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삶

[장공의 삶] 5장 : 고난의 땅에 오다(1933-1938) - 《십자군》을 발간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8 09:22
조회
453

[장공의 삶] 5장 : 고난의 땅에 오다(1933-1938)


《십자군》을 발간하다


앞서 서술한 대로 김재준은 1901년 함북 경흥의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으로 인해 김재준은 어렸을 적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아홉 살까지 『동몽선습』, 『사략』, 사서삼경을 다 떼고 여름에는 『당시』, 『득율(嘚律)』, 『방옹집(放翁集)』 같은 한문시집까지 떼었다고 한다. 이것은 김재준을 한문과 서예에 능통하게 만들었고 타고난 문장가로 올라설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일본 유학시절에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의 문학서적을 탐독했다. 이러한 훈련은 김재준이 문장을 통해 시대와 상황에 꼭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게 했다. 설교와 논문, 수필과 자서전 등 다양한 글로 표현되어지는 호소력 있고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수많은 글을 썼다. 김재준의 문장은 시대를 깨우치고 교회와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었다.


김정준은 김재준의 글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문장이 아름답고 미끈해서만이 아니라, 하늘과 세계와 인간의 깊은 곳에까지 우리의 생각과 손을 펴게 하는 글을 써낸 사람.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전달해 주어서만이 아니라 낡은 것의 허점을 찌르고 잘못된 것을 ‘뽑으며 파괴하며 넘어뜨리는’ 폭발력을 가진 글을 써온 사람. 항상 역사의 수평선 저 너머 영원에다 눈길과 손길을 잇대어 장차 올 새로운 아침을 기대하고 그것을 기다리도록 칠십 평생을 끊임없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 보수파 진보 어느 하나에도 자기 발을 부치지 않는 진보적 보수주의, 보수적인 진보주의 사상을 글귀마다 펴 나가는 폭넓은 진리의 탐구자, 신앙과 윤리, 교회와 사회, 신학과 철학, 전통과 혁신의 테두리를 자유스럽 게 넘나드는 자유의 탐구자, 이런 진리와 자유에서도 높고 깊고 폭넓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 그의 생활과 사상이 높고 넓어 푸르고 긴 창공 같아 사람들이 그를 장공(長空) 선생이라 부른다.”134)


김재준의 글은 생명의 소리였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난의 상황 가운데 있는 우리 민족에게 생명을 선포하는 소리였다. 자유함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소리였다.


김재준이 용정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용정에서는 신사참배가 강요되지 않았다. 김재준은 자신이 평양에서 쓴 『순교자 열전』을 책으로 출 판하기 위해 일본 영사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담당직원은 원고를 읽어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두고 가라고 했다. 한 달쯤 지나서 다시 김재준은 영사관을 찾아갔다. “너무 잔인한 기록이어서 민심을 자극할 것 같고 신사참배 거부소동이 야기될 우려도 있으니 출판은 중지하는 게 좋겠소.”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원고라도 돌려 달라는 김재준의 요청에 “원고도 압수하기로 결재났소!”라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에 김재준은 정기간행물로 잡지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정기간행물은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십자군(十字軍)》 첫 호를 냈다.


《십자군》은 만주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던 김재준이 이태준의 협조를 얻어 창간한 월간지이다. 창간호부터 2호까지는 총 12면의 얇은 팸플릿에 불과했지만 제3호부터는 국판 40면으로 확장시킬 만큼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재준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가 아닌 사회의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활동하기를 원했다.


《십자군》 창간함에 있어서 몇 조목의 선언으로 이 난지의 성격을 밝히려 한다.


(1)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보아 각 방면의 주장과 활동을 조화 시키려고 힘쓸 것이다.
(2) 우리는 한국의 교회를 하나 되게 하며 서로 협력하게 하여 통일된 한국 교회를 통하여 주님께 충성을 다하려 한다.
(3)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신앙 위인들을 소개하며 그 사상과 활동을 본받아 우리 교인의 믿음을 깊게 바르게 활발하게 깨끗하게 하는데 힘쓰려 한다.
(4)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 자신을 대장으로 뫼시고, 씌어진 “말씀”과 성신의 활동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파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선한 병사처럼 싸우려는 것이다. 우리는 출정 중의 영적 십자군이다. 그러므로 성경 연구와 설교와 온갖 선한 사업의 가장 충실한 친구가 되고자 한다.135)


1937년 5월 창간되었지만 일제의 규제로 인해 1년도 채 못 된 1938년 2월에 폐간되었다. 그 후 1950년 속간되고 1957년까지 간행되었다. 이 잡지를 통해 김재준은 한국의 몰역사적 보수 정통주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주체적 역사 참여 신학을 강조했다.


김재준은 《십자군》을 통해 ‘그리스도의 정신’이 역사 안에서 ‘혼’이 되길 바랐다. 그 통로의 역할을 김재준의 《십자군》이 감당했다. 김재준의 《십자군》은 중세의 정복전쟁의 선봉에 섰던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십자군이 아니었다. 김재준의 손에는 총과 칼이 아닌 십자가만 들려 있었다. 김재준의 《십자군》은 빈손에 오직 십자가만 들고 십자가 냄새를 풍기며, 모든 것을 잃을 때 모든 것을 소유하고, 죽어서 살며, 약한 때 강해지는 ‘십자가 의 도리’만을 전하는 전도자였다. 다음은 《십자군》에 수록된 글들이다.136)


김재준


“信仰의 三重性”(1937.9), “移民群을 생각하며 - 예레미아의 바벨론書翰을 읽음”(1937. 9.), “靜思와 祈禱”(1937. 9.), “위대한 설교: 사랑의 수고(스퍼전)”(1937. 9.), “施惠의 聖者 알 렉산드리아의 요한과 그 逸話”(1937. 9.), “맨 처음에(창세기 번역)”(1937. 9. ~ 1938. 2.), “경건문학: 어거스틘의 懺悔錄(번역)”(1937. 9 ~ 1938. 2.), “히부리人書 演義”(1937. 9. ~ 1938. 2.), “실화: 믿음은 모험한다”(1937. 9.), “위로의 말씀- 주님을 처다보라”(1937. 10.), “第二十六會 總會 소식을 듣고”(1937. 10.), “平信徒여 奮起하라(번역)”(1937. 10.), “처음 성탄나무(크리스마스 츄리)”(1937. 12.), “박사들은 지금도 예수께 절합니다.”(1937. 12.), “성탄설교: 말슴이 육신을 일우어(번역)”(1937. 12.), “今年度 世界的 大會合 에딘바라의 信條와 職制大會”(1937. 12.), “民謠의 盲聖者 성 허베 哀話”(1937. 12.), “이야기: 종소리 는 왜 낫는가(번역)”(1937. 12.), “동방박사의 전설”(1937. 12.), “架橋”(1938. 2.), “先知者的 心情”(1938. 2.), “설교: 생명의 샘 예수(번역)”(1938. 2.), “그리스도의 香氣: 勇師의 片貌”(1938. 2.), “所聞所感: 海外敎界動靜”(1938. 2.), “D. L. 무디와 그 逸話”(1938.2. ).


김정준


“聖貧學舍의 하로”(1937. 10.)


김명혁


“實話: 慈善飛行士”(1937. 10.)


김약연


“東滿敎會 三十週年略史”(1937. 12.)



김재준은 《십자군》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주장을 펼쳐나갔다. 신앙, 이 민족의 삶, 설교, 문학, 그리고 성탄절 등 주제와 내용도 다양했다. 이중에는 “施惠의 聖者 알렉산드리아의 요한과 그 逸話”(1937. 9.)와 “民謠의 盲聖者 성 허베 哀話”(1937. 12.)는 일제에 압수당한 『순교자 열전』 원고 중 일부였다. 특별히 교역자가 없는 시골 교회를 위해 설교와 예화를 다양하게 소개했다.137)


김재준은 《십자군》, 《제3일》 등 여러 소리를 통해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가 계몽되길 바랐다. 그리고 김재준의 노력은 후일 한국 신학의 진일보에 앞장서게 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유동식은 『한국 신학의 광맥』을 통해서 1930년대 한국 신학적 의의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한국 교회는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3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학적 전통이 문제 되고, 또한 전통의 형성과 보전을 위한 노력과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138)


1930년대 한국 교회는 내적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내부적 신학의 갈등과 교권적 파벌 등으로 반역사화 되어 가고 있는 깊은 수면 속에서 김재준은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깨우기 위한 노력을 했다.


“신학이 없어질 수 없는 궁극의 과제를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시대적인 조건에 의하여 인간의 요청에 적응하는 대답을 줄 의무가 있는 것이라면 신학의 지금 상태를 재검토하며 이제부터의 갈 방향을 작정하는 당연한 조처라 아니할 수 없다.”139)


김재준은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신학교육과 활동에 대해서 전혀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 선교사들의 정신적인 노예 상태, 혹은 미성년자로 머물고 있는 한국 교회의 신앙 양심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확보하길 바랐다. 나아가 한국 교회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각주]


[134] 주재용, “김재준의 생애”,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서울: 풍만출판사, 1986), 30-31.
[135] 윤춘병, 『한국기독교 잡지 신문 백년사(1885-1945)』(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256.
[136] 이덕주, “장공 영성과 한국 교회”, (장공 사상 연구 목요 강좌, 2010/9/9), 27. ; 이덕주는 《십자군》 1권 3호(1937. 9)부터 2권 1호(1938. 2)까지 총 4권에 수록된 글들을 정리했다.
[137] 이덕주, 위의 논문, 27.
[138] 유동식, 『한국 신학의 광맥』(서울: 전망사, 1982), 134.
[139] “신학의 갈 길”, 『전집』 제5권, 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