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의 삶

[장공의 삶] 5장 : 고난의 땅에 오다(1933-1938) -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8 09:12
조회
594

[장공의 삶] 5장 : 고난의 땅에 오다(1933-1938)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다


김재준은 1932년 여름 서울로 돌아왔다.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 등을 만나 인사를 드린 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그의 집 창골로 돌아왔다. 만 4년 만이었다. 그의 가족은 한 명이 더 늘어나 있었다. 미국 유학을 가기 전 임신해 있던 둘째딸이 태어났던 것이다. 막내아들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던 탓인지 김재준의 아버지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무척이나 컸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아들과 연을 끊을 수 없기에 화해를 시도했다.


“이제부터는 ‘교’에 대해서는 서로 말하지 않기로 하자. 부자유친(父子有親)만으로도 ‘친(親)’할 수는 있을 게 아니냐?”99)


김재준은 “네! 힘써 보겠습니다!” 답했다. 김재준의 속내는 그러지 않았겠지만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기에 그는 속으로만 안타까워했다. 김재준의 이러한 안타까움은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돌아가신 후에도 지속되었다.


유학 후 고국에 돌아와 많은 일을 꿈꾸었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꿈을 꾸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한 무대가 없었다.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이 떠나기 전 속해있던 노회에 찾아가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의 노회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출신 목사들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리들 가운데 일본, 미국에서 공부한 김재준이 끼어드는 것에 반길 사람은 없었다. 자신들의 신학적 노선과 다른 것은 둘째치더라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김재준은 그때까지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견제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김재준이 바라본 노회원들은 참담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는 사라져버리고 행정적 절차, 사무적 절차에만 집중되어 있는 노회는 더 이상의 주의 종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김재준은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복음적인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정통주의는 그대로가 율법주의였다. 거기에는 자유하는 인간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목사님들과 노회원 장로님들 얼굴은 평화 없는 목사탈(마스크)로 굳어져 있었다.”100)


율법주의로 대변되는 정통주의는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대변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정통주의라고 자부하고 있는 평양신학교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자신의 고향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 보이려고 하였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적 상황을 충분히 인지한 후 김재준은 평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훗날 프린스턴 3인방이라고 불리게 되는 송창근, 한경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형 송창근은 산정현교회의 후임목사로 예정되어 있었고, 평양 숭실학교 성경강사로 출강 중에 있었다. 또한 한경직은 숭인상업학교 성경 교사 겸 교목, 기림리교회 임시목사로 있다가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목사로 가게 되었다.101) 한경직이 있던 숭인상업학교는 선교사들이 설립한 선교사 중심의 미션스쿨과는 달리 조선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평양 시내 장로교회 당회원 연합회가 조직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 학교는 초기 숭인 중학교로 시작하였지만 취직을 염두에 두고 상업학교로 개편하여 재출발한 학교였다. 이 학교의 이사는 산정현교회의 장로인 오윤선, 조만식, 김동원 등이었다.


김재준은 한경직의 후임으로 청빙받았다. 김재준의 역할은 한경직이 일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숭인상업학교 성경 교유, 즉 교사 겸 교목으로서 청빙받은 것이었다. 사실 김재준에게 숭인상업학교의 청빙이 오기 전 숭실전문학교로 와 달라는 부탁을 먼저 받았다. 그러나 김재준은 조선 사람이 설립한 학교, 조선 사람이 중심인 숭인상업학교를 택했다. 본격적인 업무는 1933년 4월부터 시작되었다.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조카 둘을 데리고 두 칸짜리 집을 얻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가정의 보금자리를 만든 셈이었다. 이 시기 김재준은 기도도 참 많이 했다. 오고 가는 출퇴근길에도, 바위 밑에서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언제나 기도를 했다. “나는 그 당시 새벽마다 모란봉 꼭대기 솔밭속 바위 밑에서 기도했다. 눈 쌓인 겨울에도 거의 예외가 없었다. 가고 오는 길에서도 기도하며 걸었다.”102)


김재준은 기도의 제목이 많았다. 특별히 숭인상업학교의 강당 설립을 위해 기도했다. 학생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공간이 없었고, 학생활동을 할 공간이 확보되지 못했다. 이를 위해 김재준은 기도하며 강당 건축기금 모금에 열을 올렸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모금약속을 받았지만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김재준은 모금의 한계를 느끼고 신입생과 재학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학기 초 내야되는 학비에 강당 건축기금을 조금씩 포함시킨 것이었다. 결국 한 학기 안에 강당기금을 모두 걷을 수 있었다. 학생들의 도움과 김재준의 기도, 하나님의 은혜로 학생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었다. 갖가지 학생활동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봤을 때 실내 체육관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실내 체육관의 이점을 백분 활용한 숭인상업학교는 ‘숭상 농구팀’도 창설하였다. 이 농구팀은 ‘전일본중학생농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73:13이란 스코어가 나올 정 도로 압도적인 기량을 갖고 있었다. 2년을 내리 우승하자 일본 정부는 조선 민족의식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출전금지 처분을 내리기까지 했다.103) 사실 숭인상업학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담당했다. 아래는 전 교장으로 있었고 이사로 봉직했던 조만식 선생이 어느 날 채플을 인도하면서 학생들의 민족적 자각과 단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했던 한 이야기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무기고에 조선 쥐 수천 마리가 땅속을 뚫고 들어가 활줄들을 전부 쏠아 끊고 달아난 일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본군이 당황하는 것을 안 한국군은 급습하여 그들을 전멸시킨 일이 있었다. 쥐도 ‘조선 쥐’ 구실을 했고, 쥐도 단결하면 왜군 때려눕히는 지하대장군이 된다.”


숭인상업학교는 민족교육의 중심에 있었으며, 숭인상업학교의 중심에는 김재준이 있었다. 숭인상업학교에서 한 학기를 보낸 1933년 여름, 프린스턴신학교 선배이자 평양신학교 신약학 교수, 그리고 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책임자 겸 주필로 있던 남궁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재준에게 《신학지남》의 편집실무를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신학지남》은 1918년 평양신학교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이 기관지는 당시 장로교 신학을 대변하는 잡지였다. 그 정도면 상당히 영향력 있는 기관지임에는 틀림없었다. 김재준에게 사례금은 한 달에 20원씩 주겠다고 했다. 사례금보다도 김재준의 마음을 빼앗았던 것은 매 호마다 의무적으로 글을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재준은 ‘눌러 앉기’로 했다.


김재준은 1933년 5월호에 첫 학술 논문 「욥기에 현현한 영혼 불멸」을 게재하였다. 욥기 19장 25~26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를 주석하고 이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했다. 김재준은 자신의 논문을 통해 “욥기”에는 죽어서 천당 간다는 개념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오늘날 이 주장은 정설로 인정받는다.


같은 해 9월호에는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생활」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민족의 황폐화와 다가오는 멸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애통해하며 말했던 예레미야의 메시지와 생애를 소개했다.


“예레미야는 다시 한번 일어나 싸움할 때가 왔다. 그는 성전 문 어귀에 서서 의식주의와 성전 광신자들을 향하여 가장 날카로운 선언을 내렸다. 이 용감한 도전은 물론 탐심이 가득한 왕과 제사들이며 미로에 든 광신배들의 격노를 샀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시의 지도계급과 정면충돌한 그는 받은 것이 오직 능욕과 모독이었다.”104)


김재준은 예언자의 신앙적인 고뇌와 결단, 예언자의 하나님 말씀 선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리하여 불순한 의식적・국가적 종교를 도덕적・영적・개인적 종교로 정화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다. 우리는 이제 신의 위대한 경륜을 찬탄함과 동시에 불세출의 대예언자 예레미야의 일생을 앙모하여 마지않는다.”105)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예레미야처럼 현실을 직시하고 고뇌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신학지남》을 통해서 촉구한 것이다.


같은 해, 11월호에는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에 대해서 논문을 게재 했다. 아모스는 불의와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용기 있게 선포한 자라고 이야기했다. 그리스도는 아모스 예언자의 의를 이루신 분이라고 결론지었다. “‘공도는 물같이 흐르고 정의는 찌지 않는 강같이(흐르게) 하라’는 것이 아모스의 갈망하는 바였다. 그는 온 세상의 정치, 경제, 종교, 교육 등의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의’ 위에 세워지고 운행하여지기를 바라고 그를 위하여 싸우다가 그를 위하여 죽은 자이다. 이제 우리는 이 불의로 가득 찬 세대에 있어서 이 의의 예언자의 용기를 부러워함과 동시에 이 예언자의 의를 이루어주신 그리스도의 의만을 선포하며 그를 위하여 분투하며 또 생명을 버림이 마땅할 것 아닌가 한다.”106)


김재준이 《신학지남》을 통해 게재한 논문은 하나 같이 인간적인 고민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말한 것이었다. 또한 이 논문의 연구 방법은 역사비평학이었다. 성서 본문을 역사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설명하고자 애썼다. 당시 한국 교계의 주류 세력인 근본주의자들의 성서 해석방법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김재준의 논문은 당시 한국의 상황인 부패하고 혼탁한 사회, 복음에 충실하지 못했던 한국 교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김재준이 게재한 많은 논문들 중 근본주의자들이 특히 문제삼았던 것은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신학지남》)」였다. 이러한 논문을 근본주의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재준의 성서 주석은 성서의 축자영감설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기를 같이해서 성서 역사비평은 근본주의자들에게 강력한 공격을 받는다. 소위 “아빙돈 주석 사건”이다. 감리교에서 선교 50주년을 기념하며 『아빙돈 단권 성경 주석』을 감리교의 유형기 박사가 편수하고 1934년 12월 초판 사륙배판, 1,146면 양장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했다. 문제는 이 주석이 역사비평학을 수용한 주석이라는 것이었다. 이 주석서 출간 작업에 참여한 인물은 채필근,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장로교회는 1935년 9월에 열린 총회에서 이 주석을 구매금지 조치를 내렸다. 또한 집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공개 사과받기로 결의했다.


“황해도 회장의 헌의 중 신생사 성경 주석에 대하여는 우리 장로교회의 도리에 불합한 고로 우리 장로교회에서는 구독지 않고 주석에 집필한 본 장로회 사역자에게는 소관된 각 노회에서 살핀 후에 그들로서 집필한 정신태도를 기관지를 통하여 표명케 함.”107)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결의에 반발했다. 남궁혁을 비롯한 평양노회 소장 목사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또한 구매금지령이 내린 지 수주일 만에 당시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던 책이 다 팔렸다.


채필근은 사과를 하고 다시는 집필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성명을 통해 발표했다. 그러나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은 몇 달을 버텼다. 사과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쓴 내용이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지남》의 책임 편집자인 남궁혁은 압력에 못이겨 위 세 사람에게 성명서를 내라고 권했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은 공동명의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1) 우리는 단권 성경 주석 전체로서의 편집에 관여한 바 없다.
(2) 우리가 쓴 글에는 문제 될 것이 없다.
(3) 그러나 우리 글 때문에 교회가 소란하다는 데 대하여는 유감으로 생각한다.
1935년 10월 19일
성명자 :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이렇게 성명서를 냈고 결국 김재준의 논문은 《신학지남》에서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은 한국의 신학적 상황이 얼마나 근본주의적인지 잘 보여준다. 성서 문자주의가 팽배해져 있던 한국적 상황에서 미국 장로교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김재준과 그의 동료 송창근, 한경직은 교권에 패하고 만 것이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대륙 침략을 재개하였다. 이에 따라 신사참배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는 군국주의의 대두와 함께 대륙침략을 위한 사상적 통일을 이루어내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108) 일제는 신사신도를 국민적 애국 교육정책의 기초로 삼았다. 모든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109)


신사참배란 일본의 신들을 모시는 신사에 절을 하면서 경의를 표하고 복이나 소원을 비는 것이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규정하고 이를 통해 군국주의의 정신적 단결을 도모코자 했다. 한국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대다수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곧 우상숭배라는 관점에서 이를 거부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일부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가 하나의 국민의례로서 정치적 의미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배해도 무방하다는 주장을 했다. 감리교에서는 이러한 주장 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또한 로마 교황청은 일본의 천주교인들에게 신사참배는 애국심과 충성의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참배를 허용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신사참배와 더불어 일제는 공립과 사립학교를 모두 관청의 통제 아래 두었다. 교장과 교사의 임면이 허가제가 되었고 교과목 배정도 관청이 정한대로 해야 했다. 기독교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 학교는 순응하지 않았다. 1934년 목포 영흥중학교는 폐쇄되었다. 1935년에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 메쿤(G. S. McCune) 박사와 평양 숭의여고 교장 스누크(V. L. Snook) 여사가 면직되고 미국으로 출국 당했다.


한국 교회가 지성을 포기한 교리주의에 얽매여 신앙의 양심과 자유를 외면하는 교권주의와 문자에 갇혀 맹신하는 미성숙한 집착에 빠져가는 동안 만주사변이 발생했다.110)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는 극에 달았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한글 금지, 강제 징용과 위안부 착출 등으로 민족을 말살하려는 탄압이었다. 숭인상업학교도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다. 교장은 김재준을 만나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지 말아 달라고 했다. 또한 신사참배 때 행동을 같이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학교를 통해 교육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재준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곧바로 사표를 제출했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생각했 다면 쉽사리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재준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김재준의 이야기를 할 때, 항상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김재준이 신사참배를 했느냐 안 했느냐의 논란이다. 역사 실증주의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김재준은 신사참배를 했다. 친일행위를 했다. 그러나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사실에 근거 하지만 사실이 곧 진실의 전부일 수”111)는 없다. 역사적 진실은 역사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김재준이 신사참배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역사적 사실성만을 가지고 판단할 수 없다. 역사의 해석은 다양성을 담보해야 한다. 다양성이 담보된 해석 위에 사실의 진실성을 밝혀야 한다. 다양한 경험과 기억을 무시하고 오직 하나의 역사, 하나의 기억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김승태, 최덕성은 김재준의 신사참배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들 주장의 요약은 이렇다.


“첫째, 김재준의 신사참배는 세속 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우상숭배요, 신앙을 포기하는 배교 행위라는 것이다. 둘째, 김재준이 일제의 종교 정책에 순응하여 조선신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한 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변명될 수 없는 반민족적 친일 행위라는 것이다. 셋째, 김재준의 조선신학교는 1940년 3월, 경기도지사의 학원 인가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기까지 일본인 교수로부터 교육을 받고 일본어, 일본사, 일본 도덕 등을 배웠기에 민족 주체적인 신학교육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112)


김재준은 개인 신앙에 있어서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적 요소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36년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사직한 것이다. 자신의 신앙고백적인 선택과 결단이었다. 그러나 훗날인 1940년에는 신사참배를 개인의 신앙적 차원에서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된다. 김재준은 이에 정치적 차원을 함께 고려했다. 모든 것이 강요되는 감옥 같은 식민지 사회 현실에서 개인의 신앙고백적 순수성을 나만이 지키기 위해 도피할 것이냐, 아니면 순교할 것이냐. 그렇지 않다면 신사참배를 수용할 것이냐. 이 기로에서 김재준이 선택한 것은 제3의 길이었다.113)


개인의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개인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김재준은 정치적 차원 역시 함께 고려했다. 민족교육과 교회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순응의 노선’을 택한 것이었다. 따라서 김재준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고 봤다고 하기보다는 기독교적 역사의식과 참여윤리라고 하는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


김재준이 웨스턴신학교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1932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교육활동과 저술활동뿐이었다. 이를 통해 민족 계몽운동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김재준에게 민족 계몽운동에 대한 원대한 꿈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1930년대의 민족운동 상황은 어쩔 수 없이 일제의 식민통치의 구조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론 내재적인 독립 역량을 키워가고 타협적 민족노선을 견지하였다. 따라서 단순히 1910년대의 민족운동의 시각으로 신사참배를 바라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김재준의 조선신학교 운영을 위한 신사참배 문제는 김재준의 생애 전체를 통해 평가해야 한다. 김재준의 삶에서 한 순간, 한 면만을 수직적으로 잘라서 그 표피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부적합한 판단이 될 수밖에 없다. 신사참배를 한 이들 모두가 친일분자, 반민족분자로 평가할 수는 없다. 김재준은 이와 같은 시각에서 봤을 때 신사참배를 했지만 결코 반민족, 친일분자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우리는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114)으로 김재준의 신사참배를 친일 행위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 역사적 해석은 그릇된 해석일 뿐이다. 김재준의 신사참배 문제와 친일 문제는 일방적인 매도 혹은 흑백논리에 의해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합리적인 비판과 성찰을 통해 역사적 진실의 규명 작업을 펼쳐 나가야 한다.


[각주]


[99] “평화공존(?)”, 『전집』, 제13권, 125.
[100] “교회순방”, 위의 책, 128.
[101] “평양에서”, 위의 책, 130
[102] “숭인상업”, 위의 책, 132.
[103] 위의 글, 132.
[104]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84.
[105] 위의 책, 85.
[106]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85.
[107]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4회 총회 회의록>, 53.
[108] 김승태, “일제의 식민지배와 식민통치 이데올로기”, 『열강의 식민통치와 국민통합』(동북아 역사재단, 2010), 226-249.
[109]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2권(서울: 기독교문사, 2012), 261.
[110] 김희헌, 『한국 신학의 선구자들』(너의 오월, 2014), 142.
[111] 연규홍, 『역사를 살다』(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12), 107.
[112] 위의 책, 112.
[113] 위의 책, 114.
[114] 안병직, “과거 청산과 역사서술”, 『세계의 과거 청산』(서울: 푸른역사, 2005), 411-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