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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의 글

[범용기 제4권] (97) 野花園餘錄(其四) - 杏花春(행화춘)

범용기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9-27 09:29
조회
576

[범용기 제4권] (97) 野花園餘錄(其四) - 杏花春(행화춘)

내가 열 살도 채 못됐을 때 얘기니까 20세기 초였을 것이다. 우리집에는 도시락용 작고 납작한 세류광우리 종류가 많았다. 먼데 모신 선산에 제사드리러 갈 때에는 여러 가지 제물을 그 세류로 엮은 도시락 상자에 한가지씩 따로 따로 넣어 장정들이 지고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집 도시락 상자에는 반드시 ‘杏花春’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살구꽃 봄’이라 이름치고는 근사하다. 나는 하루 어머니께 杏花春의 의미를 물었다.

“그건 네 ‘어머니’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몸종의 호명이란다”, “열 두어살 된 귀엽고 예쁜 아이였다.”

“지금 어디 있어요?”

“종 놓아주라는 법이 생기자마자 백리밖 바닷가 ‘굴개’라는 데 사는 튼튼하고 믿음직한 총각 하나 얻어 짝지어 주고, 많지는 못해도 혼수와 살림살이를 갖춰 주었는데 소문대로는 거기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산다더라.”

* * *

내가 열 한 살쯤 됐을 때, 어느 날, 의젓한 젊은 부부가 어린 아들 딸 데리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아버님과 형님은 어디론가 출타하시고 어머니만 집에 계셨다. ‘손님’은 아이들까지 어머니께 큰 절을 하고 진짜 어머니 뵙듯 공손하게 그리고 반갑게 모신다. 그 동안에 살림늘리던 얘기도 듣기에 지루하지 않았다.

그들은 “굴포에서 소금구이로 살아가다가 암만해도 시덥잖아서 언덕바지를 갈아 밭을 만들고 콩, 감자, 옥수수, 조, 팥 등 곡식을 심었더니 샛바람이 불어도 일년 식량은 거기서 나오고, 바닷고기로 아쉬운 줄 모르고 살니답쇼 …… 모두 인자하신 상전님 덕택이와요!” 한다. 녹음한 것이 아니니까 ‘뜻으로 본’ 그들의 대화였다. 그게 杏花春(행화춘) 가족이었다

* * *

내가 20대 청년으로 공부 때문에 대여섯 번 그 지방에 들린 일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杏花春이란 이름이 떠 올라서 적잖이 ‘센티’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부러 찾아볼 용기는 없었고 용기가 있다해도 찾을 단서가 없었다. ‘일제’가 호적 만들 때에 ‘성’과 ‘이름’을 지었을텐데 그 ‘창씨작명’이 무언지를 나는 모른다.

어쨌든, 인간이 ‘해방’된다는 것은 그에게 ‘인간됨’을 되찾게 하는 신적(神的)인 성업(聖業)이다.

그리고 그가 자기 재주껏 뭔가를 창조하는 ‘창조주의 형상’을 자랑스럽게 빛내는 첫 날이라 하겠다. 그 반면에 어떤 훌륭한 명목 밑에서라도 ‘인간압박’과 ‘자유박탈’은 ‘악마적’이다. ‘Devilish’란 용어가 과잉 표현이라면 Demonish Power라고는 일컬을 밖에 없겠다. 떳떳한 ‘자유시민’을 종살이하는 ‘杏花春’으로 짓누른다는 것은 ‘악마’의 그것만으로 족하다.

[198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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