[204] 김경재, 『김재준 평전』, 107.
[205]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68.
[206] 위의 책, 170.
[207] 김경재, 『김재준 평전』, 107.
[208]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172.
[209] 연휴홍, 『역사를 살다』, 233.
[210] “대한기독교장로회의 역사적 의의”, 『전집』 제16권, 304.
[211] 연규홍, 『역사를 살다』, 32.
[212] 위의 책,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