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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평범한 것을 귀하게 여기신 분'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7-10-27 09:45
조회
533

인터넷을 다니다 보면, 가끔 장공 김재준 목사님과 관련해서 소개한 글들을 발견합니다. 범용기의 '야화원여록'을 정리하다가, 인터넷에서 우연하게 발견한 '살림공동체'(http://salimcom.org)라는 홈페이지에서 관리자 되시는 분이 2011년 Good Neighbors 본부 직원들과 드린 예배에서 했던 설교 중, '장공 김재준 목사님'에 대해서 길게 언급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살림공동체 홈페이지에 메일로 양해를 구하고 그 설교문의 일부를 복사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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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長空) 김재준 목사님을 아시는지? 교계의 큰 별 같은 분이셨는데, 고 한경직 목사님의 당대로 그만큼 존경받으실 만한데 그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사후에 그의 저작이 고급 장정으로 제본되어 장공전집으로 나온 줄은 알지만,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어른이 캐나다에서 망명생활처럼 머무르실 때에도 부지런히 쓰는 작업을 계속하셨고, 동네 한인 인쇄소에서 조잡한 제본으로 책이 몇 권 나왔는데, 그게 ‘범용기(凡庸記)’라는 연작입니다.


‘범용’이 뭐겠어요? “그렇고 그런, 평범하고 용렬한, 뛰어날 게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책의 내용을 보면 정말 그래요. 뭐 신통한 게 없습니다. 그냥 신변잡기를 용케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적어 놓았어요. ‘야화원 여록’(野花園餘錄)이라는 칸을 따로 만들어서 그날그날 일어난 일들을 다 챙겨두었고요. 야화원은 ‘들꽃 마당’이란 뜻이고, ‘여록’은 ‘가외로 붙인 글’이란 뜻이니까, 모아는 두었지만 들여다보지 않아도 될 것, 시간 없으면 굳이 듣지 않아도 될 얘기로 받으면 되겠는데, 그럴 거라면 뭣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 “아니, 대학자이신데, 무슨 학문적 업적을 정리하시던가, 또, 민주 투사이신데, 역사에 남을만한 무슨 선언서 같은 걸 쓰시던가, 또, 목사이신데, 설교집 같은 거나 내시지, 어느 노인 칠순 잔치에 간 얘기, 손자에게 피자 사준 얘기, 감기 들어 불편하다는 얘기... 그런 걸 활자화한담?” 그런 마음이 들었거든요.


그러면, 그분 자신의 입으로 하는 범용한 기록이나마 써낸 데에 대한 그분의 ‘이유’를 들어봅시다. “첫째는, ...‘생각’보다도 ‘삶 자체’를 써 보는 것이다. ‘위인’이 아니라도 ‘삶’은 그 어느 인간에게나 있었고 또 그 삶은 그의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특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게 눈을 주셔서 저 푸른 하늘, 흰 구름, 해와 달, 별과 모래, 산과 들, 바다와 강- 이 ‘에덴의 동산’을 보게 하시고 그 안에서 보고라도 하고 싶어진 것이라 하겠다. 둘째로는 이 ‘몸’이 시간의 물결에 긁히고 갈키고 ‘기억’의 ‘정기’가 추운 날 체온처럼 창틈으로 새어 빠지기 전에 종이조각에라도 붙잡아두고 싶은 욕심에서다... ‘개가 바위에 갔다온 것 같다’는 속담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것 때문이겠다.”


인용이 길어졌네요. 그분이 위인인 것은 위대한 점이 많아서가 아니고, 평범한 것들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생각, 뒤늦은 깨우침이네요.


내친 김에 장공 얘기를 좀 더 하지요. 한국에서 군부 독재 정권이 물러나고 그분이 한국에 들어가셨는데, 노약하셔서 특별히 하실 일도 없고 그랬겠지요. 일과라고는 한자 성경을 써내려 가시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사무엘하 16장 14절까지 써놓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마지막 구절이 뭐였기에?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큰 분을 옆에서 모시면서 가르침도 받고 그랬어야 하는데, 한 도시에서 몇 년 같이 지냈지만, 그 때 내 눈이 뼜지, 그렇게 ‘큰 분’인지 몰랐어요. 아까 언급한 그 ‘범용기’를 제게 주실 때에 몇 자 적으셨습니다. “김낙중 목사 하청등청(河淸燈晴)”이라고. 강처럼 맑고 등처럼 밝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강이라고 다 맑을 것도 아니고, 그래서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말도 생겼겠네요. 그리고, 등불이 밝으려면 심지가 깨끗해야 하는데, 어, 그것도 자신 없네요.


그러셨잖아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라고. ‘꺼져 가는’이라고 옮겼지만, 원문에 보다 충실하자면 ‘끄름만 내는’이라고 해야 되겠습니다. 심지가 불꽃만 내면 좋겠는데 연기까지 내니 밝지가 않습니다. 불꽃이 ‘은혜’라면 연기는 ‘본성’입니다. 은혜보다 본성이 강하다면, 그것은 끄름만 내는 심지 같은 것인데, 주님께서 그런 심지를 비벼 끄지 않으시는 것처럼 본성에 따라 사는 부패한 삶을 거기에 같이 있는 미미한 불같은 은혜로 인하여 꺼지지 않도록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까지 그렇게 살아왔다고 고백하기가 어려워서 이만큼 얘기가 돌고 돌아 길어진 모양입니다.


그래요, "내 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보니"  불꽃과 함께 끄름도 있었구나. 뭐, 당신도 그렇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