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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및 강연

[4월 5일 신대원 목요강좌]

작성자
장공
작성일
2018-04-12 10:19
조회
2655

[한신신학의 광맥 제1강]


장공 김재준의 신학과 사상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교수)

[김주한 원장 인사말]

장공기념사업회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이 함께 협력해서 이번에 목요강좌 첫 번째 시간을 꾸몄습니다. 교단 안팎에서도 관심이 있고 해서 이번에 목요강좌를 통해서 ‘한신신학의 광맥’에 대한 물줄기가 크게 그려질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는 외부에서 참여해주신 분들을 잠깐 소개하고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현재 장공기념사업회 이사장이시고 KBS 이사장이신 우리 김상근 목사님 일부러 강의를 들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장공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이신 이기영 목사님도 오셨습니다.

총 8회 동안 이번학기 목요강좌가 참으로 의미있고 풍성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매주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전철 교학부장 인사말]

안녕하세요. 이번 목요강좌에서 저희가 같이 심화하고 싶은 주제는 ‘한신신학의 광맥’입니다. 오늘 첫 시간으로서 저희들의 스승님이신 장공 김재준 목사님에 대한 말씀을 김경재 명예교수님께서 진행하시겠습니다. 교수님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 두 가지 정도 하겠습니다. 30여년동안 우리 후학을 위해서 한신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문화신학을 가르치셨고, 그 이후에도 다양한 학문적인 사회적인 봉사를 많이 하시고 장공기념사업회 중책도 많이 수행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혼을 김경재 선생님을 통하여서 느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1시부터 2시까지 말씀을 듣고 2시부터 2시 20분까지 여러분들의 질문 토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왜 장공의 신학은 낡아지지 않고 항상 우리를 앞서가는가?

안녕하세요. 아마 지난번 수련회 때 한번 보시고,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학교 은퇴한 지 벌써 13년이 되어서 캠퍼스에서 자주 만나기가 어려울 겁니다. 제가 김경재올시다. 오늘 이 첫 강좌 주제인 장공에 관해서는 우리 총장 연규홍 교수, 원장 우리 김주한 박사, 많은 적절한 분이 계시는데 왜 이 늙은이를 불렀을까? 이유가 두 가지가 아닌가 싶어요. 지금 살아계시는 70대 이상 되시는 여러분의 선배 중에서 직접 장공의 체취를 맛보고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보다 생생한, 싱싱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이유가 제일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관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장공(1901~1987년)이 여러분에게는 까마득한 할아버지 같은 생각이 드실 건데요, 여하튼 지난 세기의 인물이고, 우리 한국 교회사나 우리 교단사에 있어서도 오래된 인물인데, 지나면 지날수록 장공은 늘 새로워요, 낡아지지가 않아요. 우리가 ‘젊어서 젊은 생각을 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보면, 장공은 늘 생각이 젊어요. 저만치 늘 앞서가서 늘 새롭고, 젊고, 낡아지지 않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려운 무슨 각주를 단 논문은 쓰지 않는 세대였지만 가만히 보면 그 글이 늘 그렇게 새로워요. 왜 그럴까? 장공은 왜 낡아지지 않고 새롭고 늘 우리를 앞서가시는가?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80세 가까이 되면 세상의 구체적인 정치, 야당이 어쩌고 여당이 어쩌고, 정권싸움 하는 것(관심이 없는 것이거나 무가치하다는 생각은 아니지만)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가고 싶어요. 구체적인 특별히 정치현실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좀 더 뭐랄까, 인간과 역사의 본질적인 문제, 우리식으로 말하면, 영원, 시간을 넘어선 영원의 문제에 마지막 관심을 더 쏟고 그것을 정리하는 것이 특히 종교 지도자, 신학자로서는 당연지사로 보이는데, 장공은 돌아가시기 바로 그 며칠 전까지도 정치문제, 함옹(함석헌)과 함께 한국 국민들에게 당부하는 간절한 글을 쓰고 가셨어요. 왜 그럴까? 내가 알기로는 전혀 정치적인 그런 야망이나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닌데 왜 정치현실을 놓지 않으셨을까? 그것이 두 번째 문제에요.

셋째는, 여러분이 ‘장공’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어느 정도 장공에 대한 이미지는 갖고 있을 것인데, 구체적으로 장공 사상과 신학을 말하라고 물어보면 ‘이거다’ 하고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장공 사상의 ‘핵’이라고 할까? 장공의 90평생 동안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아니하는 그런 어떤 핵심, 음악으로 말하면 주악상(leit-motif) 같은 것이 있을까? 있으면 그것이 뭘까? 나는 있다고 보거든요.

이 세 가지를 풀어보려고 늙은 사람이 여러분 앞에 앉았습니다.

[1] 들어가는 말 : 장공 김재준(1901-1987)의 삶과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 고려할 사항

우선 장공의 삶과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몇 가지를 꼭 고려해야 해요. ① 그의 가정환경과 자연환경, ② 그리고 그가 기독교신앙에 입문했을 때의 그 어떤 신앙 체험, ③ 그리고 일제 식민체제의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 ④ 그리고 6.25 동란을 정점으로 하면, 민족동족상쟁의 상황 속에서 교단의 분열과 이단 정죄를 받는 시련의 그분의 아픔의 역사, ⑤ 그리고 아마 여러분 마음속에 장공은 민주화 인권운동의 대부로서 이해될 것인데 그건 주로 1960년대 이후 4ㆍ19, 5ㆍ16 그 이후 군부독재와 연관이 되는 데 그때 장공의 신학적, 신앙적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왜 그랬을까? ⑥ 마지막에는 이제 10여년 그것을 다 마무리하면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화두를 많이 말씀하셨는데 왜 그랬을까? 이런 어떤 중요한 관심을 먼저 고려해야 장공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선 저는 장공의 생을 다섯 단계로 나눠봤어요.

[2] 장공의 삶의 기간에서 5단계로 나누어 본 장공신학과 삶의 맥집기

제1기 – 자연의 아들(1901-1920) : 유교의 인의(仁義), 실학적 유학정신, 노장적(老莊的) 무위자연(無爲自然), 함북과 북간도 지역의 정치ㆍ경제ㆍ문화적 특수성

첫째, 제1기는 1901년에서 20년까지 그가 고향을 떠날 때까지의 시기로 ‘자연의 아들’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시기의 주제는 유교가 말하는 인의(仁義), 실학적 유학정신, 그러면서 노장적(老莊的)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그런 기질과 풍토, 특별히 장공의 소년 시절에 함경북도와 북간도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적 특수성…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봐야 장공을 오해하지 않고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유가의 가정에서 아버지가 서당 선생이었으니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사서(논어ㆍ맹자ㆍ대학ㆍ중용) 삼경(시경ㆍ서경ㆍ역경), 이런 유교 경전을 철저히 공부를 했어요. 한문에 능통하셨어요. 그 중에서 특히 장공의 붓글씨를 보면 논어, 맹자에서 많이 나오는데, 유교 사상이 뭐냐?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줄이면, 공자에서는 ‘인’(仁), 어질 인이라고도 하지만 크게 보면 기독교의 사랑(愛)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맹자는 선생인 공자가 인효(仁孝)를 강조했다면, 맹자는 그것을 이어받아서 하나를 더 강조해요. 그것이 의(義)라는 것, 우리식으로 말하면 ‘정의’죠. 맹자의 맨 처음에 보면 <양혜왕편>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당시 지식인들이 열국의 군주들을 순방하면서 시대의 경륜을 펴가는 멘토로서 만나는데, 양혜왕이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부국강병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유익한 묘책을 말해주시오’ 물어볼 때, 맹자가 ‘왜 자꾸 이(利)를 말하느냐, 왜 그렇게 요즘으로 말하면 정치, 경제, 특히 경제, 군사의 발전과 발달에만 관심을 갖느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義)다.’ 그런 말을 하거든요. 그래서 장공은 공자의 인의 사상과 맹자의 인의의 영향을 소년 시절부터 받았다고 볼 수 있어요. 뒤에 장공이 민주화 운동을 펼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앙을 뿌리로 하지만 벌써 유교사상 속에 맹자의 방벌사상(放伐思想)이라는 것이 있어요. 비록 고대 사회였지만 가령 진시황 같은 아주 폭군이 백성과 국민들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하면 ‘이미 왕이 아니야! 그런 놈은 이제 축출해서 쫓아내버리든지 죽여도 괜찮아!’ 고대 사회에서 그런 혁명 사상을 맹자가 이미 이야기했어요. 장공은 일찍부터 유교를 바르게 이해했단 말이예요.

장공은 어머니 모친(채성녀)을 통해서 실학의 정신을 체득해요. 후기 조선조에 유교가 점점 낡아빠져서 양반들의 공리공담의 치우치자, 실학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 실학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요즘으로 말하면 그 시대의 깨어있는 지성인들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정권에 의해서 유배되고 박해를 받지요. 그래서 북간도 쪽으로 유배를 간 실학의 거두 박제가의 제자중 한 사람이 채향곡이라는 분이고, 그 분의 후손인 채동순 씨의 셋째 따님이 장공의 어머니인 채성녀였어요. 장공의 어머니는 할아버지로부터 실학정신을 받아요. 그 어머니가 “실학정신은 이런 거다.” 이렇게 이론으로 말로 했었겠어요? 그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일거수일투족, 밥을 짓고, 어린애가 기르고 옷을 입고 자리에 앉고 잠자고 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허례허식같은 것을 배제하고 실질을 숭상하고 성실할 것… 소위 실학정신, 실사구시 이용후생, 구체적인 삶을 위한 철학이고, 사상이거든요. 그래서 장공은 일찍부터 실학사상과 실학정신을 어머니를 통해서 몸에 체득을 한다는 것도 중요해요. 뒤에 장공도 자기 일생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한 여러 가지 신학적인 발언들에 이름을 붙이면 ‘생활신앙’, 혹은 ‘생활신학’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실학을 잠깐 언급하잖아요. 그것은 그러므로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고 사실에 가깝습니다.

그 다음에 장공이 이제 자란 곳이 어디냐면 요즘으로 말하면 저 유명한 아오지 탄광이에요. 함경북도 경원 근방의 산속 깊은 백두대간, 깊은 산골 고원지대에서 자랐어요. 그의 할아버지 조부들은 논밭 수 천평 물려받은 그런 부호의 아들 딸이 아니라 산속에 있는 그 땅을 개간한 쉽게 말해서 화전민의 후예야. 그래서 대자연에 소탈하고 검박하고, 대자연에 유유자적하고, 꾸밈없는 자연스러움, 그러면서 바람, 달, 하늘, 별 등등을 늘 보는 풍월과 시심이 자연스럽게 몸에 베면서 장공이라는 인물이, 그 품성이 형성되어요. 그래서 장공의 글을 보면, 문필가였고 시심이 늘 충만했어요. ‘시심’(詩心), 꼭 뭐 직접적으로 시를 작시하거나 지은 문학적인 능력을 말하기보다, 어떤 시적인 감수성이죠. 생명과 삶과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시인의 본질인데, 장공은 ‘시심을 잃어버린 목사는 목사 자격이 없다!’ 늘 그렇게 말을 했어요.

장공은 그의 7, 80년대 신앙과 시대의 멘토로서 활약했는데, 동지였던 함석헌 옹에 비하면 아주 늦은 사람이예요. 함석헌은 열아홉 살에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었을 때, 민족의식이 뚜렷해서 평양에서 평양고보를 다니면서 태극기 만들고, 독립선언서 만들고 그의 고백대로 말하면 아침부터 저녁 밤늦게까지 미친 듯이 평양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던 인물이예요. 현실에 일찍 눈떴다 그 말이예요. 그런데 장공은 뭐했냐 하면 20살 때까지는 산속에서 농업학교 졸업하고 일본 말단 관리, 요새 말하면 주초, 세금 징수 관련의 사무직원에 불과했어요. 그렇게 늦깎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독립운동가가 보따리 싸고 만주로 간도로 독립운동 하러가는 모습도 보면서, 맘속에 느끼는 것이 없지는 않았겠죠. 그러나 굉장히 늦었다 그 말이예요. 그러면서 대기만성형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함경북도와 북간도 자체가 역사적으로 조선 시대에 늘 소외되던 지역이고, 정치인들 유배지역이고, 그렇지 않아요? 그 대신 그쪽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정신이 투철했어요. 개척정신이 투철했어요. 장공의 사상 속에는 자연히 개척정신과 자유정신이 뿌리박고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가 모처럼 평양에서 직업을 하나 얻어가지고 부모님 모시고 살만할 때, 교장이 신사참배를 은근히 학생들에게 강요하라고 할 때, 장공은 뭐 목숨을 내걸고 일본 정치, 식민정책과 대결하는 그런 무사는 아니지만, 조용히 사표를 내버려요. 그리고 직장을 잃어버렸을 때, 캐나다 선교부쪽에서 좋은 지도교사를 하나 구해야겠는데 사람 없느냐? 그때 마침 장공하고 인연이 닿아서, 여러분이 잘 아는 간도 용정중학교 교유, 요즘 말하면 교사와 교목역할을 해요. 이때 우리가 잘 아는 강원용, 안병무, 이상철… 70년대 80년대 한국사를 뒤흔드는 인물들을 길러내는 교사가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가 대기만성으로서 꽃 피울 수 있는 그 과정 속에 캐나다 선교사들과의 접촉, 이것이 중요해요. 캐나다 선교부는 한국에 온 여러 선교단 중에서 가장 리버럴하고 개방적이었고, 자기들의 선교 행위가 조선이나 제3세계의 후견인 노릇 하면서 권위부리고 그런 것이 전혀 없었어요. 겸손하게 동역자 정신으로 봉사하고 또 민족 독립 운동에 음으로 양으로 적극적으로 지원과 후원을 했어요. 그런 열리고 개방적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선교사들을 만나고 사귀었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장공이 꽃 피울 수 없었고, 사실 기장이 탄생하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지금 여러분이 허물어버린 옛날 건물, 그 건물을 건축할 때 캐나다 선교부에서 당시에 건축비로 10만불인가를 보내줘서 지은 건물이었어요. 한국의 여러 교파 싸움 분열싸움 속에서 캐나다 선교부의 지도자들이 가만히 본거지요. 인물다운 인물이 누굴까? 믿을만한 사람이 누굴까? 내노라하는 엉터리들이 많이 있었는데, ‘장공 김재준이라는 이 과묵한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기독교에 미래가 있다.’ 이렇게 판단한 캐나다 선교부의 지도력,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됩니다. 기장과 캐나다 선교부는 서로 협력교단으로 지금도 관련을 맺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그들에게부터 받은 보은과 은혜에 백분의 일도 못 갚은 것 같아요. 지난 번 신앙수련회 때 와서도 내가 이야기했지만, 우리 기장 교단, 한신도 마찬가지야. 은혜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를 잘 할 줄 몰라. 반성해야 하고, 앞으로라도 여러분이 캐나다 선교부와의 인연 관계부터 도탑게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제2기 -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중생체험 새사람(1920-1940) : 송창근 학형 인도와 권고를 받고 상경(1920), 김익두 목사 부흥사경회에서 중생체험,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신비’(mysticism in Christ)에 사로잡힘(重生-稱義-聖化-榮光), 성 프란시스의 <청빈의 영성>에 몰두함.

이제 스무 살 이후 장공은 ‘송창근’이라는 신앙의 학형을 만나고, 서울로 올라와서 김익두 목사의 부흥사경회에서 중생을 체험하고 딴 사람이 되죠? 아주 중요한 시기인데, 그때부터 시작해서 조선신학교가 시작할 때까지인 1940년까지의 20년을 제2기로 잡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크게 보면, 사도 바울의 소위 ‘그리스도 안에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보라 옛 것이 아니고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mysticism in Christ’라고 하지 않아요? 그것을 이해해야 장공을 이해할 수 있어요. ‘장공이 사회 참여를 했다’, ‘역사 참여를 했다’ 그건 껍데기고, 그것을 하게 된 그 밑바닥에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신비 체험, 그 속에 보면 중생(重生), 기독교가 말하는 ‘의롭다 함을 입는다’(稱義), 성화(聖化), 영화(榮化), 이런 것들이 다 들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시절에 장공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 성 프란시스의 청빈의 영성이예요. 장공의 신학과 신앙을 바깥에서 보면, 대단히 지성적인, 지식신학, 교육, 윤리적, 지식의 기독교에 선비같이 보이지만, 그 깊이에는 (지성이 중요하고 지식이 중요하지만) 성령의 감화, 내주체험이 있어요.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동행 체험이 있어요. 우리가 알면 알수록 장공은 ‘성령론적 인간혁명’의 신학자올시다. 성령론이 뭐 교회 안에서 부흥사경회만 하는 성령론이 아니예요. 장공의 그 유명한 자기 고백이 있지 않아요? “교실에서 탈락한 자기가 교회에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장공을 이해하려면,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비주의와 프란시스 성인의 청빈 영성을 이해를 해야 해요.

그리고 일제 시대의 그 험악한 어려운 시절에, 아까 이야기했듯이 평양의 직장에서 사표를 내던져버리고 용정에 갈 때까지 장공은 순교자들의 연구에 집중을 해요. 소위 ‘순교자열전’을 번역도 하고 쓰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자료로 남아있지 않아서 유감이지만, 장공은 삶 속에서 고백으로 그것(순교자들의 신앙)을 말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늘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시시한 것이 아니라 ‘비범한 일이다’, ‘놀라운 일이다’라고 강조해요. 신앙인의 비범성을 그가 몸으로 체험했고, 증언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러면서도 그 비범성이 무슨 영웅적인 그런 돌출 행위를 능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아까 말한 것처럼 프란시스의 그 깊은 사랑과 자기 비움과 헌신과 그리스도와의 일치, 청빈의 영성에 바탕을 둔 것이예요.

장공은 어디에서 그런 말을 직접 해요. 중세기의 경건 신앙 중에는 여러 성자들이나 유명한 교회의 ‘무엇’을, 하나님도 계시고, 성령도 계시지만 우리들이 인식하기에는 너무나 멀리있는 것 같고 크니까, 피부와 와 닿지 않으니까, 구체적으로 가정에 신앙 교육을 위해, 자기를 위해 수호성자를 한 분씩 모시는 그런 영성 훈련과정이 있었고, 그런 풍습이 있지 않았어요? 그런 것을 배경으로 하는 말이지만, 장공은 프란시스코를 자기의 수호성인과 같은 격에까지 올려놓으세요. 그렇기 때문에 저 뒤에 이기영 목사가 같이 참석하고 계시는데, 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이기도 하시지만, 프란시스코의 영성과 동방정교회의 영성을 많이 강조해요. 프란시스코와 동방정교회의 영성은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영성의 맨 밑바닥에 놓여있는 보이지 않는 영적 저수지예요. 이것을 잊어버리면, 소위 말하는 사회참여라고 하는 것이, 깊이와 높이와 영적인 메마르지 않는 명맥을 놓쳐버려요.

거듭 말하지만 비범성에 대해서는 장공의 좌우명 속에 이런 말이 있어요. “버려진 물건, 버려진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건져 쓰면서,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것을 기르면 큰 거목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마치 생명의 배아를 지닌 도토리가 계곡에 뒹굴러도 큰 상수리나무가 되는 꿈을 그 속에 꾸고 있다는 표현으로 설명해요. 장공 제자들 중에서는, 제자가 되기 전에는 세상적으로 말하면, 이 김경재를 비롯해서 비실비실한 사람이 많아요. 성격적으로 그렇고, 장애인도 있고, 소위 사회적인 탈락자들이 많아요. 그런데 장공의 손에서 교육을 받으면, 그 속에 잠들어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되살아나고 꽃이 피어나요. 그것은 기독교 복음이 가지고 있는 비범성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여러분이 오늘 꼭 기억하고 갔으면 좋겠다는 것은, 장공이나 함석헌처럼 위대한 사람의 삶과 사상 속에는, 겉으로 보면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성격이 상호 공존하고 있어요. 무슨 말이냐? 사람이 구체적으로 자상하면 큰 것을 생각하기 어려워요. 역사네, 나라네, 집안 살림 걱정하는 사람이 그런 것까지 하겠어요? 그런데 이런 위대한(큰) 사람은 지극히 작은 일에 섬세하면서도 큰 주제를 잡아요. 아주 조용하면서도 굉장히 격렬해요. 동중정(動中靜), 정중동(靜中動), 움직이는 것 속에 늘 고요함이 있고(動中靜), 고요함 속에 사실 깊이 보면, 펄펄 끓는 화산과 뜨거운 물이 있어요(靜中動). 그런 그 서로 역설적인 두 성격을 동시에 살아내시는 분들이 큰 인물들이더라고요.

장공의 겉 모습은, 벙거지 모자 하나 딱 씌우고 종로 5가에 앉혀놓으면 군고구마 장사하고 똑같아요. 외모가 출중하거나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장공이라는 아호처럼 온 우주를 가슴에 품고도 남아서 헐렁헐렁하거든요. 그러면서 무슨 놀라운 말을 하나면, 십자가 신앙이라는 것이 뭐냐? 우리가 다 십자가 믿고 이 학교에 찾아왔고, 인생에 이 길 저길 다 있고, 요즘 목사 되는 것을 우습게 아는 세상에 그래도 이길 왔다고 생각해봐요. 나는 신학교 온 여기 신학도들,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손길이 있어서 왔다고 보는 사람이예요. 내가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 십자가 신앙이 올바르게 체득이 되면, 올바르게 실행이 되면, 올바르게 육화가 되면, 거기에는 어느 곳이든지, 언제든지, 인간이 혁명되고, 사회가 혁명되고, 종교가 혁명된다. 이 때 말하는 종교는 기독교라는 종교까지 포함해서예요. ‘인간혁명’, ‘사회혁명’, ‘종교혁명’, 그것을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다시 불을 질러 일으킨 속에 십자가의 능력이 있고 권위가 있고 비밀이 있다. 거꾸로 말하면 그것(인간혁명, 사회혁명, 종교혁명)이 중단된, 기독교, 십자가 신앙? 이건 주술적인 주물이 되어버려요. 종교사업체가 되어버려요. 겉으로는 뭔가 되는 것 같고, 수백만명이 모여서 득시글거려도 아무것도 아냐. 말이야 바른 말이지 독일의 히틀러가 집권해서 세상을 그렇게 시끄럽게 하고 육백만명을 죽일 때, 독일의 크리스챤 수가 적어서 그랬습니까? 99.9%가 크리스챤이었어요. 여하튼 이 말 기억해 두세요.

제3기 - 한국교회사에서 참된 종교개혁자로서의 활동기(1940-1960) : 성경과 종교개혁가들의 정신 ‘프로테스탄트 원리’(protestant principle)에 굳게 서서 한국교회의 경직화된 교권주의, ‘경건한 기만’으로 포장된 ‘성경문자무오설’(성경문자영감설), 선교사들의 조선교회 후견인듯한 신학교육의 식민지성을 무너뜨리고 <복음의 자유, 학문연구와 비판적 지성의 확보, 바리새주의적 교권주의 비판> 운동을 통하여 ‘신앙의 자유’를 확보한 한국교회사에서 참된 종교개혁자로서 활동기.

제3기로 갑니다. 이 시기에는 장공이 조선신학교 설립에 관여를 하면서, 4ㆍ19가 일어날 때까지예요. 성경과 종교개혁가들의 정신인 ‘프로테스탄트 원리’에 굳게 서서 당시 한국교회의 경직화된 교권주의, ‘경건한 기만’으로 포장된 ‘성경문자무오설’(성경문자영감설), 그리고 선교사들이 마치 야만인 조선인을 길러준 후견인이나 된 것처럼 신학교육을 자기들이 독점하고 식민지적 신학교육 수준에 우리를 머무르게 하려고 하는 그런 것에 저항을 하면서 복음의 자유, 학문연구의 비전, 지성의 확보, 바리새주의적 교권주의 비판 운동을 했어요. 그런 것을 통해서 한마디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한 한국교회사에서 진정한 참된 종교개혁자였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프로테스탄트 원리’라는 말을 썼는데,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을꺼에요. 이것은 폴 틸리히가 많이 강조했던 말인데, 종교개혁자들의 그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핵심원리는, ① 첫째, 인간과 역사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하나님만이 절대적 주권자다. 거룩한 절대자는 그분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외의 어떤 형태의 우상숭배, 우상적 권위, 그런 위치,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있으면 박치기 하면서 대들어서 다 프로테스트(저항)하는 거예요. 무엇에 대해서 프로테스트(저항)하냐? 하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핑계는 거기다 대고, 종교가 우상화되고, 교회가 우상화되고, 총회가 우상화되고, 교단이 우상화되고, 성직질서가 우상화되고, 성경책이 우상화되는, 그런 것에 프로테스트(저항)하는 거야! 프로테스탄트라는 것은 바로 그런 거예요. 그래야 인간의 자유가 확보가 되니까. ② 좀 소극적으로 말하면, ‘인간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형태의 인간적 공로나 업적이 필요 없다.’ 소위 말하면 ‘신인협동설’(神人協力說, Synergism)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절반하고, 하나님이 절반하고, 은혜가 절반하고 공로가 절반하고, 절반씩 절반씩 해서 100프로다.’ 이것이 그럴듯한 ‘신인협동설’인데,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을 거절했어요. 구원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신 그 은총의 초청을 받아들이는 ‘은총에 의한 믿음을 통한 구원’, 우리가 믿음으로 믿음에 의한 구원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이것이 오해를 하다보니까, 믿음이 또 하나의 공로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폴 틸리히는 표현을 조금 바꿨어요. “salvation by grace through faith.” 구원은 은총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받는 거예요. 그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야. 그래서 ‘salvation by faith’ 하면 오해하기 쉬우니까 표현을 바꿨어요. 중세기는 이런 저런 공로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을 루터나 칼빈이 부정하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하니까 어떤 오해가 500년 동안 생겼냐면, 이러저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설, 재림 등 소위 여러 가지 중요한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이거나 수락하는 것을 믿음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었어요. 믿음이 또 하나의 공로가 되어 버렸어요. 그런 것은 프로테스탄트 원리가 아니예요. 프로테스탄트의 두 큰 선생은 루터와 칼빈 아니에요? 루터의 작은 책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고 칼빈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 이것을 이어받는 것이예요. 그런데 장공은 종교개혁을 전공하지 않았고, 구약(예언)을 전공했어요. 그러나 그러나 가장 또렷하게 종교개혁의 정신을 몸으로 체득하고 계신 분이었어요. 그걸 보려면 그가 남긴 <그리스도인의 건국 이념>(1945)을 읽어보아야 해요. 당시 1945년 해방정국에서 아무도 남한도 북한도 정부가 안 설 때에요. 어떤 정치가나 정치학 교수가 쓰기 전에 ‘건국을 어떤 비전 아래에서 어떤 이념 아래에서 해야 할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의 지성인으로서 그가 마흔 살에 쓴 논문인데, 여러분은 반드시 읽어야 해요. 그리고 그가 파문당한 시련 기간에 쓴 <편지를 대신하여>(1948), <복음의 자유를 확보하라>(1950), 이런 것 속에 그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구절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그 다음에는 이제 조선신학교 설립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노석 김대현 장로, 여러분이 캠퍼스에 살면서 저 백석관 구석에 있는 노석공원, 아직도 방문도 안한 사람 많이 있을 거야. 회개하고 3일 안에 꼭 방문하세요. 거기에는 시신이 묻혀있는 것이 아니에요. 한 10년 전에 학교가 늦게 회개해서 그 설립자 김대현 장로하고 두 아드님의 기념비를 세운 거예요. 특히 노석 김대현 장로를 위해 세운 기념비의 비문을 직접 장공이 쓰셨어요. 내용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한번 읽어보세요. 캠퍼스에서 3년 살아도 장공 정신을 체득 못하면, 헛것 사는 거예요.

김대현 장로의 ‘서울로 오라’는 소명에 대해, 당시 송창근 목사는 일제 시대 독립운동하다가 요주의 시찰 인물이 되어 있어서 장공에게 SOS를 친 거예요. ‘장공 빨리 와서 일을 해라.’ 그래서 조선신학원 설립 과정에서 장공이 파문을 당하는데, 그것이 한국교회사와 사상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느냐? 단순히 교회사 책을 보면, 한국교회들이 여러 가지 교파 분열하는데 그런 것 중에 하나로 봐서는 안 됩니다. 다른 교파분열하고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어요. 우리가 분열한 것은 아니죠. 우리를 쫓아내고, (우리가) 파문을 당해서, 쫓겨나고 상처난 목사들과 뜻있는 분들이 새롭게 시작한 역사예요. 당시에 교권주의, 경직된 신학과 특히 선교사들의 더러운 의도, 옛날 선교사들의 생각에 한국교회를 좌지우지했던 그 달콤한 시대가 그립거든, 그래서 신사참배 때 일단 미국에 갔다가 해방되면서 다시 돌아와서 교권을 회복하는데, 또렷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무장한 장공이란 저 사람을 두고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거예요. 그래서 서로서로 합작해서 장공을 죽인 거예요. 마치 예수 살해하는 데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대제사장, 빌라도까지 합세해서 그랬듯이.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시기에 웜스의 제국회의(1521년)에 귀족들, 왕들, 추기경들이 다 모여서 루터를 호출했잖아요? ‘고백해라 잘못했었다고’, ‘다 취소한다고 말해라’, 그때 그 위대한 루터의 마지막 증언, 위대한 세기적 증언, “나의 양심과 성서가 잘못되지 않는 한, 양심과 성서가 명령한 것이 더 중요하지 교황권, 제국회의는 내 눈에 하나도 없소. 나는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한 장 한 개의 논문이라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를 도우소서”라는 루터의 마지막 증언의 심정, 그 심정을 여러분이 장공에게서 봐야 할 것입니다. 장공은 당시 형제들에게서 신앙적 살해를 당했지만, 그는 오히려 담담했어요. 화가 나거나, ‘이 새끼들, 두고 보자!’ 이런 생각 없었어요. 결국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새로운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해 쓰시려고, 그의 표현으로 말하면, ‘과일을 결실 맺을 수 있는 가지를 하나 따로 세워놓으신 행위’로 담담하게 받아들였어요.

제4기 - 군부독재 시절(1961-1980) : 군부독재 시절, 역사적 현실 속에 뛰어들어 성서적 신앙의 핵심 주장의 하나인 <정의구현>을 위해, 인간 존엄성 지킴이와 민주주의 회복과 남북평화통일운동에 진보적 기독교계의 ‘대부’로서 헌신한 시기.

그 다음에 이제 군부독재 시대, 1961년부터 80년까지를 잡았습니다. 이 시기는 군부 독재시절인데, 장공이 역사 현실 속에 뛰어드는 시기죠. 신앙의 핵심 중의 하나인 정의 구현을 위해, 인간존엄성, 민주회복, 평화통일에, 글자 그대로 진보적 기독교의 대부로서 헌신한 시기고, 여러분이 장공에 대한 인상은 아마 거기에 거의 국한되고 고정되어 있을 것이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장공이 현실 한 복판으로 투신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아셔야 하는데요, 신앙으로 보면 하나의 섭리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박정희가 쿠데타 일으키고 모든 정권을 잡은 다음에 자기 멋대로 했어요. 교육법도 대학이고 뭐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데, 갑자기 ‘60세가 된 사람은 다 학교에서 그만두고 나가라, 학장도 다 사임하라’, 이렇게 학장직 퇴임 연령을 60대로 잡았거든요. 장공은 모처럼 20여 년 동안 1940년부터 60년까지 신학교 교육을 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이제 이 해방된 뒤에 이 수유리 언덕에 건물을 짓고 본격적으로 신학교육을 한번 해서 역사와 나라와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고 부분 발전시킬 사자 새끼들을 길러내려는 큰 꿈을 꾸자마자 박정희 일당에 의해 쫓겨난 거예요. 나가고 싶어서 나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것을 가만히 보면, 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해요. 물론 장공이 그대로 학교에 남았더라면, 신학교육자로서 훌륭한 일을 많이 남기셨겠지만, 한국사회 1970-80년대, 뭐 장점도 있고 단점도 많지만, 우리가 말하는 KNCC와 기장(기독교장로회)를 중심으로 한, 그 시대의, ‘모든 게 돈이면 최고다’, ‘떡이면 전부다’, ‘경제발전이면 최고다’, ‘조국 근대화가 최고다’, ‘그것을 먹여 줄테니 너희들의 모든 것은 다 나한테 납부해라’. 이런 히틀러같은 주장에 대해서 ‘아니오’ 라고 말하는 소리가 우리 역사 속에 하나도 없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 한국 현대사가 얼마나 초라하고 밋밋하고 그랬겠어요. 소위 말하는 진보 계열이라고 하는 진보적 기독교, 숫자적으로 말하면 한국기독교의 20-30프로밖에 안되지만, 그 중심에 장공이 서 있는 데, 장공이 그렇게 세상 한복판으로 나가게 된 것은 어떻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어요. 참 이게 아이러니인데, 박정희가 쫓아냈지만, 자기 심장 속에 가장 무서운 사람을 불러들여온 계기가 됐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현실 한복판으로 뛰어드시게 됐고, 이제 한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운동을 시작해서, 소위 본 훼퍼가 강조하는 관념과 이념과 이론의 신학이 아닌, 살아있는 현실 폭풍 한 복판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 거죠.

아까 소개한 김상근 목사하고 제가 동기동창인데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저희들이 2학년 때인데, 기숙사에서 다 살았거든요. 시내에서는 4ㆍ19 데모가 일어나서 저기에서 벌건 불길이 일어나고 이쪽은 교통이 다 두절되었고, 지금 삼양동 이쪽에는 집이 한 채도 없었고, 버스도 안오니까 외딴 수도원 같은 곳이었어요. 그런데 풍문으로 들어서 다 알게 됐죠. 근데 그날 밤을 잊지 못해요. 지금 바로 지금 효촌관, 여러분의 기숙사 효촌관이 학장 공관이었어요. 장공이 거기서 사셨어요. 그 분이 밤에 가운을 입으시고, 건물 가운데의 잔디, 캄캄한 밤 10시, 11시가 넘었는데 나오셨어요. 학생들도 말이 없고 교수 몇 명하고, 장공이 묵묵히, 캄캄한 복판에 서 계시는 모습을 제가 봤거든요.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때 뭘 생각하셨을까? 지금 이제 돌이켜보면, 소위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중요하고, 하나님 나라는 역사를 변혁해가는 가루 서말 속의 누룩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하고 하는, 이론으로서는 많이 말씀을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자유당 이승만 정권시절에 한번도, 그 사람이 장로니까, 한국기독교는 당시 거의 다 기독교 국가가 되는 줄 알고, 무조건 이승만 만세하고 있는 때였으니까, 현실 한 복판에 살아 있는 복음으로서 증언을 하지 못했구나! 그런 것을 참다 못해서 젊은 스무살 남짓의 젊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고 저렇게 역사 한 복판으로 뛰어드는구나! 이런 깊은 아마 신학적 전기, 신학적 전회라고 할까? 그런 긴 밤을 지내지 않으셨는가! 그리 생각해요. 그 며칠 뒤에 장공은 한신 교수단 다 데리고 시내로 나간 거 아니에요?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하고 교수들의 유명한 4ㆍ19 지지 행렬이 있었는데, 거기에 장공이 몸으로 참석하셨거든요. 여하튼 그때부터 장공은 아카데미즘이라고 하는, 학교나 교실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 훼퍼처럼 현실, 생명, 역사, 한 복판에서 몸으로 살아있는 신학을 하시는 시기로 들어갔어요. 그게 그분의 신학적 활동이고 신앙적 활동이지 요새 흔히 말하는 정치에 참여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많이 오해들 하고 있는데. 그건 전혀 장공을 속을 모르는 거예요.

이런 장공의 제4기의 신학적 주제가 ‘하나님 나라와 역사 현실’을 어떻게 관계맺을 것이냐? 그런 문제지요. 그는 신학자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거성을 바르트, 틸리히, 떼이야르 샤르뎅, 본훼퍼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신학적으로 제일 큰 backbone 역할을 한 사람은 니버 형제들이었어요. 라인홀드 니버의 <크리스챤 리얼리즘>(Christian Realism),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를 뭐 종말에 맡겨버리든지, 현실에 아부를 해버리든지, 극단적 낙관주의나 극단적 비관주의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책임적 기독교인의 자세, 이게 니버의 <크리스챤 리얼리즘> 아니에요? 그리고 그의 동생인 리챠드 니버가 말한 <그리스도 복음과 교회의 역사문화 변혁설>(Christ as transformer of Culture), 복음이란 뭐냐? 교회란 뭐냐? 가루 서말 누룩처럼 그 속에서 자유를 녹여가면서, 그러나 자기가 없어지지 않고, 변혁해 가는 거다. 그걸 현실 속에서 실현을, 실천을 해본 시기예요. 특히 리차드 니버의 소위 문화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론을 저나 우리 세대는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조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만만치가 않은 이야기예요. 현실이라는 게 말랑말랑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무주공산이 아니란 말이에요. 현실은 현실대로 주인이 따로 있어, 전봉준을 죽이고, 최시형을 죽이고, 김구를 죽이고, 마하트마 간디를 죽이고, 마틴 루터 킹을 죽이고, 본 훼퍼를 죽이고, 의인은 다 죽이고… 종합해서 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창조하신 이 세계는 아름답고 선한 것이지만, 세상의 역사적 현실은, 참다운 사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상이란 걸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거요. 그걸 진지하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을 만만하게 보지 말란 말이예요. 만만하게 보니까 세상에 다 먹혀버리는 거야. 이론으로는 다 배웠어요. 뭐 복음은, 교회는,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과 분리되지도 않고, 세상과 담을 쌓지도 않고, 그것을 변혁해 간다. 변혁해 가? 변혁해 간 것이 아니라 변혁 당했지. 지금 한국기독교가 교횝니까? 오늘날 신자본주의 생리 그대로 물려받아서, 한수 뒤떨어질까봐, 빈익빈 부익부, 강한 것이 최고고, 큰 것이 최고고, 성공이 진리고, 다 그러지 않아요?

장공은 리차드 니버의 세상을 변혁하는 그리스도 복음을 강조했지만, ‘세상을 만만하게 보지 말라’, ‘변혁은커녕 도리어 먹힌다, 먹히고 있다’는 것을 많이 강조한 신학자이지, 이론으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에 제일 바람직한 것은, 다섯 번째 유형이다’, 그런 한가한 소리 한 사람이 아니올시다.

그래서 그 기간(제4기) 동안에는 기독교 지성인으로서, 갖출 건 갖추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도 또렷해서, 교계뿐만 아니라 이 사회 재야 사람들이 장공을 바라보고, 지도자로서 옹립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도 하시고, <민주수복 국민협의회> 공동의장도 하시고, 눈부신 활동을 하셨는데, 유신헌법이 강행 통과되자 가택연금을 거의 당하다시피 했어요. 쌍문동에 사셨는데, 꼼짝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연락도 할 수 없고, 전화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국내에선 아무 것도 못하겠다. 밖으로 나가서 세계 기독교 에큐메니칼, 기독교는 우주적 보편적, 세계적 종교니까, 세계적 신학 동지들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캐나다로 출국하신 거예요. 그것이 1973년 3월, 귀국이 1983년, 약 10년 계셨죠. 이걸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은 ‘아, 그때 국내에서 다 고문당하고 고생하는데 캐나다로 피신 갔다’, ‘뭐, 호화롭게 갔다’, 그런 거 아니에요. 캐나다 토론토에 가서, 사무실 하나 없이, 마친 조선신학교 시작할 때 그 고생하듯이, 거기서 <제3일>지를 속간하고, 미국과 캐나다를 합한 북미주에 내노라 하는 사람들 다 모여 있었을 것 아니에요? 국회의원 하던 사람, 장성 하던 사람, 민주화 운동, 남북통일운동 하던 사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장공이라는 한 사람을 정점으로 해서 흩어지지 않고 한 대열을 할 수가 있었어요. 그에 비해서 유럽은 그런 큰 거목이 없으니까 민주진영 사이에 자꾸 패거리가 갈라져서 큰 힘을 못썼어요.

그리고 그 기간에, 60-70년대 기장 안에는 두 흐름이 있었어요. 특히 목회자 사이에 목회 관점에서 소위 성풍회 그룹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역사 참여도 좋고 인권도 좋지만 목사가 일차적으로 교회를 부흥하고, 성령운동 열심히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그룹, 또 한편으로는 종로 5가 그룹, 소위 에큐메니칼 NCC 그룹이라는 민주화운동 그룹이 있었어요. 이 두 그룹 사이에 묘한 갈등과 서로 불신이 있었어요. 장공이 없었으면 기독교장로교 교단이 그런 걸 계기로 해서 둘로 쪼개질 수도 있었을 뻔 했는지도 몰라요. 역사에 이프(if)란 건 없지만, 성풍회 지도자들이 장공이 선생이니까 찾아와서 호소도 하고 하니까 장공의 말씀과 인격과 신앙 안에서, 서로 신앙 안에서 색깔은 좀 다르고 관심을 다르지만 우리는 한 동지고 하나의 기장이라는 하나를 이룰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성풍회 계열의 기장 교회의 목회 라인과 소위 인권 민주화의 라인이 늘 함께 서로 보완하면서 가야 하고, 그것이 장공의 정신이다. 그것에 장공이 큰 역할을 했다.

오산캠퍼스를 종합대학화는 좋아하셨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을 지지하셨으니까. 그러나 신학교육만큼은 마지막에 본격적으로 수유리 캠퍼스를 중심으로 해서 하기를 바라셨어요. 수유리 캠퍼스까지 팔아가지고 종합화하는 여론이 한쪽에 있었는데 그건 안된다는 확고한 태도를 표현하셨어요. 그래서 총회에서, 우리 학교는 학교법인이사회가 운영하지만, 학교 캠퍼스를 사고 파는 것은 이사회에 맘대로 할 수 없고, 총회 전체의 결의가 있어야 된다는 결의를 총회에서 하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하여튼, 그것도 캠퍼스에서 공부하는 여러분이 알아두셔야 해요.

제5기 : 생활신앙과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강조한 시기(1980-1987)

마지막 제5기는, 귀국하셔서 돌아가실 때가지로 생활신학하고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말씀하시던 시기, 10년이 못되죠. 1983년에 귀국하셨으니까, 한 4-5년 동안 우리 남한 땅의 어디 안 가신 곳이 없어요. 해남으로부터 저 강화, 첨성대, 오대산 월주사, 절간이고 독립운동 기념관, 그렇게 <고토를 거닐다>라는 조그만 책을 남기시면서까지 조국의 산하를 사랑하셨어요, 장공이. 그러면서도 이제 마지막까지 민주화 인권 평화통일 운동 하셨는데, 박종철 국민추도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1987년 1월에 발표하시고 며칠 뒤에 타계하셨거든요. 여러분 아실꺼예요.

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화두를 새롭게 내걸으셨을까? 저도 좀 많이 생각했어요. 그의 마음이 변했는가? 신학적 신념이 변했는가? 그렇지는 않아요. 분명히 합시다.

첫째로, 그건 하나님 나라, 본래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그 상징이 가지고 있는 꿈과 비전이 굉장히 우주적이면서도 인간의 실존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고 넓잖아요. 그런데 우리 교회사 속에서 신학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점점 작고 좁아져서, 너무나 인간 중심적이고, 정치 역사 의식 중심적이고, 정의 가치만을 강요를 하고, 사랑은 소홀히 하고, 기껏해야 지구에 국한된 시공세계적 개념으로 왜소화되어가는 것을 장공은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똑같은 이야기인데, 하나님의 나라인데, 하나님 나라가 지닌 본래의 의미인 전피조물 온 피조물의 샬롬, 생태계의 위기극복, 정의만이 아니라 사랑, 역사 내재적이며 동시에 역사초월적인, 죽음 세계 너머의 천국까지, 그걸 다 아우르는 큰 그리스도교의 꿈, 비전, 그곳에로의 복귀, 그것의 회복이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화두로 표현됐다고 봐요.

둘째는 이제 영성신학으로 말하면 프로테스탄트 영성(프로테스탄트 원리)과 가톨릭의 영성의 융합으로서의 ‘우주신인론적 영성’(Cosmotheandric spirituality)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라이몽 파니카, 떼이야르 샤르뎅이 말하는 우주와 하나님과, 인간이 각각 자기 역할을 하면서도 서로 상호침투, 상호회통하는, 그걸 Cosmotheandric spirituality라고 신학적으로는 그래요.

셋째로는, 그것으로 복귀하면서, 초기 그가 가졌던 프란시스코 수도자 정신인 청빈과 일상, 날마다 날마다 일상이 성화되는 일상의 성화(聖化), 그리고 정치권력, 경제권력, 문화권력이, 권력 잡은 놈들이 지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크리스텐돔(Christendom)의 나라가 아니잖아요. 기독교 국가가 아니잖아요. 종교개혁시대가 아니잖아요. 완전히 세속화 되어버린 시대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라”고 교회에서는 설교를 할 수 있겠지만, 불교도 있고 다른 종교도 있는데, 그런 말이 안통하지요. 그러니까, 그것을 세상적인 말로,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의 공공성이라고 해요. 공공성. 그것을 많이 강조하셨어요.

결론을 대신하여

아까 시작할 때 내건 세 가지 질문 중 첫째, 왜 장공은 늘 새롭고, 늙지 않고, 낡아지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결론내리고 싶어요. 장공이란 사람은 어떤 한 특정 시대의 신학체계를 참고를 하지만, 배울 것은 배우시지만, 신학이라는 것은 인간이 수행하는 학문의 한 시도에 불과하니까 그걸 절대화시키지 않고 그걸 상대화시키는 신앙의 자유인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신학에도 예속당하지 않았어요.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누가 강조하듯이 장공이 바르티안이 아니예요. 틸리히나 본훼퍼를 받았지만, 틸리히안이나 본훼퍼 신학도가 아니란 말이에요. 오직 복음의 실체 그 자체인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늘 주목하고, 그분과 만나고, 그분과 동행했기 때문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신학하고 함께 신앙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의 신학이나 사랑이 낡아질 수 없죠. 그리스도가 항상 우리에게 새롭듯이 말이예요. 나는 비밀이 거기 있다고 봐요. 그래서 신학도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장공은 신학교육의 핵심은 뭐냐? 그리스도교에 관해서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배우고 자격증받고 나가는 것이 아니란 말에요. “talking about Christianity or Christ”가 아니란 말이에요. 진정한 신학교육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심장과 그의 영과 부딪치고 조우(遭遇)하고, 그분에게 나의 전 존재를 내어맡기고 신뢰하는 것(encounter with and commitment to living Christ as Lord)임을 강조했어요. 그것이 신학의 요체다. 그것 잊어버리면 신학교육은 직업학교가 되고, 교회도 죽은 교회가 됩니다.

둘째 문제, 왜 그는 마지막까지 정치적 문제 현실에서 발을 빼내지 못했나? 나는 솔직히 불만이었거든요. 말년에는 도인처럼 노자 할아버지처럼 좀 장공 호처럼 훨훨 날아가셔야 하는데,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 박종철 문제에 참여하고 편지 쓰고…. 저는 그분의 글을 읽다가 수수께끼를 풀었어요. 장공이 이렇게 말해요. “예수의 정치는 (예수가 정치했다고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어요. 87세 할아버지가, 요사이 하는 이런 정치하고 같이 생각하면 안돼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장기적이고 종합적이며 본질적인 경륜과 배포에서 추진된다. … 예수는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義)의 뿌리를 심어 넓게, 깊게 뻗게 하는 정치를 계속한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 본질에 있어서 현실 참여와 분리되거나 현실 정치에 무관심할 수 없다.”(<장공의 생활신앙 깊이 읽기>, 154쪽) 이것이 두 번째 내가 가졌던 의문에 대한 해답이에요.

마지막 세 번째, 그의 신앙과 삶에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뭐가 있느냐? 저는 있다고 봐요. 그것은 한마디로 줄이면, ‘성육신적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것은 뭐냐? 성육신적 영성이라는 것은 말씀의 화육신앙을 그 본질로 삼고, 지구, 대지, 역사현실, 인간, 몸, 물질, 생태계,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 예수 삶에서 본을 보이신 ‘자기 비움과 섬김의 도’를 핵심으로 삼고 그렇게 사는 것이죠. 그것이 성육신적 영성이라는 거예요.

여기에 참석한 우리 젊은 신학도들, 어차피 무슨 인연이 됐든지, 이 학교에 왔으니까, 졸업하기 전에 써야할 필독도서라고 소개한 세 권을 꼭 읽어보기를 바래요.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은 장공 전집에서 엑기스만 뽑은 거예요. 이것을 반드시 읽고 졸업해야 해요. 내가 분명히 말합니다. 이걸 읽지 않고 한신을 졸업해도 졸업장은 주겠죠. 학위증서를 주겠죠. 하지만 그건 가짜 한신대학대학원의 졸업장이고 가짜 졸업증서라고 나는 생각해요. 나는 장공을 우상화하자는 거 아닙니다. 장공도 한 인간이야. 그러나 장공의 정신과 영성을 모른채 기장인? 한신대학원을 졸업했어? 이건 순 도둑놈이야. 사기쟁이야. 그 나머지는 그걸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이니까 참고하면 될꺼예요.

[필독도서]

[1] 장공기념사업회,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한신대학 출판부, 2014)
[2] 김경재, <장공의 생활신앙 깊이 읽기>(삼인, 2016)
[3] 장공기념사업회 편, <장공김재준의 신학세계 1, 2>(한신대학출판부, 2016)

[질문과 대답]

<장공의 갇혀있는 역사가 아니라 종교와 사회와 문화를 넘어서는 상호관계, 상대성에 관한 부연설명>

아까 말했듯이 장공은 폭이 넓고 깊고 크시죠. 솔직히 말하면 60년대 70년대 한신은 이제 개혁교회 전통, 개혁파 장로교 전통 중에 자연히 칼빈이나 바르트 신학을 강조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한신이 감리교신학대학과 비교할 때, 한국문화, 전통, 오늘 우리를 있게 한 지난 3, 4천년간 우리 조상들의 신앙과 종교와 삶과 고뇌와 사상과 철학에 대해서 너무나 소홀히 했어요. 무관심했어요. 또 무지했어요. 그에 비해서 감신은 그 점에서 공헌을 많이 해서, 소위 토착화 신학이라는 것을 우리보다 많이 다루었어요. 우리(한신)는 역사 정치신학을, 저쪽(감신)에선 토착화 신학을, 우리(한신)는 민중신학에 공헌하고, 저쪽(감신)은 문화신학에 공헌했어요. 그런데 장공은 우리 개혁교회 전통에 굳건히 서면서도 그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계셨어요. 그래서 장공 속에는 여전히 아까 말했던 문화신학, 토착화신학을 긍정하시고 65년대에 기독교사상에다 기고한 글들 속에 이미 다 말씀하고 계셔요. 그러면서도 오늘날 김경재를 오해한 사람도 교단 내에 많은데, 종교다원론이라는 것이, 비빔밥 하자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다 똑같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러면 기독교 신학도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니죠. 역사적 종교의 형태로서의 기독교, 그것은 칼 바르트라는 20세의 위대한 신정통주의자도 그의 예언자적인 ‘로마서 강해’에서도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똑같이 계시의 빛 아래 심판받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했어요. 다만 정신을 차리면 그리스도교 안에 내포되어 있는 본래성을 잃지 않으면, 다른 종교보다는 특수한 자기의 의미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이예요. 장공은 오늘 강의 내내 말하지만, 예수에게 붙잡힌 사람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신실, 하나님의 신실에 이론이 아니고 체험으로 현실로 붙잡힌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 기독교 복음을 상대화시키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러면서도 다른 모든 세상의 종교와, 철학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본 것이죠.

<장공의 신학 사상 하면, 지성적 윤리적 유형으로만 우리가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심층 속에는 성령론적 인간혁명이라는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학문을 하기 전에, 영성을 배우기 전에, 사람됨이 먼저라는 취지로 들었는데, 그 두 가지 양면성을 장공의 사상 속에 조화롭고 균형있게 신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것에 대한 부연 설명>

장공의 말년에 쓰신 글들을 보면 장공은 인간성을 그렇게 낙관만은 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북미주에서 인권운동 통일운동 하면서, 나라사랑하는 사람, 애국하고 통일운동하는 애국지사들, 국회의원들, 목사들을 많이 만나면서, 그 인간들 속에 들어있는 끊임없는 명예심, 권력욕, 자기를 놓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 얼마나 깊고 끈질긴, 쇠심줄 보다 더 지독한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래서 성령의 찬가를 보면, “성령님이여 당신이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지 않으면, 인간이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정말 당신이 우리 인간을 새롭게 해주십시오” 하는 성령의 신학으로 다시 호소를 하고 있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전 우주하고도 바꿀 수 없다’, ‘국가의 발전을 명분으로 한 사람을 희생하는 국가발전은 필요 없다’ 하고 인간의 존엄성, 하나님의 형상을 끝까지 붙들면서도 동시에 현실적 인간 실존적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 구체적으로 명예심, 권력욕, 야망, 자기 주장, 이것이 마지막까지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고 통일운동을 저해하고, 민주화운동을 저해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시고, 그래서 말년의 그분이 쓰신 글을 보면, 참 처참한 생각이 들 정도로 맘이 아파요. 젊은 우리 신학도들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말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기독교가 인간을 이해하는 진솔한 모습이 아닐까? 예수께서도 정말 순수한 서민들 민초들은 끝까지 믿으셨지 않아요? ‘너희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일 할 수 있어!’, ‘너희들은 하나님의 온전하심대로 온전하게 될 수 있어!’ 하시고 한없이 격려하시고 믿어주시면서도 당시 지도자라고 하는 바리새인들, 종교인들, 대제사장들, 정치인들은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하면서 얼마나 가혹한 비판을 하셨어요? 그 양면성을 동시에 보자, 한쪽만 보면 낙관주의가 되고, 또 한쪽만 보면 비관주의가 되니, 그러면 안된다. 기독교는 거기 양면성을 동시에 보는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아까 말한 라인홀드 니버의 크리스챤 리얼리즘도 그걸 윤리적으로 확대 적용시키면 그런식으로 되겠죠.