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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0905] 말씀을 새긴다 (3) : 집을 떠난 예수

장공전집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5-03 17:04
조회
655

말씀을 새긴다 (3) - 집을 떠난 예수 -

[마태 3:1-17, 마가 1:1-11, 누가 3:1-22, 요한 1:19-28]

- 빈들에 외치는 소리 -

이름을 요한이라 하는 한 野人(야인)이 빈들에서 외친다. 머리칼은 길게 허틀어지고 수염은 가슴까지 덮였다. 눈에서는 불이 튄다. 낙타털로 싼 굵은 천으로 폼을 가리우고 먹는 것은 메뚜기와 석청이라고 했다. 메뚜기가 수없이 몰려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몇 포대씩 긁어 모아 말려두면 꽤 식량이 될 것도 같다. 그가 사해문서에 나타난 엣세네 형제단원 중에 하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까지 엄격한 훈련에 순순히 복종하기에는 그의 사람됨이 너무 야인적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어떤 면으로든 간에 엣세네 그룹의 금욕적인 기풍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도 망발은 아닐 것 같다.

하여튼, 그는 異人(이인)이었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세련된 유약성도 없었다. 그는 ‘文化人’(문화인)이 아니었다. 바리새人(인), 제사장, 군인, 관공리 할 것 없이, 그는 마구 책망했다. 교권자들에게는 “너, 독사의 종류들아!”하고 첫 타개부터 독설이었다. 그러나 바른 소리가 불덩이처럼 튕겨나오는 데는 그들의 권력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신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체면도 예절도 그를 양전하게 길들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으면 “나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다!” 하고 대답한다. 무척 印象的(인상적)인 대답이다. 그렇게까지 방약무인한 거물이었지만 그는 자기 뒤에 오시는 그 어느 한 분 앞에서는 그의 신들메를 풀어드릴 자격도 없노라고 했다.

그는 자기가 그 한 분의 길잡이거나 전령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스스로 담담했다. 그 한 분이 커지고 자기는 쇠해야 한다고 했다.

서열로 말한다면 그가 선배인데도 그는 그렇게 사심이 없었다. 진실로 “女人(여인)에게서 난 자 가운데서는 요한보다 더 큰 人物(인물)이 없다”고 한 예수의 평은 過大(과대)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요단강 계목을 누비며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세례를 받아라. 그래서 이제 오는 그이를 맞이할 준비를 해라” 하는 것이었다.

- 집을 떠난 예수 -

요단 계곡에 메아리치는 요한의 소리는 전 지역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그리로 몰렸다 ‘세례를 받았다.’ 아마도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서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요한의 외치는 소리는 요단 계곡에서 나사렛 동리에까지 울렸다. 이제 하나님의 때가 왔다. 예수의 때가 왔다. 예수는 집을 떠난 요한에게로 가서 “내게도 세례를 주라”고 했다. 요한에게는 놀라운 요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메시아 임직식이니 거부하기에는 너무 두려운 일이었다. 예수는 세례를 받았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하는 聖父(성부)의 선언이 들려왔다. 성령이 형체를 이루어 그에게 임했다. 그는 영의 능력이 무한한 것을 느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나라 임금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마가복음 기록이 제일 권위적이라고 본다. )

前章(전장)에서 우리는 예수의 30세까지의 가정에서의 사생활을 음미했다. 가족이나 친척이나 동리 사람들에게도 아무 특이한 생활기록이 기억되지 않을만큼 평범(?) 했던 예수의 30년 생애였는데 이제 그가 갑자기 이상적인 왕, 메시아의 자리에 취임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그러면 예수가 30 평생에 아무 그런 생각 없이 지내왔을까?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다. 열두 살 때 그가 성전에서 학자들과 놀라운 문답을 했다는 일화 하나만으로도 그의 침묵이 단순한 침묵이었을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에게는 하늘 나라의 꿈이 있고 그것을 역사 속에 具現(구현)하기 위한 배포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꿈과 배포가 큰 것만큼 그의 침묵도 깊었을 것이다. 고기도 송사리떼가 겉층에서 까부는 것이고 큰 고기는 깊은 데 숨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요단계곡을 울리는 요한의 소리는 예수에게 그의 때가 왔다는 것을 고지했다. 그는 집을 떠나 이 소리에 응답했다. 우리에게 가정이 중요하고 대부분의 세월과 노력을 거기에 소모하고서도 아무 유감도 느끼지 않는 이 현실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제일주의가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 큰 召命(소명)이 임할 때에는 가정을 떠나는 것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경험되는 사례들이다.

나라를 위해서 소집영장이 내리면 부모 처지를 뒤에 두고 혼자서 집을 떠나 입영하는 것이다. 예수의 출가는 불교적인 해탈이나 도가적인 초연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장에 대한 應召(응소)의 태도에서였다고 생각된다.

예수의 가정생활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어떤 이는 예수가 왜 결혼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말한다. 건강한 정상적인 남성으로서 30세가 될 때까지 결혼생활을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의 典型(전형)으로서 어딘가 비인간적인 한 면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특히 현대인의 남녀 관계에서 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결혼 관계에 대하여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마태 19:5-6).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너무 엄격한 교훈에 찔려서 “아내에 대한 남자의 경우가 그렇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 19 :10) 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예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모태로부터 결혼 못하도록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이 만들어서 결혼 못하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마태 19:7-12).

여기서 우리는 제3의 경우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기로 한 사람의 조건에서 예수의 결단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수는 무슨 성행위가 더러운 것이라든가, 결혼생활이 거룩하지 못하다든가, 거룩한 사람은 금욕주의적이라야 한다든가 하는, 그런 왜곡된 판단에서 자신의 결혼을 거부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의 말에 의하면 결혼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 질서에 속한 것으로서 그의 직접적인 창조행위의 하나로 되어 있다. 그렇게까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맘대로 나누지 못한다고까지 잘라 말한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남자가 일방적으로 이혼장이란 것을 써서 그 아내에게 내주면 그 여자는 갈데 올 데 없이 쫓겨나고 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여기서 특별히 이혼에 대하여 엄격한 금지령을 내린 것이라는 情況(정황) 참작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또 하나의 바리새적 율법 조문을 만들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한 것도 아닐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원칙은 원칙이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결혼을 직접 결부시킨 것은 그만큼 근본적인 원칙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 자신은 왜 결혼하지 않았는가? 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종말이 올 때까지 수억의 장병을 직접 지휘할 임금으로 최전선에 나갈 사람이니 결혼할 여유가 없었을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결혼한다면 가정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원칙이고 결혼하고서 초긴장 상태에 있는 공생애에 함께 나선다면 진정 예수와 한 몸,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同格同質(동격동질)의 인간이어야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인데 그런 인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을 단념한 사람이’었고 그것이 그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가장 원숙한 결단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그런 결단에 더욱 존경을 느낀다.

이제 때가 와서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그의 사명을 끝냈다. 그의 예수에 대한 기대가 너무 ‘드라마틱’한 것이었기 때문에 후일에 다소 의혹을 느낀 적도 없지 않았으나(마태 11:2-15, 누가 7:18-25) 근본적인 동요가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예수가 세례 받는 순간에 경험한 내용은 아주 상징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째로 “하늘이 갈라졌다. 하늘이 열렸다” 하는 말로 표시되었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닫혀 있던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에게 활짝 열려서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자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우리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되는, ‘하늘이 땅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온’ 놀라운 현상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인간은 신을 찾아 하늘로 올라가려는 방향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거룩하게 되고 신비한 영감을 얻어 구름 위에 安住(안주)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실패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여 “예수를 보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본 것이 되고 예수를 믿으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使者(사자)가 되는 것”을 규정지어졌다.

예수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인데(히브리 2:17, 4:15) ‘죄만 없으셨다’고 했다. 말하자면 타락하지 않은 참인간을 보려면 예수를 보라는 말이다.

참인간인 예수에게 참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신 것이며, 참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둘째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비둘기 같은 형체로…” 라고 했다. 성령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 자신이 영이시니까, 성령이 곧 하나님이신데 특히 하나님의 행동에 관련되어 있다. ‘비둘기’가 무엇을 상징한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으나 흔히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소식을 전달하는 특별한 본능을 가진 새로서 유대인들은 랍비의 영적 상징, 지혜의 상징으로 비둘기를 말하고 있다. 하여튼 이 때에 예수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자기에게 무한정 주어지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라 하겠다. 창조주의 창조능력, 갱신능력이 그의 몸에 격랑처럼 맥박쳐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는 성령이 자기와 일체된 것을 경험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는 참인간으로서 당초부터 ‘죄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전되는 원죄도 없으려면 요셉이란 부계에서 단절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초대교회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원죄는 모계에도 있을 것이므로 이 문제는 시원한 해결을 보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것’이 잉태 당초에 벌써 성령께서 원죄까지 깨끗하게 하는 정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을 의미한 것이고 생리적인 잉태 과정을 말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좀 더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사렛 30년 동안은 성령이 고요한 隱流(은류)같이 그의 생활을 축이고 있었으나 이제 ‘메시아’로서 취임하는 순간, 아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솟구치는 샘물처럼 치솟아 萬丈飛瀑(만장비폭)을 이룰 기세로 예수에게 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성령은 위에서 온 영이라 하겠지만, 언제나 일단 예수의 주체 속에 들어가 예수 자신의 영으로 되어가지고 발현하는 것이요 단순한 외적인 자극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로, 아버지의 증언이 들려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마태에는 이는 내…로 되어 있다. 시편 2:7). 시편 제2편은 메시아시로 유명하다. 왕의 대관식에 쓴 詩(시)라 하지만, 이상왕인 메시아에 대한 시로 인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귀절은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임직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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