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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장공의 삶] 3장 : 복음에 마음을 열다(1920-1926년) - 송창근을 만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7-13 08:54
조회
711

[장공의 삶] 3장 : 복음에 마음을 열다(1920-1926년)

송창근을 만나다

웅기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김재준은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이 갈수록 돋보이고 자신은 일본인들 밑에서 일하는 것이 초라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김기련은 자기의 상점을 팔고 해삼위에서 독립군에 가담했다.

자신도 무엇인가를 해야 할 마음으로 들떠 있을 때 김재준은 송창근을 만났다.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김재준을 웅기에서 더 넓은 세계로 향하도록 이끈 인물이 송창근이었다.

송창근은 국내정세가 위태하던 1889년 10월 5일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명랑했다. 송창근은 나이 열세 살에 김재권과 결혼했다. 송창근은 광성중학교에서 이동휘를 만났다. 당시 교장이었던 이동휘는 정직하고 열성적인 송창근을 아끼고 총애했다. 이동휘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떠날 때 송창근은 그를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동휘는 “너는 본국에 돌아가서 목사가 돼라.”29)고 하면서 돌려보냈다. 김재준은 당시 송창근에게 직접 들었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송창근) 그 당시 북간도에서 독립군 사관학교를 경영하던 이동휘 선생을 찾아가서 심부름을 하면서 지냈다고 들었다. 그 학교가 재정난으로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을 때, 이동휘 선생은 궁여지책으로 산골에 피신하고서 마적이 그를 인질로 잡아갔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면 교포들이 속량금을 거둬오지 않을까 하는 계책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열두 살 난 송창근 소년만을 데리고 혼자 산골 치벽한 데로 갔었다는 것이다. 소년은 성재 이동휘 선생이 시키는 대로 심부름을 했지만 그것도 별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루는 시냇가 바위 위에 앉아 있던 이동휘 선생이 ‘이 민족, 이 백성을 어찌할꼬!’ 하면서 호랑이 고함치듯 온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리게 통곡하는 모습을 곁에서 봤노라고 했다. 그 부리부리한 큰 눈에서 주먹 같은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덩달아 엉엉 울기만 했노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동휘 선생은 시베리아를 향하여 북간도를 떠났다. 같이 따라가겠다는 소년 만우에게는 ‘너는 본국에 돌아가서 목사가 돼라’ 하면서 억지로 돌려보내더라는 것이다.”30)

이후 송창근은 1919년 3월에 피어선 성경학원을 졸업하고 남대문교회의 조사(전도사)로 들어갔다. 당시 담임교역자였던 함태영이 3·1 만세 사건으로 수감되어 자리가 빈 것이다. 송창근은 1920년 1월 독립운동에 관련된 창가를 배포한 일로 잡혀 들어갔다가 6개월 간 징역을 치르고 요양차 고향에 내려왔다.31)

“만우 형은 나보다 두 살 위였으나 교회인, 사회인으로서 이미 성숙한 청년이었다. 그는 그 당시 서울 남대문교회(역전 세브란스 병원 구내에 있는 큼직한 한옥집이었다) 조사로 시무하면서 3ㆍ1 운동에 가담했다는 것 때문에 6개월 징역을 치르고 출감한 후 근신도 할 겸 고향 교회들도 예방하려고 웅기에 온 것이었다. 그는 재치 있는 미남으로서 연설도 잘하고 좌담에도 능숙하고 교제 솜씨도 세련된 품위 있는 청년이었다.”32)

그가 내려오자 교회에서 사흘 동안 특별강연회를 연다는 광고를 붙였다. 그러나 김재준은 교회 집회에 냉담했다.

“나는 교회와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웅기교회에서 연설을 했다고 들었지만 별 흥미도 관심도 없이 넘겨 보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내 하숙집 방에 일부러 찾아와서 정중하게 첫인사를 하고 ‘말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인사라도 드리고 가려고 이렇게 실례스러운 방문을 했습니다’ 하고서는 곧 떠나갔다.”33)

자신을 찾아온 송창근은 말끔하고 세련된 서울 미남자였다. 자신과 같은 풋내기를 먼저 찾아와 정중하게 인사하고 갔다. 인상적이었다. 다음날 길에서 우연히 송창근을 다시 만났다.

“지금 3ㆍ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되살아났습니다. 이제부터 새 시대가 옵니다. 김 선생 같은 청년을 요구합니다. 웅기 구석에서 금융조합 서기나 하면 무엇합니까? 서울 올라와 공부하십시오! 서울에는 유명하신 백부님이 계시잖습니까? 하루속히 단행하십시오.”34)

김재준은 이 말을 듣고 서울에 가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진 땅에서 거간료로 벌어 놓은 돈도 있어 미련 없이 금융조합에 사직서를 썼다. 창골집과 아내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곧바로 서울행 배를 탔다.

김재준이 서울에 도착한 때는 여름철이었다. 사람들은 모시 두루마기와 고의적삼을 모시로 입었다. 여인들은 장옷 속에서 눈만 내놓고 다녔다. 첫날밤을 여관에서 보내고 이튿날 백부댁에 갔다. 백부는 반갑게 맞아주면서 사랑방에 머물게 했다. 김재준은 낯선 서울 풍경 중에 못마땅한 것이 있었다.

“서울 와서 맨 처음 듣기 어색한 건 손님마다 대문간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호통소리였다. 집집마다 자기 몸종이나 둔 것같이 오만하다. 또 하나는 쌀 사러 가면서 쌀 팔러 간다는 말씨였다. 가난한 양반의 얕은 허세를 연상시킨다. 자식 공부시키는 북청 물지게꾼이 훨씬 떳떳해 보였다.”35)

김재준은 나라를 빼앗긴 일제 식민지하에 여전히 자신도 일본인의 종노릇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집집마다 자기 몸종이나 둔 것 같은 겉치레 와 가난하면 차라리 일을 해서 집안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고 쌀 사러 가면서 팔러 간다고 허세를 부리는 사회지도층을 본 것이다.

김재준은 공부하러 서울에 왔지만 나이 때문에 일반 학교를 포기하고 한 학기에 한 학년을 속성으로 가르치는 중동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은 입학률이 좋아서 의학전문학교나 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마무리 공부를 하는 학교였다. 김재준도 성적이 나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먹으면 의전 정도는 들어갈 수 있었으나 경제적인 뒷받침도 어렵고 무엇보다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방학이 되어 귀향하는 백부를 따라 부모 형제와 아내가 있는 창골집으로 내려왔다.

하기방학이 끝나고 백부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는 날 어머니는 막내아들 보내기가 안쓰러워 10리나 따라오셨다. 간간히 집에 함께 지냈으나 열 살 때 향동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지금까지 타지에서 지낸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언제 또 아들을 볼까 싶은 마음이었다.

웅기항에 도착했지만 서울에 콜레라가 성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백부가

아버지께 편지로 문의하였다. 아버지는 ‘人間萬事 塞翁之馬 安如非福 安如非禍리이까’ 하는 답장을 보냈다. ‘복과 화를 알 수 없으니 기다리라’는 말씀이었다.

[각주]

[29] “만우 회상기”, 『전집』, 제17권, 385. [30] “잊을 수 없는 만우”, 『전집』, 제11권, 59.
[31] 송우혜, 『벽도 밀면 문이 된다』, 생각나눔, 2008, 41~84.
[32] “잊을 수 없는 만우”, 『전집』, 제11권, 58.
[33] 위의 글, 58.
[34] “웅기서 서울로”, 『전집』, 제11권, 58.
[35] “1920년대 서울풍경”, 『전집』, 제13권,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