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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삶

[장공의 삶] 8장 : 세계로 끈을 잇다(1974-1982) -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와 합류하다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8-17 08:57
조회
1456

[장공의 삶] 8장 : 세계로 끈을 잇다(1974-1982)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와 합류하다

1974년 3월 12일 김재준은 캐나다로 출국했다. 자녀들이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고자 함이었다. 떠나는 날, 제자들과 민주동지들은 캐나다로 떠나신다는 말을 듣고 괴로워했다. 비겁한 처사라 생각했다.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캐나다로 떠나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민을 가신다는 소문도 떠돌아다닌다. 우리는 괴로웠다. 이런 난국에 어떻게 이 나라를 떠나실 수 있다는 말인가? 비겁한 짓 아닌가? 우리가 알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싸우라고 버리고 가시는 것인가? 어려워서 여쭈어볼 수는 없었지만 불만과 궁금 그리고 섭섭함과 아쉬움 같은 것이 뒤범벅이 되었다.”268)

김재준은 제자들과 민주동지를 뒤로 떠난다는 생각에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을 잃고 각자 제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때처럼 허탈한 마음에서였을까? 박형규는 젊은 연인들의 노래를 부르며 서글픔을 달랬다.

바닷가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에 점 하나
입가의 미소까지 그렸지마는
아~ 마지막 한 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269)

김재준이 떠나자 문공부에서 《제3일》을 취소시켰다. 발행인 겸 편집이고 ‘주간’이었던 김재준이 한국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김재준은 캐나다에서 제3회 ‘재북미한인기독학자회’ 모임에 참여했다. 캐나다에서의 첫 참석이었다. 김재준은 국내에서 민주주의 운동으로 모이는 곳에 모두 참여했다. 민주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권력도, 어떤 주의도 아닌 예수의 인간 존엄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다니엘은 또 사자, 독수리, 곰, 표범 등으로 상징되는 강대국들이 세계를 나눠 갖고 역사의 권력을 뺏고 뺏기고 하는 무대에 한 ‘인간과 같은 이(One Like a Son of Man)’가 나타나 ‘인간의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영원한 왕국을 세우는 비전도 말하고 있다. ‘Son of Man’, ‘人子’란 칭호는 후에 ‘메시아’ 칭호로도 사용됐다. 예수는 이 칭호(人子)를 즐겨 자기 의 칭호로 사용했던 것 같다. 이것은 ‘참인간’이 참하나님 아들이오. ‘참 메시아’라는 예수의 존엄한 인간관을 말한 것이 아닐까! 통일 문제나 세계평화 문제에 있어서도 ‘인간 존엄’을 앞세우고 ‘이즘’이니, 국가 이익이니 하는 따위 우상을 타파하는 것이 선결 문제였던 것이다. 크리스찬이든, 크리스찬 아닌 분들이든 다 같이 숙고할 기본과제라 하겠다.”270)

참여의식은 경건회 첫날에는 ‘우상’이라는 제목으로 유신체제, 유신헌법을 비판했다. 둘째날에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제목으로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비난했다. 이 학자회 모임이 있은 후에 박정희는 김재준을 한국으로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학자회에서의 김재준의 설교가 모두 녹음되어 청와대에 보내졌다는 것이다. 이 일로 남산에 끌려간 관용이와 김연준이 정보부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빨리 귀국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다시 전화가 와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전화였다. 정보부 요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재준은 한국에서 고난당하는 동지들을 생각할 때 해외에서 혼자 편안히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김재준은 10년의 북미주에서의 삶이었으나, 70대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을 간다’는 올곧은 신앙인으로 “무덤을 헤치고 영원에 작열하는” 제3일의 정신으로 살아갔다.271) 폐간된 《제3일》을 속간하여 1981년까지 60호를 발행하면서 조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이 대륙 저 대륙을 오갔다.272) 1974년 11월 23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 국민회의’ 총회에 갔다. 김대중이 워싱턴에 있을 때 ‘한국민주회복통일촉 진국민회의’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일본에도 조직하여 동시에 발족하려는 뜻을 품고 일본에 갔으나, 1974년 8월 8일 동경 프린스 호텔에서 정보부 요원에 의해 납치됐다. 김대중이 없는 상황에서 ‘민통’은 한 개인의 정치운동 지점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범민주국민운동 본거지로 도약하는 길밖에 없었다. 워싱턴 민통본부에서 새 헌장을 통과하고 그 헌장에 따른 기구 개편 총회를 소집했다. 김재준에게는 축사를 부탁했다. 11월 23일 오전 10시에 개회하고 헌장 초안 독회와 각 순서가 진행됐다. 새 헌장에 의해 김재준이 의장이 됐다. 김대중은 명예의장으로 추대됐다.

박정권에 의해 등록 취소된 《제3일》을 해외에서라도 속간해 달라고 동인들이 부탁했다. 이윤구 박사는 《제3일》의 복간이 선생님이 캐나다에서 하실 일이라 생각하여 후원금을 보내왔다.

“문득 제 마음에 목사님께서 하실 일, 하셔야 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3일》의 복간이었습니다. 많지 않은 여비를 좀 떼어 드리면서 용기를 내시도록 해 드렸던 일이 다행이었음을 지금도 느낍니다. 《제3일》은 그 후 여러 차례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받아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북미와 조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고 판단됩니다.”273)

여기저기서 지인들이 후원금을 보내주어 1974년 10월 《제3일》 해외 속간 첫 호를 냈다. 1981년 6월까지 60호를 발간했다. 12월 6일 토요일에는 한신대 동창들을 중심으로 《제3일》 후원회가 결성됐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죽었던 것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다시 부활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의 내일을 위한 십자가의 행진에서 그 현실적인 의미가 체득된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진실한 ‘메시지’며, 그것이 ‘제3일’의 논리이기도 하다. 서구와 북미에서도 이것을 깨닫고 외치는 예언자들이 적지 않다. ‘나라와 의’를 위하여 몸으로 역사를 심는 하나하나의 밀알이 ‘사회화한 교회’의 오늘의 십자가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마치 예수의 부활한 몸, 변화산상에서의 모처럼 바탕에서 변혁된 새 역사가 탄생할 것이다.”274)

김재준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이우정이 뉴욕에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우정은 한국에서 민주운동을 하며 특히 근로여성 지도에 앞장선 지도자였다. 귀국하는 길에 같이 가자고 졸라댔다. 윤보선도 귀국을 기다린다고 전보했다. 김재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자신인들 나가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항복하는 모습이 싫었다.

“국내에서 계속 귀국을 종용해 왔을 때에 종종 착잡한 심경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특히 군사정권이 계속되는 현실에 귀국하는 것은 마치 항복하고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었다.”275)

김재준은 1975년 2월 1일 박정희가 유신헌법에 대한 ‘신임’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소식이 들려 급히 반대성명을 써서 워싱턴에 있는 민통본부에 보냈다. ‘비상사태 선언’ 아래서 국민투표가 무슨 의미냐는 내용을 담았다. 8월 21일 장준하가 삼각산에 등산하다가 실족사한 사건이 보도되었다. 그는 김재준과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에서 같이 활동하며 한국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서 함께 싸웠다. 또한 민주 회복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일으켰던 김재준과는 가까운 제자였다. 그런 그가 죽었다. 아니, 죽임을 당했다. 김재준은 처음부터 박정희의 계획적 살인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뉴 코리아 타임스(New Korea Times)》에 글을 보냈다. 자택연금을 당하면서 외출이 금지된 상태에 식모조차 드나들 때 몸수색을 당하던 처지인데 어떻게 등산을 갈 수 있으며, 실족사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를 폈다. 장준하도 죽으러 가는 줄 알았던지 정보원의 허락을 구해 애국선열들의 묘소에 가서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지사들 묘소 앞에 절하고 갔다고 했다.276)

[각주]

[268] “참여의식”, 『전집』 제14권, 170.
[269] “제3일”, 『전집』 제9권, 289.
[270] 김희헌, 『한국신학의 선구자들』, 149.
[271] 이윤구, “내 혼 속에 오늘도 살아 계신 님”, 『장공이야기』, 212.
[272] 김재준, “제3일의 논리와 역사의 내일”, 『장공김재준논문선집』, (한신대출판부, 2001), 418.
[273] 이상철, “온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사신 분”, 『장공이야기』, 53.
[274] “장준하 피살”, 『전집』 제14권, 226.
[275] 김경재, 『김재준 평전』, 172.
[276] 김재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삶』, 삼민사, 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