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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장공의 삶] 8장 : 세계로 끈을 잇다(1974-1982) - 북미주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 의장을 맡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8-17 09:01
조회
1325

[장공의 삶] 8장 : 세계로 끈을 잇다(1974-1982)

북미주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 의장을 맡다

역사와 함께 사는 김재준은 1975년 11월 3일 이상철과 함께 제네바로 향했다. 아프리카의 나이로비에서 모이는 WCC 세계 대회에 앞서 민주화 운동에 관심 있는 각국 대표들이 제네바에 회동하기로 한 것이다. 박상증이 주선했고, 미국 NCC 간부들이 주동 역할을 했다. 개회식에 기조연설을 맞게 된 김재준은 ‘크리스찬 선언-민주화운동과 그 역사적 의미’를 낭독하였다. 이 선언문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1973년 한국그리스도인 선언>을 작성한 것이다. 김재준이 하고 싶은 말이 이미 이 안에 모두 담겨 기조연설을 대신했다. 이 자리에 모인 각국 대표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할 구체안을 모색하려 했지만 아프리카, 필리핀, 중남미 등 한국과 같은 상황에 있는 나라들이 많아서 난관에 부딪혔다. 결국 한국인 민주단체로서 WCC에 직접적인 진술과 지원 호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인끼리 따로 지하실에 모여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세계협의회(World Council for Democracy in Korea)’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만들고 이상철 목사가 대표로 본회의에 보고했다. 제네바 회의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한국을 위한 북미 인권위’ 발족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민주화운동과 조국 통일을 펼치는 민주 인사들은 다양한 정치적 색깔을 지녔다. 좌파든 우파든 그들을 함께 묶어 이끌어갈 인물이 필요했다. 김재준에 대해서 알고 있던 민주 인사들은 넒은 포용력과 지도력, 그리고 인격을 갖춘 김재준을 명예회장으로 선출했다. 김재준은 민주화운동을 이끌어갈 당시 몇 가지 지도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이다.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이 주변 강대국의 이해나 남북한 정권 당국자들의 ‘안보 논리’에 제약되고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리이다. 둘째, 인간 존엄성의 원리이다. 어떤 정치체제나 운동도 결국 인간의 존엄성과 침범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를 담보하고 고양하는 것이라야 한다. 셋째, 화해의 원리이다. 정치 현실에다가 숭고한 종교적 정신을 접맥시킨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서로 사랑하는 화해 정신으로서만 함께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넷째, 실존적 책임성의 결단의 원리이다. 사건과 상황은 항상 움직이고 변한다. 그 시점 그 상황에서 최선의 종합 판단을 한 후 결행하는 실천 행동이 그것이다.”277)

1976년 3월 1일 <3ㆍ1 민주구국선언문>이 명동성당에서 발표됐다. 이우정이 구속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우정이 선언문을 낭독했기 때문이다.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등도 연행됐다고 보고가 왔다. 김재준은 이승만, 김상돈, 이상철과 전화 회담을 했다. 당장 해외민주단체로서 성명서를 내기로 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정부전복죄’로 다룬다고 했다. 김재준은 이상철과 함께 급히 워싱턴으로 가서 프레이저 의원을 만났다. 이튿날 국회의사록에 프레이저 의원이 발제 연설이 붙은 영역 <3ㆍ1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됐다. 미국의 어느 일간지에서도 보도된 적이 없던 민주운동이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여 러 보도기관에서 이 일을 크게 다루었다.

김재준은 민주 인사들과 함께 각 방면으로 다양한 활동을 펴면서 워싱턴에 있는 교회들을 순방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젊은 목사들이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고난 중에도 자유와 정의의 씨앗을 뿌리고 있으니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워싱턴 한인교회들이 적극 동참해 주기를 바랐 다. 그러나 그들은 보수적인 ‘부자’들이었고, 한국의 현실에 무관심했다.

“한마디로 개신교는 부르주아적 기독교다. 말하자면 자급자족하는 중산층 시민의 종교란 말이다. 그들은 이윤 동기에서 사업을 영위한다. 언제나 경쟁심리에서 부지런하다. 그들의 가치는 물량에 있다. 정신적인 ‘질 (質)’의 문제는 잘 먹혀들지 않는다. 그들의 사업욕은 세계적으로 팽창되어 간 데마다 자기 시장을 차리려 한다. 해외 선교도 그런 타입을 시사한다. 교파는 그들의 회사 간판일지 모른다. 개혁파 교회의 모습을 부르주아 생리와 대조해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278)

김재준은 그들의 냉담한 태도에 실망하고 뉴욕으로 돌아와서 4ㆍ19 기념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갔다. 김상돈의 사회로 진행된 강연회에서 4ㆍ19는 과거의 자랑이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 미래의 소망이라고 밝혔다.

“4ㆍ19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는 끝없는 혁명이다. 군사 독재, 공산독재, 독점 권력 아래서 독버섯같이 무성한 부패와 부정, 미국과 일본의 경제식민, 미국의 군사기지, 무엇보다도 38선의 동강난 요부(腰部), 이 모든 것과 싸우는 4ㆍ19 정신은 휴식 없는 전투태세로 미래를 향하여 전진한다. 4ㆍ19 기념은 과거의 자랑이 아니라 미래의 소망이다.”279)

강연이 끝난 후에 멀리서 김재준을 만나러 온 동문들, 동지들, 경동교회 교우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애기들까지 가족동반으로 온 제자들도 있었다. 삶에서 만난 인연들, 사제(師弟)로서 의리로 맺어진 관계, 사랑으로 맺어진 인간관계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김재준은 민주운동과 함께 타국에서 고난당하는 한인들이 있으면 빠짐없이 찾아가 그들을 격려해 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중에 산타 바바라라는 고장에서 교육위원 선거에 입후보한 김영민이라는 친구를 면회 간 일이다. 김영민은 경동교회 창설 장로인 김능근 교수의 맏아들로, 수재여서 일찍이 미국 유학을 갔고 결혼하여 산타바바라로 이주했다. 이 고장은 미국이 건국할 당시의 청교도들이 자리를 잡은 보수적인 마을에 동양인이 감히 교육위원 자리를 노리는 것이 괘씸하던 때, 경찰들이 거짓 조서를 꾸며서 김영민을 구속한 것이다. 알리바이가 확실한데도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종신징역을 선고했다. 이 일로 한인회는 대회를 열어 ‘인종 차별과 인권유린’을 성토하고 ‘영민 돕기’ 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정신감정을 위해 병감으로 옮겼다. 김재준은 한국의 상황과 경동교회 상황을 이야기해 주며 함께한 사람들도 격려하고 돌아왔다.

김재준은 캐나다의 윌리엄 스콧 선교사를 방문했다. 그는 지난날 조선 예수교장로회가 교권주의와 성서문자주의에 사로잡혀 김재준을 몰아낼 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선교사들의 주입과 그들의 사관에 무조건적인 추종만 있었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한국적’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오랜 동지였다.

“한국 교회 50년이 물론 미국 기타 여러 신교국 교회들의 ‘선교사’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데는 아무 이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기독교사냐 하는 데는 너무 ‘얼’이 없다는 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사상’에 있어서 비판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주입’과 ‘추종’이 있었을 뿐이었다.”280)

스콧은 90의 나이였지만 언어나 행동이 젊은이 못지않았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서인지 홀로 ‘외톨이’ 살림을 하는 모습이 힘들어 보였다. 그는 ‘외로움’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면서 방 구석에 있는 어항의 금붕어를 가리키며 자신과 함께하는 유일한 ‘생명’이라고 말했다. 김재준은 스콧 선교사와 함께 그의 부인이 묻힌 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추모의 기도를 드렸다. 김재준은 돌아오는 길에 그가 쓴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281)을 읽으면서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렸다.

동트는 아름다운 땅 한국 우리의 사랑스러운 조국 한국 만세!
멍에와 징벌에서 해방되었네.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께 겸손히 감사드립니다.
우리 민족을 영원히 수호하는 백두산

해변과 강과 계곡 그리고 인자한 어머니 땅을 에워싸고 도는 생명수 자랑스레 당신을 우리가 태어난 땅이라 부릅니다.
산과 바다의 땅
새로운 영광의 희망이 넘쳐나고,
우리 조상들의 땅, 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하나님의 아름다운 정원 한국이여!282)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한, 진정 한국인으로 살았던 스콧 선교사는 1979년 7월 16일 향년 93세의 일기로 소천했다.

김재준은 5월 9일 캐나다 한인 연합교회에서 열리는 ‘노인잔치’에 참석 했다. 교회 청년들이 손수 준비하여 대접하는 ‘경로의 향연’이었다. 김재준은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인생철학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저녁에는 둘째딸 신자가 노인 60여 명을 목사관에 초청하여 저녁만찬을 열었다. 둘째 사위인 이상철 목사는 부모님이 모두 이북에 계셨다. 그래서 늘 부모님의 품안에서 지내는 둘째딸이 남편은 얼마나 외로울까 싶은 마음에 어머니 주일이 되면 그 외로움을 달래 주려고 연로하신 분들을 모셨다는 것이다. 김재준은 이런 딸 의 사려 깊은 마음가짐을 보고 마음속 깊이 칭찬해 주었다.

1976년 7월 18일 김재준은 김병욱 장로의 만찬에 초청되어 갔다. 그곳에서 강일남, 김은옥, 그리고 이남순을 만났다. 이들은 ‘선통일 후민주’ 주장자들이었다. 우선은 이북과 친해지자고 했다. 김재준은 ‘선민주 후통일’이든 ‘선통일 후민주’이든지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가령 남한이 선민주라 할 때 지금의 군사독재 체제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민주인사들에게 정권을 내놓을 리 만무할 것이고, 북한이 선통일이라 할 때 남한의 60만 국군과 맞붙어야 할 상황이니 이 또한 승산이 없는 싸움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해외교포만이라도 통일을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하자고 했다.

며칠 뒤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북한과 캐나다가 축구 경기를 해서 북한이 3대 1로 이겼다. 교포들은 모두 북한을 응원했다. 영사관 직원들은 교포들의 북한 응원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은근히 응원을 말렸다. 그래서 교포들은 누구 하나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귀에 거슬리는 이는 같은 민족인데 캐나다를 응원하라는 거냐며 반발하기도 했다.

“우리 이민사회에서 민족의식이 증발한다고 걱정하는 이가 많다. 그러나 이런 국제경기 때에 보면 이론도 시비도 없다.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이다. 혹시 잊었다가도 타 민족과의 대결이 생기면 일촉즉발(一觸卽發)이다. 이스라엘 노무자를 학대하는 애굽인 공사감독을 ‘모세’가 현장에서 죽여 버렸다는 사건은 앞뒤를 맞춰보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성 중심의 전략 문제가 아니라, 같은 핏줄로서의 ‘촉발’이었고, 그 자신의 ‘존재’ 문제였던 것이다.”283)

김재준은 이런 국제경기에서 민족애를 보면서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민족의 피는 저절로 통한다고 생각했다.

[각주]

[277] “LA에 4ㆍ19 기념 강연회”, 『전집』 제14권, 253.
[278] 김재준, “대한기독교장로회의 역사적 의의”, 『장공김재준논문선집』, 99.
[279] 윌리엄 스콧, 연규홍 역,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한국기독교장로회, 2009.
[280] 위의 책, 306.
[281] “통일의 염원은”, 『전집』 제14권, 293.
[282] “UM창립총회를 열면서”, 『전집』 제16권, 210.
[283] “통일의 염원은”, 『전집』 제14권,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